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宇宙가 迷妄에 依해 생겨난 幻象에 불과하며 무엇을 짓는다는 것이 輪回의 原因이 되는 業을 짓는 것이라고 生覺하는 사람들은 人間이 뜻을 세워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을 一種의 執着이며 欲望이라고 生覺한다.
그러나 人間이 世上에 태어나는 것은 움직여 무엇을 짓고자 함이니 삶을 살아가면서 좋은 뜻을 품고 이를 이루려고 努力하는 것은 人間의 基本的인 生存方式이며 存在 理由이다.
그런데 이를 無視하고 태어나는 生存 自體를 無意味하게 生覺하고 世上살이를 無意味하고 無價値한 苦痛의 바다에 떠밀려 내려온 것으로 生覺한다면 더 以上 眞理를 究하거나 삶을 窮理하는 것은 意味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차라리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자리에서 世上을 떠나는 것이 좋다. 그들에게는 무엇을 하던 이 世上 속에는 아무런 意味도 길도 없고 살아볼 價値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世上은 完全한 法界이며 지은대로 받는 因果法이 이 世上에 完全하게 펼쳐져 있다’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意味하는 것일까?
그것은 좋은 原因을 지으면 좋은 結果가 있으며 나쁜 原因을 지으면 不幸이 오는 完全한 世上이 우리에게 던져져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이샬리의 황혼을 바라보며 "이 世上은 참 아름답고 살만하다!"’ 고 하시면서 ‘바른 理致를 깨닫고 熱心히 좋은 原因을 지어 解脫에 이르라’고 하셨던 것이며 모든 부처의 공통된 가르침인 칠불통계에도
‘모든 惡을 멀리하고 모든 善은 받들어 行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고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厭世的으로 보고 모든 行爲를 業과 苦로 보는 것은
善因善果 惡因惡果의 因果法이 흐르고 있는 完全한 이 世上을 正確히 說明하는 正法이 아닌 것이다.
現實을 살아가자면 人間이 반드시 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이 생겨나게 된다.
職場도 잡아야 되고 結婚도 해야 하고 出世도 해야 하고 깨달음도 얻어야 한다.
이처럼 人間이 살아가면서 생기는 모든 일들은 意欲하지 않고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觀念化된 佛敎가 事實과 다르게 어떠한 執着을 내어서도 안된다고 하니
불교인들은 사람으로서 基本的으로 지녀야 할 所望조차도 품을 수 없어
現實에 積極的으로 나설 수도 없고 恒常 엉거주춤한 姿勢로 살게되는 것이다.
그러니 불교인들은 冷嚴한 生存現實에서 全力을 다해 달려가는 다른 競爭者들을 이겨낼 수가 없어
恒常 敗北者가 많고 厭世論者가 많아 現實 속에 불교의 位相은 날로 萎縮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法이 實相法이고 因果의 理致를 밝히는 가장 現實的이고 科學的인 法이라면
現實이 이렇게 되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일이다. 이렇게 된데에는 實相을 空이라 여기는
觀念的인 佛敎가 들어와 事實과 理致를 重視하는 부처님의 實相法과 因果法을 破壞한 營響이 크다.
現在 流行하고 있는 불교는 苦의 原因을 執着으로 把握하여 世上 사람들이 有限한 財物과 欲望에
執着하여 苦痛에 빠진다고 보고 善業 또한 하나의 執着이므로 여기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主張한다.
그러나 부처님이 누누이 말씀하셨듯이 執着이 苦의 原因이 아니라
올바른 길을 모르고 잘못된 欲望으로 나아가는 無明이 바로 苦의 原因인 것이다.
부처님은 人間의 올바른 바램을 否定한 적이 없다. 초기 경전의 대부분의 내용이 人間의 좋은 마음과 善業에 대한 가르침으로 恒常 바른 가르침을 찾고 實踐하여 功德을 쌓고 解脫에 이르도록 努力하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좋은 뜻을 내어 人間의 길을 찾고 戒律을 지키며 永遠한 涅槃에 이르고자 努力하는 것은 人間의 길이며 바람직한 所望인 것이다.
人間이 짓는 뜻에는 두가지가 있으니 所望은 모든 일을 理致에 맞게 推進하여 바람직한 目的과 좋은 自己를 이루는 것이고, 欲望은 手段과 方法을 가리지 않고 헛된 目的을 추구하여 自己를 亡치게 되는 것이다.
