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스크랩] 현재, 지금 여기에 머물기

장백산-1 2013. 5. 15. 11:33

 

 

명상수행 에세이(12)


현재, 지금 여기에 머물기

“여기에 단지 몸이 있을 뿐, 다른 무엇도 없다.”
...이런 통찰은 깊은 고요함과 마음의 평정에서 얻어진 값진 보석이다.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움이 밀려올 때는 우리는 외적인 대상을 찾는다. 의지해야할 대상이 초월적이고 신처럼 강력한 불멸의 대상이면 더욱 좋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이라, 공허하지 않을까. 마음의 불안이 만들어낸 허구의 가공물이다.

단지 몸만이 존재하고 다른 일체는 없다는 말이다. 몸만이 존재한다는 경험, 여기에는 자아나 신과 같은 철학적인 다른 첨가물이 없다. 나는 단지 걷고, 그리고 음식을 먹는 그것만이 존재한다. 온전하게 그 경험을 경험한다. 그것의 변화를 존재하는 그대로 수용하면서...다음의 『염처경』은 이점을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안으로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 관찰하여 머물고, 밖으로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 관찰하여 머물고, 안팎으로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 관찰하여 머문다.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이때 또한 비구는 ‘이것은 몸이다’라고 하는 알아차림의 확립이 여기에 있다. 이러는 한에서 오직 지속적인 알아차림이 있고, 순수한 지혜가 있다. 그럼으로써, 비구는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이 머물고, 어떤 세상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 관찰하여 머문다.”

위의 구절을 우리는 후렴구라 한다. 『염처경』의 후렴구는 총13번 설해진다. 『염처경』에서 몸, 느낌, 마음, 현상에 대한 각각 하나의 명상주제가 끝날 때마다 후렴구가 있다. 이 후렴구에서 좀 더 설명이 필요한 언구가 있다. 여기서 <몸에 대해서 몸>을 관찰하라고 반복적으로 말한 부분이다. 몸에서 몸, 이것은 정밀하게 삼빠잔나, 곧 분명한 앎을 강조함이요, 다른 하나는 몸에 대한 상세하게 관찰하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몸이란 전체적인 관점도 있지만, 몸의 움직임, 몸의 요소, 몸의 구성분자들에 대해서 ‘몸에서 몸으로’ 상세하게 관찰하라는 의미이다. 그렇다 보면 알아차림의 현존이 확립될 가능성이 높고, 알아차림의 현존은 분명한 앎으로 이끌고, 분명한 앎은 다시 깊은 위빠사나를 가능하게 하고, 위빠사나는 다시 곧 열반과 깨달음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다음의 논점은 <안팎으로 관찰하라>는 것이다. 이점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소마(Soma) 테라에 의하면 ‘밖으로’ 관찰하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호흡을 관찰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고엔카(Goenka)는 텅 빈 장소나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할 때를 전제한다면 다른 사람의 호흡을 관찰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별로 중요한 의미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몸을 밖으로 관찰한다는 의미를 신체의 표면으로 해석한다. 이점은 결과적으로 그가 신체의 표면(느낌)을 순서대로 관찰하는 수행방식, 바디스캔을 채택한 근거가 되었다.

이런 견해들은 모두 나름대로 유용한 해석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 해석은 구체적인 실천에 서면 서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 고엔카의 경우는 신체의 표면을 따라서 함께 느낌을 관찰하는 바디스캔으로 발전되었다. 이것은 큰 장점이 있다. 반면에 소마테라의 경우는 타인의 호흡이나 느낌을 관찰하게 함으로서,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왜냐하면 명상은 혼자서 하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관점을 깨뜨려주기 때문이다. 명상은 상담과 연결시켜서 진행하면 더욱 효과적인 방법들을 개발할 수가 있다는 아이디어를 현장의 전문가들에게 제공한다.

세 번째는 <여기에 몸이 있다>는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이것은 곧 몸의 현전, 드러남이다. 이는 알아차림이 의도적인 행위이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수동적인 관점이다. 몸-호흡의 드러남은 그것을 관찰하고자 하는 의도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호흡이 의식의 표면에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 알아차림은 관찰되는 대상이 의식의 표면에 드러남이 된다. 이것은 곧바로 분명한 앎과 순수한 지혜에 나아가게 한다. 이곳에는 단지 호흡만이 존재하고, 몸만이 존재한다. 이곳에는 판단하고 분별하는 자아가 없다. 이곳에는 초월적인 창조주가 없다. 자아 없으니, 이곳에는 고통이 없다. 호흡의 ‘길고 짧음’, ‘안과 밖’,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하는 일은 바로 몸을 존재하는 그대로 자각하는 일이다. 이때의 몸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 놓인, ‘일어남’이고 ‘사라짐’이다. 이와 같이 알아차림이 확립되는 한에서 우리는 몸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탈되고, 그러는 한에서 우리는 지혜를 증득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삼빠잔나와 지혜(반야)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들은 모두 어원이 지혜를 의미하는 panna이다. 삼빠잔나는 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으로서 모양과 형상이 있는 분별이라면, 반야의 지혜는 이런 모양과 형상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철저하게 자각한 분별없는 지혜로 구별할 수가 있다. 대상을 관조하는 위빠사나는 알아차림의 사띠와 분명한 앎의 삼빠잔나에 기초하여 수행되고, 그 결과로서 분별없는 지혜(반야)를 얻게 된다고 정리할 수가 있다.
출처 : 명상상담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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