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無我의 修行

장백산-1 2013. 6. 5. 01:32

 

무아의 수행

 

무아(無我)의 수행(修行)

 

무아(無我)인 理由?

 

金剛經에 '통달무아법자 진시보살(通達無我法者 眞是菩薩)이라,

無我法에 通達한 사람이 眞實로 菩薩이라' 하였습니다.

내가 없다 하는 무아법(無我法)에 通達하여야만 참다운 菩薩이라는 뜻입니다.
저번에도 말씀했습니다마는, 우리 凡夫와 聖者와의 差異도 亦是 내가 있다는 것을

여의는가  미처 못 여의는가에 있습니다.
'나' 라는 아상(我相)을 미처 못 여읜다면 凡夫이고 '나' 라는 아(我)가 멸진(滅盡)되어 버려서,

그 번뇌(煩惱)가 다 끊어져버려서 그야말로 참 무아(無我)가 되고 대아(大我)가 되어야 비로소

聖者인 셈인지요.


또, 정도(正道)와 외도(外道)의 差異도 역시,

正道는 마땅히 그 구경지(究竟地)가 반드시 '내가 없다' 하는 無我를 증득(證得)해야만

정도(正道)의 標準이고, 그에 反해서 외도(外道)는 어디까지나 '나'를 못 여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떠한 신통자재(神通自在)로 재주를 많이 부린다 하더라도

'나'를 못 여의는 것은 외도(外道)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工夫할 때에 "내가 없다 無我다" 이런 말은 하기는 쉽습니다마는

'分明히 내가 存在하는데 어째서 없는가' 이렇게 生覺할 때는 참 답답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화두(話頭)도 들고 염불(念佛)도 해서 工夫를 많이 하면은,

그때는 '나' 라는 것이 그냥 문득 끊어집니다.


하지만, 우리 업장(業障)이 무거우면 '나'라는 것이 좀처럼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런 때는 우선 방편적(方便的)으로 '내가 어째서 없는가' 하는 原因

좀 캐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데에서, 부처님 교리(敎理)의 참뜻이 있는 것입니다.

한번 듣고서, 그냥 얼른 느껴가지고서 깨달아 버리면은 問題가 안되겠습니다마는,

業障이 가리어 버리면 통달보리심(通達菩提心)을 못합니다.

보리심(菩提心)자리,자성(自性)자리를 미처 못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때에는 우리가 方便으로 그때그때 여러 가지 한계(限界)를 제시(提示)해 가면서

해설(解說)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 意味에서 이제 제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무아(無我)'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진아(眞我)입니다. '참나' 입니다.

또 다른말로 하면 대아(大我)라, '큰 나' 입니다.

그리고 自己라 하는 범부성(凡夫性)소아(小我) 卽, 망아(妄我)입니다.


우리 불교에서 '나'를 말할 때는 보통 3次元으로 말합니다.


그 한가지가 망아(妄我)입니다.

妄我란 우리 衆生들이 미처 煩惱를 못끊은 卽 말하자면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痴心)에 얽매인 '結縛된 나' 요 '妄靈된 나'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妄我는 本來 없습니다.
저번에도 말씀했듯이, 妄我는 마치 어두컴컴할 때에 새끼 토막을 뱀으로 보는 그런 見解,

事實은 있지 않는데 妄想으로 錯覺해서 있다고 生覺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났다 또는 그대가 이쁘다 밉다 이런 것은 妄我입니다. 事實은 이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어두울 때에 잘못 봐서 새끼 토막을 뱀으로 보는 그와 같은 見解, 이것이 妄我입니다.

 

그러나 또한 전혀 없지가 않습니다. 因緣 따라서 이렇게 存在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因緣 따라서 이루어진 存在를 가리켜서 가아(假我)라고 합니다.

假我 잠시간 거짓으로 存在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가아(假我)의 참다운 本質이 무엇인가?

假我의 本바탕이 이제 무아(無我) 이고, 진아(眞我) 또는 대아(大我)입니다.


우리가 目的으로 하는 것은 망아(妄我)를, 妄靈된 나,

잘못본 '나'를 떠나는 同時에 분명히 지금은 있는 가아(假我)의 本質을 찾는 것이요,

이것이 우리가 工夫하는 성불(成佛)의 工夫입니다.

 

어째서 내가 없다고 하는가?


