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우리 함께 깨닫기 - 3

장백산-1 2013. 3. 23. 22:41

 

 

 

 

 

★ 불자님들께 쏘아 올린 다섯 발의 대포 ▶ ③ 많은 사람들의 苦痛으로 話頭를 삼으라 !!!|마음 나누기
일행거사 | 조회 17 |추천 1 |2013.03.04. 13:37 http://cafe.daum.net/truenature/7pe3/3023 

 

..

 

마하반야 바라밀, 우리도 부처님 같이...

 

 

불자님,

 

이제 다섯 발의 대포 중에서 세 발 째  大砲를 쏘아 올리려 합니다.

 

이 세 발 째 대포에서는 지금까지 우리들이 當然視 해왔던 "깨달음은 修行의 産物이다." ,

 "부처님의 가르침(교리, 경전)을 알아야만 깨칠 수 있다."는 生覺들이 갖고있는 本質的인 問題点이 무엇이고, 

그 問題点을 克復하기 위한 바른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불자님의 分明한 理解와 行動을 促求할 것입니다.

 

왜 우리 불교가 '만인의 불교'가 못되고 '만일에 불교'로 變質되어 가는지,

왜 우리 불교가 慣習的이고 無氣力한 불교로 衰落해 가는지에 대한 깊은 省察의 機會가 되시기를 바랍

니다.  _()_

 

....

지금 많은 사람들은 修行이 아니라 삶에 直面하고 있다. 삶의 問題, 삶의 苦痛에 直面하고 있다.

고따마 부처님, 그는 오로지 많은 사람들의 苦痛을 問題 삼고 그 治癒를 위하여 沒頭하고 있다.

몸이 낡은 수레처럼 무너져내릴 때까지 -

 

‘이 世上은 永遠한 것입니까? 無常한 것입니까“ ’靈魂이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 이렇게 本質義 問題, 形而象學的인 問題에 관해서 끊임없이 苦悶하고 質問하는 말륭까에 對하여

붓다는 이렇게 對答하고 있다.

 

 

‘말륭까여, 나는 오로지 苦痛의 問題에 관하여, 苦痛의 생겨남과 消滅, 消滅의 方道에 관하여 說한

.’ (苦 集 滅 道) (Malunkya-Sutta, Mn 1. 431)

..... 

이것이 우리들의 話頭이다. 「우리 함께 깨닫기」의 화두이다. ....(본 문 내용 중에서...)

 

(혹시 ★ 불자님들께 쏘아 올린 다섯 발의 대포 ▶

 ① ② 자료를 보시지 않은 분은 본 게시판에서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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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강의 – 대중견성론>

 

                希望의 出口 –「우리 함께 깨닫기」

                                  – 우리도 부처님같이 –

 

                                                                             김재영 (동방불교대 교수, 청보리회 법사)

 

 

[강의 3] 「우리 함께 깨닫기」, 話頭는 무엇인가?

 

1. 깨달음과 修行에 관한 省察

 

1)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見性이란 무엇일까?

 

깨달음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見性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야타부탕 빠사띠(yathābhūtam passati)', ’눈앞에 펼쳐지는 事實 그대로 보는 것‘이다.

여실지견(如實知見)하는 것이다.

눈앞에서, 日常的인 삶의 現場에서, 나 自身과 많은 사람들의 삶의 現場에서,

이 社會現場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곧 ‘연기(緣起)’를 보는 것이다. ‘條件의 現實’을 보는 것이다.

나와 많은 사람들이, 이 世上 모든 生命들이 數많은 條件으로 서로 얽혀있는 한 흐름의 生命이라는

生命의 現實을 보는 것이고, 죽음 질병 빈곤 폭력 전쟁 등 우리들이 直面하고 있는

모든 問題와 苦痛들(dukkha)이  어두운 慾心(貪慾, raga, tanha)이라는 條件 때문에 生겨나는

이 自明한 어둠의 現實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窮極的으로 ‘나누고 섬기면서 마음통찰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우리 가정 직장 사회를

義롭게 變化시키고 많은 사람들이 利益과 幸福을 實現하는 最善의 길이라는

밝음의 現實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自己自身을 確立하고 生命의 빛을 발하는 最善의 길이라는 成就의 現實을 보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事實 그대로, 現實 그대로 잘 알아차리고 잘 理解하고 信念을 가지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길(豫流, )로 들어선다’는 것은

‘나누고 섬기면서 마음통찰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이다.

‘아라한이 된다’ ‘成佛한다’ ‘見性한다’는 것은

이렇게 ‘나누고 섬기면서 마음통찰하면서’  온전하게 熱心히 살아간다는 것이다.

