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뿌리 역사를 찾아서!!!

[스크랩] 120년전 덕수궁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나?

장백산-1 2013. 5. 10. 16:05

120년전 덕수궁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나?

 

덕수궁의 역사

브리태니커백과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5번지에 자리한 조선시대 궁궐.

사적 제124호. 조선의 5대 궁궐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것으로 조선말 고종이 살던 곳이다. 궁궐의 자리는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직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행궁(行宮)이 되었다.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뒤 1611년 10월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615년(광해군 7)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빈 궁궐이 되었으며 1618년 인목대비가 이곳에 유폐되면서 서궁(西宮)으로 불렸다. 인조는 이곳 별당에서 즉위했으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는 바람에 다시 빈 궁궐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왕태후와 왕태자비가 이곳으로 옮겨와 생활했으며 1897년 고종이 러시아 영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궁궐건물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그해에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시는 선원전(璿源殿), 침전인 함령전(咸寧殿), 보문각(寶文閣) 등이 지어졌으며 9월 17일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하고 소공동의 원구단(圜丘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정궁(正宮)이 되었다. 1900년(광무 4) 담장공사가 완공되었고 정문인 인화문(仁化門) 및 돈례문(敦禮門)·회극문(會極門)·영성문(永成門) 등의 전문(殿門)이 완성되었다. 그해에 선원전이 불탔다. 1902년 정전인 중화전(中和殿)과 관명전(觀明殿) 등이 새로이 건립되었으며 1904년 대규모 화재로 많은 건물이 불타버렸으나 즉조당(卽祚堂)·석어당(昔御堂)·함령전 등이 중건되었다. 이때 정문의 이름을 대안문(大安門)이라 했다.

 1905년 중화전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되었으며, 이때 대안문도 수리하여 대한문 (大漢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이곳에 살면서 현재의 이름인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순종이 이곳의 즉조당에서 즉위한 뒤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고종의 거처가 되었다. 1910년 근대건물인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되었으며, 1919년 고종이 함령전에서 죽었다. 1921년 중화전에 봉안했던 고종의 영정을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아무리 궁궐이 작아도, 황족인 성종황제의 형이 지내던 궁궐이었다. 그리고, 선조때 선조황제의 행궁성이었고  광해군때(1611)는 광해황제가 즉위한 조선의 떳떳한 황궁성이었다. 그리고 이름도 경운궁(성)으로 변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618년때는 조선의 서궁으로 했고, 인목대비가 유폐되어 생활하던 황궁이었다.

 

한편 인조황제는 이곳 별당에서 즉위를 하였다고 한다. 1896년에는 황태후와 황태자비가 이곳에서 생활하였으며, 1897년엔 고종황제가 거쳐를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부속궁들이 중축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덕수궁성은 역대 선조, 광해군, 인조, 고종에 이르기 까지 대대로 조선의 황성으로 존재해 왔었던 것이다. 그런데 120년전 조선의 황성이 있던 한반도 서울의 덕수궁성자리에는 조그마한 어떠한 궁성도 보이질 않고, 채소밭, 빈땅 일색이다. 그렇다면 대조선의 황제가 거주했던 흔적과 행궁과 거기에 따른 수많은 신료들이 거주했던 전각들은 모두 어디에 간 것일까?

 

이것은 120년전 아무것도 없는 서울의 빈 허허벌판에 덕수궁을 새로 신축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원래 있던 덕수궁은 머나먼 다른 곳에 지어졌던 것이다. 지금은 알 수 없는 곳에서..한반도 서울 덕수궁자리엔 120년이전  아무것도 없었던 빈땅이었다는 증거다.

 

- 2013.5.5. 러브 선의 논평

분노2

출처 : 살며 사랑하며...
글쓴이 : 러브 선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