이런 問題는 重要한 問題니까, 좀 군더더기 같지마는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무아(無我), 진아(眞我), 대아(大我)가 假我의 本質이고,

인신(人身)에 있어서 이를 있다고 집착(執着)함을 인아(人我)라하고,

제법(諸法)에 있어서 이것이 있다고 집착(執着)함을 법아(法我)라 함.

그런데 인신(人身)은 오온(五蘊)의 가화합(假和合)이므로 상일(常一)의 아체(我體)가 무(無)하며 

일체법(一切法)은 모두가 인연생(因緣生)이므로 상일(常一)의 아성(我性)이 무(無)함.


工夫해보면 아시겠지마는, '나'라는 問題가 굉장히 重要합니다.

貪心이나 嗔心이나 痴心이나 모두가 '나' 때문에 일어나지 않습니까.

'나' 라는 問題만 解決되면 貪嗔痴 그런 것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煩惱의 모든 것 卽, 根本煩惱, 首煩惱가 다 '나'를 基準해서 일어납니다.

따라서 '내가 없다' 하는 것을 우리가 明白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성자(聖者)가 못되는 限에는 제아무리 말로는 다 해도, 역시 '나'를 잘 못 떠납니다.

따라서, 무아(無我) 問題는 굉장히 重要한 문제입니다.

다음에 말씀드리는 程度는 척척 외워서, '나' 라는 망상(妄想)이 나올 때는 그냥,

이런 法門으로 代置를 해버려야 합니다.


어째서 내가 없는고?


'사람 몸(人身)에 있어서 이를 있다고 집착(執着)함을 인아(人我)라 하고,

또 제법(諸法)에 있어서 이것이 있다고 執着함을 법아(法我)라 합니다

' 諸法'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일체만법(一切萬法)을 다 말하는 것입니다.

山이나 내(川)나 또는 무슨 주의(主義)나, 좋다 궂다 하는 것이나, 유정(有情), 무정(無情)

一切 萬有를 가리켜서 제법(諸法)이라 합니다.


그런데 '사람 몸(人身)은 오온(五蘊)의 가화합(假和合)이므로 상일(常一)의 아체(我體)가 없습니다. '五蘊이라는 것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말합니다.

사람 몸은 색(色)에 해당하고  사람 마음은 수, 상, 행, 식(受想行識)에 해당합니다.

곧 감수(感受)하는 作用, 또는 想像하는 작용,  意欲 작용, 또는 分別하는 작용입니다.

사람 몸은 이런 五蘊이 잠시간 가짜로 合해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恒常하는 하나의 '나'라는 그런 몸이 없다는 말입니다.


또, '일체법(一切法)은 모두가 인연생(因緣生)이므로 상일(常一)의 아성(我性)이 무(無)라' 합니다.
一切 諸法은 모두가 因緣生으로서 어떤 法이나 單獨으로 이루어진 法은 한가지도 없습니다.

無數한 因緣, 因과 緣이 合해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도 역시, 恒常 하나인 아(我)의 性稟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까, 제가 허두(虛頭)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통달무아법자 진시보살(通達無我法者 眞是菩薩)이라,
참다운 道人이나 菩薩은 내가 없다는 무아법(無我法) 卽,

내 몸도 참다운 것이 아니고 一切 萬法도 恒時 그대로 있는것이 아니라는 法에 通達하면,

그때는 道人이요 菩薩입니다. 그만치 이 問題는 重要합니다.


어째서 내 몸이 없는가?


우리는 이 問題를 더 깊이 生覺해 봅시다.

제가 누누히 말씀 했습니다마는 내 몸이라 하는 것은 각 원소(元素)가 잠시간 和合해 있는 것입니다. 過去에 우리가 지은 업력(業力)을, 業力은 내나야 우리 마음에 붙은 여러 가지 우리 행위(行爲)나 훈습(熏習)된 것이 業力 아닙니까, 이런 業力을 핵(核)으로 해가지고 無數한 因緣이 모여서 各 元素가 되고  또 이렇게 組織된 細胞가 몸이라는 말입니다.


불교 말로 하면 지(地), 수(水), 화(火), 풍(風) 卽, 땅氣運, 물기운, 불기운, 바람기운이요,

物理學的인 술어로 말하면 炭素, 水素, 酸素, 窒素같은 元素가 되겠지요.

이런 것이 우리 업(業)이라 하는 에너지를 核으로 해서 이렇게 모여 構成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構成되어진 몸은 잠시도 상일(常一)의, 이른바 恒時 그대로 있는 몸이 아닙니다.