 

 

2) 깨달음은 修行의 産物인가?

 

깨달음은 修行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 見性 解脫 涅槃 成佛은 몇 년 몇 십년 수행하며 앉아서 기다리는 것 아니다.

修行해서 얻는 것이라면, 그것은 유위법(有爲法)이다.

有爲法은 ‘만들어진 것’  ‘생겨난 것’이다.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머지않아 消滅된다.

 

‘生겨난 것은 반드시 消滅한다’,

 

이것은 ‘無常의 담마(無常法)이다. 萬古의 眞理이다.

히말라야는 山行해서 만들어지는 것 아니다.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때 瞬間瞬間 드러나는 것이다.

山行은 히말라야를 만들러 가는 것이 아니라, 보고 느끼고 그렇게 山사람으로 살고 싶어 가는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의 山行 그 自體가 目的이다.

 

깨달음은 눈 앞에서 보는 것이다.

‘나누고 섬기면서 마음통찰하면서’, 이렇게 진지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

삶의 現場에서 우리는 瞬間瞬生命의 빛을 본다.

光明燦爛한 우리 生命의 빛을 보고  드러내고  꽃피운다.

금 여기서 눈에 보이는 삶으로’ (ditthe vā dhamme, seen in the present existence)‘,

이것이 깨달음 見性이다.

 

’눈 있는 者는 와서 보라(ehipassika, come and see)',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깨달음 見性 解脫 涅槃 成佛이다.

 

독거노인을 찾아가 씻겨드리고 따뜻한 밥 한 그릇 지어 供養올릴 때,

기뻐하는 어르신을 보고 눈물 흘릴 때, 우리는 그 瞬間 문득 우리 生命의 빛을 본다.

한달 만원씩 내서 캄보디아 한 어린이를 학교에 보내고 하루 한 끼의 더운 밥을 먹일 때,

기뻐하는 아이들의 사진을 보고 고요히 微笑할 때, 우리는 거기서 문득 우리 생명의 빛을 본다.

 

'본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깨닫는다‘ ’견성한다‘는 것은 이렇게 日常的인 삶의 現場에서 具體的인 現實로 보는 것이다.

독거노인의 웃음으로 보는 것이고

캄보디아 어린이의 웃음으로 보는 것이고,

눈물과 고요한 미소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눈앞의 現實로 보는 것‘이고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 친구들, 여기 와서 이 독거노인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여러분, 친구들, 여기 와서 캄보디아 어린이의 저 天眞한 微笑를 보십시오.’

 

누군들 이것을 보지 못할까? 누군들 이렇게 하지 못할까? 누군들 見性하지 못할까?

그래서 大衆見性이다. 「우리 함께 깨닫기」이다. ‘努力하면 쉽게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3) ‘한소식 神秘主義’ 淸算해야

 

‘깨닫는다’는 것은 이렇게  눈으로 보는 것이다.

‘緣起를 본다’는 것은 이렇게 눈앞의 現實로 보는 것이다.

삶의 現場에서 몸으로 부딪치면서 現實的으로 體驗해서 깨닫는 것이다.

 

緣起는 學者들이 밝혀내는 무슨 深奧한 法則이 아니다

三昧에 들어서야만  보는 微妙한 理致가 아니다.

삼매(三昧, samādhi)라는 것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이란 것도 實相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三昧를 자꾸 神秘化하고 專門化하니까,  ‘어떤 무엇 特別한 境地가 있겠거니 – ’하는

固定觀念(相, saṅṅā)이 생겨서 三昧가 도리어 있는 그대로 보는데 障碍가 된다.

 

緣起는 熱心히 살아가면서 瞬間瞬間 느끼고 문득문득 보는 것이다. 그래서 緣起는 現實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條件으로 얽혀있는 한 生命의 흐름이라는 것,

모든 苦痛은 어둔 慾心에서 생겨난다는것,

나누고 섬기면서 마음통찰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 사이의 모든 갈등 고통은 根源的으로 治癒된다는 것,

熱心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군들 이만한 現實을 보지 못할까.

 

도대체 ‘깨닫는다’   ‘한소식한다’하면서  왜 그리들 야단법석들인가?

목숨 거는가?  貴重한 人生 그렇게 虛送하는가?

眞實로 이 世上을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대 한분 한분이 얼마나 貴重한 이 世上의 材木들인데 –

 

見性하면 어마어마한 境地가 나타나는 것 같은 ‘한소식 神秘主義’는 반드시 淸算돼야 할 것이다.

