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스크랩] 느낌이란

장백산-1 2013. 5. 15. 11:18

 

인경스님의 명상수행 에세이(14)

느낌이란

우리는 일상에서 느낌이 좋다 혹은 나쁘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느낌은 막연한 어떤 감이다.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을 말한다. 실제로 느낌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무의식처럼, 분명하게 자각하기가 어려운 만큼 인간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더 많은 영향력을 미친다. 우리는 의식하기도 전에 벌써 달콤한 느낌에는 저절로 끌려가고, 불쾌함에 대해서는 쉽게 혐오감을 표현한다. 느낌과 행동 사이에는 간격이 없는 듯 순식간에 자동인형처럼 반응을 한다.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데 느낌에 대한 자각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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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으로 좋은 느낌과 괴로운 느낌이란 있는가? 일상에서 우리는 이런 느낌의 존재를 알고 있다. 예를 들면 엄마의 품을 생각하여 보자. 이곳은 따뜻하고 편안하다. 우리의 고향과 같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렇게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양가적인 느낌을 갖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은 엄마가 보살펴주지 않았기에 엄마의 사랑을 끊임없이 갈망한다. 반대로 너무나 많은 관심으로 숨이 막히게 하는 부모를 둔 사람은 틀림없이 자유와 독립을 향하여 도망갈 것이다.

느낌에는 절대적으로 좋은 느낌이나, 괴로운 정해진 느낌은 결코 없다. 느낌은 조건에 따라서 달라진다. 행복도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고, 괴로움도 항상 괴로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괴로움이 없는 영원한 유토피아를 꿈꾼다. 감미로운 사랑도 멀지 않아서 지나간다. 현실이 힘들수록 더더욱 달콤한 이상을 만들어내고 집착을 한다. 이런 느낌들은 모두 조건을 따라서 발생된다. 이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항상 좋은 조건을 만들려고 한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그러나 이것도 오래가지 않는다. 조건 자체는 항상 변화하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이다.

불교 심리학에서 ‘느낌’에 해당되는 용어는 팔리어로 웨다나(Vedanā)이다. 한역에서는 수(受)로 번역하였다. 수(受)는 자극 따위를 ‘입다’거나 혹은 ‘받다’고 하는 수동적 의미로 사용된다. 마치 밖으로부터 감각기관에 주어지는 경험으로 인식된다. 영어에서는 감각(sensation)이나 느낌(feeling)으로 번역하여 사용한다. 감각은 육체적인 현상과 밀접하게 관련되고, 느낌은 정신적인 측면이 강조된 번역어이다. 실제로 느낌은 몸과 마음의 영역에 걸쳐져 있다. 느낌은 육체와 정신을 매개하는 징검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화가 났을 때 신체의 변화를 관찰하여 보면, 호흡과 맥박이 빨라졌고, 안면 근육은 긴장되어 있다. 성남의 현상은 분명하게 마음의 작용이다. 이 마음현상은 흥분이라는 육체적인 현상을 동반한다. 다른 예를 들어보면 감기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기침, 두통, 콧물, 뜨거운 열기와 같은 신체적인 현상들로 경험된다. 그것은 피하고 싶은 불편한 느낌들이다. 마음현상은 반드시 몸으로 표현된다. 마음현상들은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신체현상은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다. 몸의 반응을 통해서 우리는 마음현상을 이해하고 통찰할 수 있다. 마치 나뭇가지가 흔들림을 보면서 그곳에 바람의 존재를 인식하듯이 말이다.

그러면 느낌은 어떤 조건에 의해서 발생될까? 불교경전에서는 신체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의식이 외적인 대상에 접촉하였을 때 발생된다고 말한다. 이것을 접촉(phassa, 觸)이라고 한다. 접촉을 구성하는 요소는 <감각(根), 대상(境), 의식(識)>이다. 이것을 한역에서는 삼사화합촉(三事和合觸)으로 번역하였다. 일상에서 느낌이 발생되는 상황이란 눈이나 귀와 같은 감각, 색깔과 소리와 같은 대상, 의식 세 가지를 조건으로 화합된 경우이다. 이들의 화합하여 느낌은 발생된다. 꽃을 보면 기분이 좋은 느낌이 일어나는 경우를 보자. 꽃의 색깔은 눈의 대상이고, 향기는 코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 의식이 개입되면, 곧바로 이곳에서 접촉이 일어나고 느낌이 발생된다.

이때 느낌의 종류는 크게 세 종류로 구별한다. 하나는 즐거운 느낌이고, 다른 하나는 불편한 느낌이며, 마지막으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적인 느낌이다. 즐겁고 달콤한 느낌에 대해서는 애착과 집착을 일으키고, 불쾌한 느낌에 대해서는 혐오감과 더불어서 회피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무덤덤한 느낌에 대해서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는 경험하기도 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동일한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즐거움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불편을 느끼는 것일까?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올까? 이런 현상을 초기불교보다는 대승의 유식불교에서 더욱 관심을 가지고 설명한다. 가장 일반적인 설명은 외적인 대상의 자극이 가지는 속성이 다르기 때문에, 대상에 따라서 서로 다른 느낌을 만든다는 이론이다. 꽃의 형태에 따라서 혹은 사람에 따라서 우리는 다른 느낌을 경험하는 경우를 보면, 이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같은 자극에 대해서도 다른 느낌을 경험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이 경우는 분명하게 외적 대상보다는 내적인 마음현상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왜 하필 그 대상이 마음에 그런 종류의 느낌을 만들어낼까 하는 문제는 대상보다는 극히 개인적인 마음현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외적인 대상보다는 내적인 심층의 잠재의식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유식불교에서는 느낌을 발생시키는 세 가지 요소 가운데, 의식을 잠재의식(제8식 종자)으로 이해한다. 대상 곧 엄마에 대해서 어떨 때는 화가 나고, 어떨 때는 미안감을 경험하는 것은 과거의 경험내용에 의해서 의식이 물들여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마치 파랑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온통 세상이 파랗게 보이는 것과 같다. 잠재된 의식이 대상을 접촉하는 순간에 활성화되면서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입장에 서면 우리는 대상을 순수하게 경험하지 못하고, 항상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편집하게 된다. 일상에서 자주 하는 말에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이 여기에 딱 적용된다. 유식불교에서는 이것을 ‘마음이 마음을 본다’고 말한다.

대상은 바로 마음의 창조물이다. 현재의 상황은 신과 같은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있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부과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실존적 상황은 스스로 선택하여 만들어진 자신이 창조한 세계이다. 대상에서 느끼는 감정은 대상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은 스스로 만들어낸 감정이다. 우리는 일체가 바로 마음이라는 사실을 자꾸 망각한다. 선택은 스스로 만들어낸 현실에 대해서 책임을 동반한다.
출처 : 명상상담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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