瞬間瞬間 變化되어 갑니다. 細胞라 하는 것은 어느 瞬間도 신진대사(新陳代謝)를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일초(一秒) 前의 자기 몸과, 일초 後의 자기 몸이 똑같지가 않은 것입니다.

단지, 우리 중생이 느끼지 못할 뿐이지 結局은 어떤 것이나 存在하는 것은 瞬間瞬間 變化되어 갑니다. 따라서, '恒常 있는 어느 空間 속에 恒常 存在하는 '나' 라는 것은 結局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것을 못 보니까 있다고 固執하는 것 입니다.

내 몸은 그와같이 地, 水, 火, 風 사대(四大)의 各 元素가 잠시간 業 따라서 이렇게 이루어져 있지마는, 그것도 역시 恒時 있는것이 아니라, 어느 한瞬間도 그대로 있지가 않은것 입니다.

恒常 하나로 있는 내 몸은 없다는 말입니다.


가사, 하나의 꽃이 피었다고 하면, 그 꽃이 하나의 原因 때문에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空氣나 水分이나 또는 太陽光線이나 거름이나, 그러한 直接 原因과 또 間接으로 하늘의 반짝이는 별이나 여러 가지 天地 宇宙의 모두가 다, 直接 間接으로 다 包含되어서 하나의 꽃이 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연생(因緣生)이라 할 때에, 말은 쉽습니다마는 因緣이란 말은 굉장히 意味 심중(深重)한 말인 것입니다. 인(因)과 연(緣)을 찾다보면 天地宇宙를 다 알아야만 인연(因緣)을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天地宇宙를 모르면 因緣을 모르는 셈입니다.

우리 중생들이나 지금 현대 과학이나 물리학처럼 인연(因緣) 가운데 몇가지 重要한 因緣만 추려서 "무엇이 原因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수없는 因緣들이 잠시간 和合해서 이제 이런 꽃이 피었고 그것도 역시 瞬間瞬間 또 變質되어 갑니다. 恒時 그대로 머물러 있는 꽃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흘러가는 물 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고체(固體)인 바위도 역시, 우리 중생이보면,

固體로서 이와 같이 딱 둥그런 바위가 있다고 生覺할려는지 모르지마는 그것은 중생의

制限된 見解인 것이고, 바위를 構成한 各 원소(元素)를 보고 원자(原子)를 본다고 할 때에는

瞬間瞬間 變質되어가는 무상(無常)인 것입니다.

항상(恒常)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중생은 구조적(構造的)인 겉만 보니까 內容을 모릅니다.

內容을 보면 다 그때그때 變化하고 마는데 말입니다.

아무리 내가 없다해도 말은 쉽지마는 구성적(構成的) 內容을 모르면 執着을 끊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業障이 무거워서 말입니다.

 

우리는 나(我)라는 것을 이와 같이 아주 哲學的으로 科學的으로 分析해서 본다고 할 때는

차근차근 '나'에 對한 執着이 좀 끊어지겠지요.
'사람 몸에 있어서 이를 있다고 執着함을 인아(人我)라 하고

또는 一切法에 있어서 이것이 있다고 執着함을 법아(法我)라고 하는데,

사람 몸은 우리 몸을 構成하는 地水火風과 우리 마음을 構成한 感受하는 작용 生覺하는 작용, 意志작용, 分別하는작용, 이런 오온(五蘊)이 잠시간 가짜로 和合되어 있으므로 恒時 하나인 나의 몸이 없으며, 一切法은 모두가 因緣 따라 이루어진 인연생(因緣生)이므로 이것도 역시 恒常 하나인

아(我)의 性稟이 없다' 이렇게 아는 것이 불교의 初步인 셈입니다.


'내가 없다, 내가 비었다' 하는 것은 불교말로 해서 아공(我空)이라 하고,

'一切法이 없다. 一切法이 비었다' 하는 것은 법공(法空)이라 합니다.

我空 法空을 깨달아버려야 도인(道人)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人間 存在가 原來 비었다고 分明히 깨닫고,

一切法이 原來 비었다고 보아야만

비로소 깨달았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조금 더 부연(敷衍) 說明하고 더 强調하기 위해서

道人들은 '내가 없다'는 말씀을 종종 합니다. 

여기, '내가 없다' 하는 굉장히 重要한 法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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