깨달음 견성에 관한 일체의 신비주의 다 던져버려라.

‘오래 앉아 닦아야 견성할 수 있다’는 수행우월주의  다 던져버려라.

 

그것은 行爲하지 않는 者들, 나누고 섬기는 社會的 獻身에 關心 없는 者들이 쌓아올린

觀念의 城, 虛構의 城일 것이다. 만일 그런 神通한 境地를 본다면, 그것은 外道이지 佛敎는 아닐 것이다.

오래 앉아야 볼 수 있다고 主張한다면, 그것은 外道의 禪定主義者들이지 佛敎는 아닐 것이다.

 

고따마 부처님은 그런 外道  禪定主義  다 克復하고 삶의 現場에서, 歷史의 現場에서

있는 그대로 보고 道하셨다. 부처님의 法은 現實的으로 體驗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그런 實際的인 것들(sandiṭṭhiko, visible, practical)이다.

한소식해야 볼 수 있는 그런 特別한 것이 아니다.

 

‘웨살리 大法門’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說하신다.

 

아난다여, 나는 안과 밖이 없이 法을 說하였다. 아난다여,

如來가 가르친 法에는 스승의 주먹과 같이  그안에 [감춰진, 신비한] 것이 없다.’

(대반열반경, (D ⅱ 101)

 

 

4) 나는 이미 부처인가? 이 世上은 이미 淨土인가?

 

‘깨달음은 修行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見性은 손바닥 뒤집기(如反掌)이다.'

'누구든지 쉽게 볼 수 있다’ 라고 ,

 ‘내가 이미 부처다’

‘내가 이미 깨달아 있다’

 ‘내가 이미 佛性을 지녔다’

‘이 世上이 淸淨淨土이다’ - 이렇게  말하지 말라.

이것 또한 사견(邪見)이다. 오만만 키울 뿐이다.

 

이미 부처라면 무엇 때문에 이런  苦痛으로 괴로워할 것인가?

‘無明  業障 때문에 - ’라고 할 것인가?

本來 부처인대 어찌 無明 業障이 붙을 수 있는가?

 ‘부처님 눈에는 이 世上이 모두 光明天地다’ 라고 할 것인가?

 

이것은 現實을 外面하고 호도하는  거짓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苦痛받고 죽어가는 이 嚴重한 現實의 苦痛을 外面하고 도피하는 거짓말이다.

이것이 大乘經典의 弱点이다. 아니, 잘 못된 解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불지견(佛知見)이다’

‘비로자나불의 大寂光이다’

 ‘華嚴法界다’

‘連華藏佛國土다’

‘一心이 淸淨하면 國土가 淸淨하다’ … 라고 아무리 외쳐보았자,

지금 이 瞬間 北韓 同胞들은 굶주림으로 苦痛 받고,

아프리카 어린이들은 ‘魔女’로 몰려 죽어가고 있다.

靑年백수들은 希望을 잃고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불교도는 아무것도 못 하고 있지 않은가.

自身과 世上을 속이는 헛소리 헛소리들 –

 

‘이미 부처다’ 하면, 이것 또한 有爲의 觀念이다.  ‘있다’는  邪見에 빠지는 것이다.

부처는 本來  이미 그렇게 있는 것이 아니다.

眞如佛性  淸淨 自性은 本來 이미 그렇게 빛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부처가 무엇인가?

瞬間瞬間 드러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 따라 피땀 흘리며 열심히 살아갈 때, 瞬間瞬間 드러나는 것이다.

이 世上의 불의(不義)와 對面하며 물러서지 않고 自己犧生의 삶을 實踐할 때, 문득문득 드러나는 것이다.

꽃은 비바람 속에 문득문득 피고 지고, 물은 장애를 뚫고 瞬間瞬間 흘러간다.

一切가 텅 - 빈 가운條件따라  瞬間瞬間  문득문득 드러나는 것,

이것이 깨달음의 世界이다. 生命의 世界이다.

 

 

3. 삶의 苦痛, 많은 사람들의 苦痛으로 話頭를 삼으라

 

1) 敎理로서 찾지 말라. 參禪 ‧ 위빠사나로서 보려고 하지 말라.

무엇을 찾겠다고, 무엇을 보겠다고 生覺하면 그것은 이미 틀린 것이다.

유위(有爲)의 觀念에 빠지는 것이다.

‘마음을 본다’  ‘自性을 본다’라고 하지만, 마음 ‧ 自性은 本來 없는 것이다.

어떤 實體도 없는 것이다.  무엇을 보겠다는 것인가?

 

觀念을 떨쳐버리고, 삶으로 나아가라. 눈앞에 펼쳐지는 日常的인 삶의 現場으로 나아가라.

