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강의 초록
1.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것이 축복이다
(달마의 二入四行論)
(양무제의 질문)
“나는 수많은 절을 지었고 수 천명의 學僧들을 후원하고 있고,고타마 붓다의 思想을 연구하기 위해 큰 大學을 세웠소.
또한 나는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 앞에 내 王國과 전 財産을 내놓았소.
이 다음에 나는 어떤 補償을 받게 될 것 같소.”
(달마대사의 답변)
“그대가 自身의 內面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限
불교도이든 불교도가 아니든 아무도 그대를 도와 줄(보상 해 줄) 수 없다.
고타마 붓다의 길에 補償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補償을 바라는 그 마음이 곧 貪慾이다. 그의 가르침은 欲望을 버리는 것이니,
만일 그대가 수많은 절을 짓고 수 천명의 승려들을 먹여 살리는 것과 같은 功德을 行하면서
마음속에 欲望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곧 地獄으로 떨어질 준비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만일 이 모든 것을 즐거움으로 行하고 그 즐거움을 나라 전체와 함께 나누며 보상을 바라는
어떠한 마음도 갖지 않는다면 바로 그 行爲 自體가 이미 큰 補償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완전히 과녁에서 빗나간 것이다.”
“그대가 할 일은 마음을 잡아내는 일이다. 눈을 감고 內面으로 들어가 그것을 찾으라.
마음을 잡아내는 瞬間 나에게 ‘여기 있다’라고 말하라.
그 다음은 내 지팡이가 알아서 할 것이다.”
황제는 마음을 찾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생애 처음으로 그는 마음을 찾을 수 없었다.
하나의 작은 戰略이 거기에 있었다.
마음이란 그대가 찾지 않을 때만 存在한다.
그대가 깨어있지 못해서 그것을 찾지 않기 때문에 마음은 存在한다.
그대가 그것을 찾으려는 瞬間,
그대는 깨어 있게되고 그 깨어 있음이 마음을 完全히 消滅시켜 버린다.
달마가 황제를 흔들어 깨워서 물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그래 그대의 마음을 찾았는가?”
양무제가 말했다.
“내 마음속으로부터 思念들은 사라졌으며, 당신이 말한 內面의 목소리를 나는 듣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모든 行爲가 그 自體로 하나의 補償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事實을 알았습니다.
누가 나에게 補償을 해주겠습니까? 또 누가 나에게 罰을 내리겠습니까?
나의 行爲가 그 自體로 罰이고 補償인 것입니다. 내가 나의 運命의 主人입니다.”
『道에 이르는 길』의 해설
그대가 바로 眞理(道)이며 그대는 아무 곳에도 갈 필요가 없다.
그대는 어디를 向해 가는 行爲를 당장 그만두라.
그리하여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라. 眞理는 바로 거기에 있다.
核心은 하나의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길도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어느 곳으로도 向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곳에 머무는 것이다.
지금 바로 여기 이 瞬間 속에, 바로 그대 안에 머무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길을 걷든지 그대는 길을 잃고 만다.
어떤 실천도 필요 없다. 그대는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있다.
『妄想을 등지고 實際로 돌아와 壁을 마주하고 앉은 사람은 나도 없고 남도 없음(無主客)을 깨닫는다.
그에게는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다.
그런 사람은 경전을 對하고도 흔들림이 없으며, 無言中에 存在와 完全한 '하나'를 이룬다.』의 해설
‘壁을 마주하고 앉은 사람’이란 思念을 버리기 시작한 사람이다.
마음을 떨쳐 버리기 시작한 사람이다.
그의 마음 속 畵面은 이제 하나의 壁과 같이 텅~텅 비어 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無動搖) 純粹한 고요뿐이다.
이제 그는 自己라는 것이 存在하지 않음을 理解한다.
그의 內面에 에고(自我意識)가 없는 것이다.
‘나’라고 말할 만한 存在가 없는 것이다. 存在만이 있을 뿐 '나'는 없다.
중생과 부처는 인격이 다르고 외모가 다를 뿐 그들의 主體를 이루는 內面 自體는 같은 것이다.
罪人과 聖者의 本性이 똑같다. 罪人은 不必要한 罪意識으로 苦痛을 받고 있고,
聖者는 ‘나는 너희들보다 거룩하다’는 不必要한 에고로 苦痛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無我라는 점에서, 하나의 純粹한 무(無)라는 점에서, 基本的으로 같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아무런 人爲的인 努力도 하지 않는다.