所望은 모든 것이 順理에 맞기 때문에 그에 따를수록 삶이 좋아지고 心身이 무르익지만 欲望은 理致에 맞지 않으므로 그에 執着할수록 거짓이 생기고 마음이 病들어 自身과 世上을 亡치게 된다. 卽 바른 理致에 따라 좋은 原因을 지어 自身과 世上을 祝福할 할 때는 所望이 되고 善業이 되는 것이며 理致를 어기고 넘어서서 所望이 欲望이 될 때 그것은 無明이 되어 苦의 原因이 되는 것이다.
人間이 所望을 안고 智慧롭게 살아가기 위해 正法과 因緣이 있어 實相을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부처님은 이 世上이 完全한 法界라 하셨다. 卽 이 世上의 모든 것이 因果法에 依해 完全한 法界 속에
나타나고 있으니 現實을 바로 보고 因果法을 깨치면 現實의 모든 問題를 解決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卽 宇宙의 實相과 因果의 理致, 人間의 길을 바로 알아 欲望을 所望으로 바꾸고 恨을 祝福으로 바꾸면
恨과 어둠이 없는 밝고 健康한 世上과 人間完成의 길이 열리게 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所望과 欲望의 差異는 그 뜻과 理致에 依해 決定된다. 같은 일이라도 바른 理致대로 열심히 노력하여 좋은 나를 만들고 좋은 世上을 만들기 위해 富者와 大統領이 되겠다는 뜻을 품는 것은 所望이 된다. 그러나 手段과 方法을 가리지 않고 富者와 大統領이 되어 世上을 크게 한번 호령해 보겠다는 것은 欲望이 되어 自身과 世上을 亡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實相의 理致를 正確히 알면 欲望과 所望의 關係에서 헷갈리는 現狀에서 벗어날 수 있다. 具體的으로 돈을 버는 問題를 生覺해보자.오늘날 불자들은 돈을 버는 것을 欲望을 내는 더러운 일이라고 生覺하는 傾向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人間이 돈을 벌지 않고 어떻게 自身을 維持하며 人間의 道理를 다한단 말인가?
人間은 熱心히 일해야 한다. 이것이 태어난 理由이며 살아가는 證據이기도 하다. 自身과 家族을 위해 努力한 만큼 벌고 거짓없이 淸淨한 財産을 모으는 것은 自身의 삶을 安定되게 하고 幸福을 가져오며 마음의 맑음과 智慧를 가져온다. 이것이 所望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돈에 대한 지나친 慾心으로 거짓을 行하고 남을 사기쳐 財物을 모은다면 그 마음이 어둡고
不安하게 되어 苦痛과 不幸이 따르게 되고 業이 쌓여 恨과 地獄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똑같은 일이라도 좋은 뜻을 품고 바른 理致에 따라 努力할 때 人間의 뜻과 마음이 영글게 되며
離苦得樂을 이루어 最終的으로 人間完成의 境地인 解脫에 이르게 되며, 나쁜 뜻을 품고 理致에 어긋나게 過慾을 부리면 그 마음에 恨과 執着이 생겨 業이 두터워짐으로써 結局 地獄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똑같은 바램이나 執着이라도 어떻게 行하느냐에 따라 結果에 있어서
엄청난 差異가 나타나는 것이니 欲望을 所望으로 바꾸는 智慧가 必要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實相을 보느냐 못보느냐 하는 正法과 末法의 差異가 있다. 末法은 論理와 觀念에 빠져 事實 속에 있는 眞實과 理致를 보지 못하고 抽象的이고 形式的인 말만 하니
오히려 世上을 亡치는 結果를 招來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正法인 實相法은 事實을 基礎로 正確한 因果關係를 밝힘으로써
그동안 불교가 觀念에 빠져 混同했던 善業과 惡業, 所望과 欲望, 人間의 執着과 意志의 關係에 對해서도 正確한 길을 提示하게 된다.