많은 사람들의 現場으로, 家庭 職場 社會 現場으로 나아가

몸 부딪치며 부처님 가르침 따라 치열하게 살아라.

‘나누고 섬기면서 마음통찰하면서’ 열심히 살아라.

그리하면 보게 될 것이다. 느끼고 깨닫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아니, 못 본다 한들 무엇이 아쉬우랴. 깨닫지 못한다 한들 무엇이 問題랴.

나누고 섬기는 瞬間瞬間,

마음통찰 하는 瞬間瞬間,

우리 生命의 빛은 그대로 활짝 꽃피고 있는데.

바람이 건들 스치는 瞬間  하늘빛 나팔꽃은 문득 피고 지는데 –

 

부디 ‘깨닫겠다’는 生覺에서 벗어나라. ‘한소식’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라.

무위진인(無位眞人), 平凡한 日常으로 돌아가라. 平凡한 日常의 삶으로 돌아가라.

환지본처(還至本處), 거기가 우리들의 本來 故鄕 아닌가.

 

2) 교리공부 ‧ 참선 ‧ 위빠사나 –

 

참 좋은 것이다. 우리 人生을 꽃피울 훌륭한 道具들이다. 우리 불교의 寶石들이다.

다만 道具를 神秘化하고  絶對化해서 거기 埋沒되니까  ‘안된다’는 것이다.

 

敎理工夫를 ‘뭔가 깨달아야겠다’는 修行으로 하지 말고, 삶의 한 過程으로 삼아서 해라.

십분 이십분 매일 매일 경전 보고 교리책들 읽기를 하루 日課의 한 部分으로 삼아라.

참선 ‧ 위빠사나를  ‘한소식하겠다’고 목숨 건 修行으로 하지 말고, 日常的인 삶 自體로 삼아라.

오분 십분 瞬間瞬間  허리 쭉 – 펴고 앉아서 呼吸을 헤아리며 몸과 마음을 지켜보고, 話頭를 들어라.

 

그리하면 그대의 삶이 크게 빛날 것이다. 그대 삶에 生命力이 넘치고 그대 가슴에 사랑이 솟아날 것이다.

삶의 問題들이 여지없이 잘 解決될 것이다. 돈이 슬슬 들어오고 健康해질 것이다.

家族들 얼굴에 웃음이 넘치고 職場이 번창하고 社會가 正義롭게 變化해 갈 것이다.

 

3) 지금 많은 사람들은 修行이 아니라 삶에 直面하고 있다. 삶의 問題, 삶의 苦痛에 直面하고 있다.

고따마 부처님, 그는 오로지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문제 삼고 그 치유를 위하여 몰두하고 있다.

몸이 낡은 수레처럼 무너져내릴 때까지 -

 

‘이 세상은 영원한 것입니까? 무상한 것입니까“ ’영혼이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 이렇게 본질의 문제,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질문하는 말륭까에 대하여 붓다

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말륭까여,

나는 오로지 苦痛의 問題에 관하여, 苦痛의 생겨남과 消滅, 消滅의 方道에 관하여 說한다.’

(Malunkya-Sutta, Mn 1. 431)

 

 

4) 苦痛 - 고통의 문제, 많은 사람들의 고통의 문제 

이것이 우리들의 話頭이다. 「우리 함께 깨닫기」의 화두이다. 

‘지금 나는 무엇으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있는가?’ 

‘지금 우리 동포들은 무슨 문제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는가?‘ 

‘우리 가정 우리 직장 우리 이웃의 문제가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들의 話頭이다. 「우리 함께 깨닫기」의 話頭이다.

 ‘이뭣고’의  이  무엇은  곧 많은 사람들의 苦痛이다.

삿띠를 하고 사마타를 하고 간화선을 하는 것은 바로 이 苦痛이라는 話頭를 챙기기 위해서다.

지관(止觀)하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하는 것은 이 ‘苦痛의 話頭’를 챙기기 위한 豫備的 訓練이다.

 

많은 사람들의 고통 – 빈곤 질병 폭력 전쟁 계층갈등 환경파괴 등등....

이 社會의 問題, 많은 사람들의 問題를  있는 그대로 觀察하고 最善의 解決策을 보고 行爲하기 위한

日常的 訓練인 것이다.*

 

 

※ 관련 동영상 보기

 

Dr.K 대중견성강설▶ 깨달음의 허위의식에서 벗어나라 !!!

                            http://cafe.daum.net/bmcbori/6axv/4

 

 

 

붓다 메신저 - 청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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