그러한 狀態를 우리는 이입(理入), 卽 存在로 도(道)에 들어갔다고 부른다.』의 해설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는 말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뜻이다.
自身을 發見하기 위해서 그대는 움직임 없는 沈默 속에 머물러야 한다.
거기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 또한 아무런 人爲的인 努力도 없다.
努力이 움직임을 낳기 때문이다.
그대는 마치 그대가 없는 것처럼 움직이지도 말고 人爲的인 努力도 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沈默 속에 머물러야 한다. 그때 그대는 存在의 心臟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다르마(Dharma/法)는 事物의 本性을 意味한다.
예를 들면 뜨거운 것은 불의 다르마이다. 차가운 것은 얼음의 다르마, 얼음의 本性이다.
그렇다면 人間의 本性은 무엇인가? 그것은 無我이며 沈默이며 慈悲心이 용솟음치는 것이다.
모든 求하는 行爲는 그 對相이 무엇이든 그대를 本質에서 벗어나게 한다.
아무 것도 求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달마의 가르침의 核心이다.
아무 데도 가지 말라. 그대의 에너지를 全部 內面으로 쏟아 부으라.
外部로 向한 꽃잎을 모두 닫고 그 안에 있으라. 그러면 그대는 다르마가 무엇인지,
그대의 本性이 어떤 것인지 經驗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것을 實踐하라 마치 그대가 아무도 아닌 것처럼 行動하라.
그때 드넓은 慈悲심을 갖고 行動하라.
그때 그대의 삶 全切가 하나의 現存이 되게 하라.
그러나 그대 안에 ‘나’ 라는 것은 남아 있지 않게 하라.
『因緣이 다하면 그것은 또다시 無로 돌아간다. 成功과 失敗가 모두
因緣을 따라 오는 것임을 안다면 더 이상 마음이 들뜨거나 落心하는 일이 없다.』의 해설
그대는 일(事)의 성공이나 실패로 인하여 營響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것들 성공이나 실패는 단지 하나의 꿈(夢)일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왔다가 사라지는 물거품이다.
그 속에서 그대는 그대 自身을 지켜보는 者(觀察者)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모든 現象界는 空虛하다. 그것들은 추구할 價値가 전혀 없는 것들이며, 福과 禍는 永遠히 함께 한다.』
의 해설
그대 밖(外部)에서 일어나는 삶의 일들은 무엇이든 꿈(夢)처럼 空虛한 것이다.
그 삶의 일들과 꿈은 材料가 같다.
‘智慧로운 사람은 깨어 있기 때문에’ 人生 全切를 하나의 긴 꿈(夢)의 連續劇으로 본다.
어떤 때는 기분 좋은 꿈이고 어떤 때는 기분 나쁜 꿈이다.
어떤 때는 달콤한 꿈이고 어떤 때는 악몽도 꾼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꿈이다.
깨달은 사람은 잠을 자면서도 꿈을 꾸지 않으며
깨어 있는 동안에는 바깥 世界의 꿈(夢)으로 因하여 妄想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 모든 꿈이나 妄想들은 추구할 아무런 價値가 없는 것이다.
『妄想을 떨쳐 버리기 위하여 여섯 가지의 德을 行하고도 그들은 전혀 行한 것이 없는 것이다.』의 해설
만일 이 世上이 하나의 꿈의 世界라면
그대가 도둑이건 위대한 자비심을 가진 사람이건 아무런 差異가 없다.
꿈속에서 그대는 도둑도 되고 자선가도 될 수 있지만 꿈을 깨고 나면 무슨 差異가 있겠는가?
아니면 그 꿈속에서 自身이 도둑이었다고 부끄럽게 生覺하겠는가?
둘 다 한낱 꿈(夢)이고 물거품(泡)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아무런 意味가 없다.
꿈을 깨는 것만이 意味가 있다.
그대가 무엇을 行하든지 實際로는 아무 것도 行한 것이 없다는 이 事實을 아는 것,
이것을 理解하는 것이 바로 다르마(本性)를 따라 사는 것이다.
이 事實을 理解한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 超然하다.
그는 幻想을 그치며 어떤 것도 求하지 않는다.
經에 이르기를
“求하는 것이 곧 苦痛이다. 아무 것도 求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祝福이다” 라고 했다.
그대가 아무 것도 求하지 않을 때 그대는 이미 도(道)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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