그럼 오늘날 많은 불자들이 疑問을 갖고 있는 깨달음과 좋은 世上을 위해 애태우는 것에 對해 生覺해보자. 世上이 無常하고 苦이며 善業도 執着이라는 잘못된 觀念에 빠진 불자들은 깨닫고자 하는 意志와
世上을 위해 애태우는 것도 執着이며 業이 되는 것이 아닌가 生覺하는 傾向이 있다. 그러나 모든 執着을 버려야 한다는 觀念에 빠져
世上을 사랑하고 慈悲하며 깨닫고자 하는 좋은 마음마저 버려서는 안된다.
그 理由는 삶의 主體는 自己自身이니 意欲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世上을 사랑하고 人間完成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은 人間만이 가질 수 있는 高貴한 根本으로
이를 키워 人間完成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이 世上에는 人間完成의 境地인 解脫地境이 있으니 불제자들은 모두 열심히 노력해 깨달음에 이르라고 分明히 삶의 目的을 提示하신 바 있는 것이다.
그럼 왜 解脫을 위한 마음을 내고 世上을 救하겠다는 慈悲心을 내어야 하는가? 그 理由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完全한 法界 속에는 完全한 뜻과 秩序가 있어 人間에게 世上을 理致대로 보는 맑은 마음과 중생을 慈悲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주었고 그 마음을 熱心히 키우면 人間完成인 解脫에 이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本來 定해져있는 自然法인 것이며 부처님은 바로 이와 같이 宇宙 속에 定해진 實相의 法을 發見했던 것이다. 즉 부처님이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하신 말씀은 나는 이러한 自然의 實相을 있는 그대로 밝혀 설명했을 뿐이지 내가 만들어서 한 말은 한마디도 없다는 뜻인 것이다.(그러니 世上이 空이기에 한마디도 한적이 없다고 하는 主張은 事實과 다른 것이다. 초기경전에 많이 나오듯이 부처님이 平生 하신 말씀이 모두 건성으로 하신 말이라는 것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인 것이다. 오늘날
空佛敎는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을 當然한 事實로 主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자들을 解脫로 이끌기 위해 人間이 타고난 善根을 키우도록 實相을 밝히고
因果法을 傳했으며 八正道로 戒律을 지키고 功德을 行하여 마음을 닦으라 하셨던 것이다.
이 밝고 좋은 마음이 바로 善根이며 깨달음에 이르는 根本이니 거짓없고 貪慾없는 삶을 通해
마음이 맑아지고 實相과 因果法을 깨침으로써 智慧가 열리며 世上에 對한 慈悲와 功德의 實踐으로
그 良心과 勇氣가 커져 善根이 영그는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善根을 닦지 않고 가만히 앉아 空함만 깨쳐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기와를 갈아
거울을 만들고자 하는 것과 같으며 씨를 뿌리고 피땀흘려 농사짓지 않고 豊年이 오기만을 바라는 것과
같으니 그래서 因果法에 따라 차근히 善根을 닦는 八正道 以外에는 모두 外道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이치가 있어 선근을 잘 키우면 마음이 맑아져 해탈을 이루게 되는가?
첫째, 사람의 마음 속에는 熟生의 輪回를 通해 얻은 善根과 惡業이 混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因果의 理致에 따라 八正道로 맑음을 더하고 濁함을 除去하면 점차 그 善根이 淨化되어
完全한 意識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 理致는 마치 흙탕물을 정화하는 것과 같다.
흐린 흙탕물도 오랜 시간을 맑은 물을 집어 넣으면 점점 맑아져 나중에는 완전히 맑아진다.
따라서 人間의 마음 속에 內在된 濁한 業도 善業을 계속 쌓아나가면 점차 밝아져
나중에는 완전한 맑음을 얻어 解脫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 길이 바로 부처님이 밝힌 八正道인 것이다. 實相과 眞理를 배우고 부지런히 깨우쳐 世上을 위해 功德을 쌓으면 점차 좋은 善根을 얻게 되고 이를 根據로 다음 生에는 人間完成의 境地인 解脫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다음 生에 부처가 될 것이라고 手記를 준 理致인 것이다.
그러나 空觀佛敎에서는 이러한 嚴重한 因果法을 無視하고
業도 因果도 없고 善根도 修行도 必要없다하니 이보다 더 正法을 훼손하는 말이 없는 것이다.
두 번째로 人間의 根本價値인 善根 속에 모든 濁한 業을 불살라버리는 功德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雜多한 世上因緣 속에서 稀有한 眞理의 因緣을 만나 善根을 닦다 보면
나중에는 善根 自體의 强한 에너지가 생겨나 不退戰의 善果를 지니게 된다. 즉 世上을 밝게 하고 祝福하겠다는 좋은 마음으로 實相을 깨닫고 功德을 쌓게 되면
善根에 힘이 생겨 業을 그치고 지워버리는 能力을 갖게 되는 것이다.
즉 어두운 世上에서 어려운 環境을 克復하고 末法과 싸우다 보면 더욱 더 正法이 드러나 眞理化되고,
그들을 正法으로 引導하려는 慈悲와 안타까움에 眞理와 사랑의 불과 에너지가 생겨나
自身의 私事로운 業을 모두 태워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善根과 功德의 힘이니 마음에 業을 태워버리는 불이 일어나지 않으면 결코 마지막 남은 業과 渴愛를 지우기 힘들다. 따라서 解脫에 이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깨우침과 큰 功德을 쌓아 慈悲와 사랑, 良心과 勇氣, 眞實과 맑음의 善根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宇宙에서 가장 完全한 열매인 解脫地境에 이르기 위해서는 宇宙를 瞬環하는 모든 輪回種子
中에서 가장 크고 좋은 善根을 이루어야 한다. 부처님도 당신의 깨달음을 나의 善根이 크고
功德이 世上을 덮을 만하여 前生에 天上에 이르렀다가 비로소 이生에서 解脫에 이르렀다고 하셨으니
그대가 眞情 모든 삿됨을 버린 맑은 마음을 가지고 世上과 眞理를 위해 自身을 불사를 수 있는
큰 善根이 있다면 어찌 당장 모든 業을 태워버리고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인가?
지금 당장 그대가 깨닫지 못한 것은 世上을 위해 自身을 모두 바치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만큼 그대의 良心과 사랑과 眞實과 勇氣가 弱하기 때문이니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者는 과연 自身이 世上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勇氣가 있는지, 自身의 마음이 眞實하여 마음 속에 한점 어둠이 없는지, 마음이 習과 欲望에 얽매이지 않아 世上을 理致대로 볼 수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마음이 타야 業이 사라진다고 하니 執着으로 애를 끓이는 境偶와
慈悲心으로 애를 태우는 境偶를 生覺해 보아야 한다.
사람이 貪慾과 執着으로 속이 부글 부글 끓이게 되면
속이 傷하고 몸과 마음이 아프고 慾心과 執着으로 業이 더욱 두터워진다.
그러나 世上에 대한 慈悲와 眞理에 對한 안타까움으로 거짓과 부딪혀 애를 태우게 되면
마음이 아련히 풀리며 쌓여있는 業이 眞理와 사랑의 불에 타버려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欲望과 所望의 差異인 것이다.
이런 理致가 있기에 모든 聖者들은 世上을 위해 自身을 바쳤던 것이며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나서 80평생을 맨발로 印度全域을 다니며 苦生스런 傳法을 했던 것이며
죽어가는 瞬間에도 法을 들으러 온 중생을 위해 가르침을 펴신 것이다.
우리는 부처님 法이라면 딱딱한 敎理만 生覺하는 傾向이 있는데 그 裏面에 있는 부처님의 중생에 對한
끝없는 慈悲心과 거짓없는 誠實함, 꺽이지 않는 勇氣와 같은 德目도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에 대한 意欲도 부처님처럼 모든 중생을 救하겠다는 慈悲心에서 뜻을 내면 業이 타서
人間完成으로 나아가지만 全知全能한 超能力을 이루어 世上에 이름을 날리고
모든 願하는 것을 다 얻겠다는 貪慾을 내면 그것은 業이 되어 結局 鬼神의 밥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모든 業과 貪瞋痴를 克復하여 한점 흐림없는 完全한 맑음을 이루는 것인데
超能力과 名譽와 權力과 所有를 貪하게 되면 마음이 淨化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거워지고
渾濁해지기 때문이며 그 欲望을 노려 큰 마구니가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똑같은 現狀이라도 眞實을 아느냐에 따라 이러한 엄청난 差異가 벌어지는 것이니 世上을 위한 所望을 執着이며 잘못된 뜻이며 業이라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출처 : 진실의 근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