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영상법회 "행복"(7) '행복하게 사는것이 삶의 기본 원칙'설법 녹취록
지난 시간까지 해서 한 6번 정도 법회 하는 동안 幸福에 대한 이야기 첫 번째에서 우리가 願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우리는 보통 幸福하다고 말한다고 했죠? 그래서 願하는 것을 이루는 幸福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고 오늘 全切的인 것을 整理를 하면서 두 번째 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幸福에 대해서 한번 얘기를 해 볼까합니다.
우선 지난번까지 했던 행복에 대해서 한번 정리를 해 본다면요, 우리는 願하는 것, 바라는 것이 있었을 때, 그것을 이루면 행복하다고 여기는데, 보통은 우리들은 내가 願하는 것이 있지만, 그것을 이룰 수 있을까? 내가 이럴 수 있다는 게 마음 낸대로 삶을 만들어 나간다는 게 可能하냐? 이런 疑問을 품지만, 삶의 理致를 본다면 이 世上이 만들어진 것 自體가 마치 꿈과도 같아서 어떤 實體로서 實體로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幻影과도 같은 꿈과도 같은 것으로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世上은 내가 마음 내는 대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씀을 계속해서 드렸습니다.
지난 번 시간에 말씀드린 것에서 보면 量子物理學에서도 이 世上은 波長으로 波動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말씀을 드렸고, 波動이라는 形態, 波長이라는 形態로서 이 世上 全切에 모든 이 世上 곳곳에 無限한 可能性들, 量子라는 건 그런거라 그랬죠! 무엇이든 만들어질 수 있는 無限한 可能性이 波長이라는 形態로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 具足되어 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마음 하나 어떻게 일으키냐에 따라서 말과 生覺과 行動이라는 三業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내 앞에 펼쳐진 삶을 完全히 뒤바꿀 수 있는 힘을 지닌 存在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無限한 可能性, 完全히 이루어질 수 있는 이 世上은 完全하다는 그런 모든 可能性이 事實은 完全히 具足되어 있기 때문에. 量子物理學에서도 波長이라는 것은 모든 時間空間을 超越하는 一切의 모든 情報를 담고 있다고 했었죠?
그래서 그 情報를 再生하는 方法만 우리가 알 수가 있다면 그 無限한 어떤 智慧와 慈悲와 사랑과 힘의 모든 源泉을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쓸 수 있다고 그랬습니다. 예로 든 것이 지금 放送局에서 電波를 보내서 우리가 TV로 드라마를 볼 수 있는데, 放送局에 그 모든 TV드라마에 나오는 情報들이 電磁波라는 어떤 波長의 形態로서 虛空中에 떠 다니고 있다는 거죠. 지금 이 자리에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虛空中에 이 波長이 있는 거죠? 電磁波의 波長이 있어서 그 電磁波를 現實로 만들 수 있는 方法만 안다면. 지금 우리에게는 DMB[(Digital Multimedia Broadcasting는 映像이나 音聲을 디지털로 變換하는 技術 및 이를 휴대용 IT器機에서 放送하는 서비스를 말한다.]라는 스마트 폰이 있었을 때 스마트 폰을 DMB로 連結을 시키면 바로 이 자리에서 드라마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虛空中에는 그러한 드라마가 再生될 수 있는 情報는 波長의 形態로 이미 가득하다. 그러나 그 DMB로서 우리가 눌러줬을 때 그것을 再生시킬 수 있는 것처럼 이 世上에는 波長 波動이라는 無限한 無限可能性의 形態로서 모든 時間 空間을 超越하는 情報가 이미 存在하고 있다는 겁니다. 모든 可能性이 이루어질 수 있는 힘이 지금 이 자리에 이미 있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恒常 無限의 無限한 可能性이 내 앞에 펼쳐져 있는데 그 가운데서 맨날 選擇하던 익숙한 것들만을 反復的으로 選擇하므로써 우리 삶을 내 마음을 가지고 制限을 시킨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러지만 않는다면 우리 삶은 無限하게 無限大로 擴張할 수가 있고, 마음 낸 대로 삶을 바꾸어 갈 수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 마음을 가지고 몸/행동과 말과 生覺을 가지고 내 앞에 펼쳐질 삶을 마음 낸대로 만들어 낼 수가 있어요. 一切唯心造라고 해서 마음 낸 대로 만들면서 살 수가 있습니다. 마음 하나 한 生覺 탁 일으켰을 때 宇宙法界가 도와주는 原理가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重要한 것은 뭐냐 하면 이 事實만을 아는 것이 重要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無限한 可能性이 우리 앞에 現實로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 또한 空하고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實體로서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事實은 꿈처럼 幻影처럼 신기루처럼 우리 앞에 現實처럼 펼쳐지는 거죠. 事實은 그렇기 때문에 한 生覺 일으켜서 만들어 내기가 쉬운 겁니다. 堅固한 實體라면 堅固한 實體를 어떻게 마음으로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世上이 堅固한 것이 아니고, 다만 因緣 따라 모였다가 因緣 따라 흩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經典의 緣起法 가르침에 보면 이 世上 모든 것은 마음에서 緣起 한다 이럽니다. 마음에서 緣起한다. 내 바깥에 物質的인 實體가 내 바깥에 있다고 生覺하고 있지만, 事實은 그게 아니라 錯覺이라는 거죠. 마음에서 緣起하는 것일 뿐입니다.
바깥에 그 어떤 것이 있더라도 마음이 不足하고 마음이 가난하고 마음이 아픈 사람은 언제나 世上을 바라볼 때 그런 마음에서 世上을 보는 것이 항상 안 좋고 갑갑하고 답답하고 우울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데 마음이 平和롭고 아름답고 밝고 活氣에 넘치는 사람이라면 世上의 그 어떤 것을 보고도 다 歡喜하며 웃을 수 있을 거예요.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에서 世上을 緣起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냐에 따라서 이 世上을 마음껏 바꾸고 만들고 世上의 主人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삶이라는 것 또한 固定된 實體가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執着할 바가 못 된다는 거죠. 거기 執着해서 “야, 내가 마음이 만들면 된다. 그랬지? 오케이. 그러니까 내가 돈을 千億을 벌어봐야 되겠다. 내가 어디 이 世上을 支配하는 어떤 사람이 되어봐야 되겠다. 이런 온갖 生覺을 가지고 서울대를 나와 봐야 되겠다. 온갖 生覺을 가지고 거기에 執着을 하고 慾心을 내기 始作한다면 이 宇宙의 法則이 그 사람을 비껴 가버립니다. 그 마음은 純粹하게 바랄 때는 淸淨한 마음에서 한 生覺이 일어나서 純粹하게 生覺할 때는 그것이 이루어지지만, 執着을 하게 되면 그게 안 이루어진다고 전 시간에 말씀을 드렸었죠? 그와 마찬가지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一切가 空한 줄 안다면, 아름답게 삶을 만들어냈지만 거기에도 執着할 必要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무언가 願했지만, 願한 것을 이루면 그냥 아름답게 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루지 못했다.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괴로워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이루어도 좋고 이루지 않아도 좋은 겁니다. 마치 꿈을 꿨을 때 오늘 좋은 꿈을 꾸고 싶다. 이러이러한 꿈을 꾸고 싶다. 해서 그런 꿈을 꿔도 좋지만, 그런 꿈을 꾸지 않아도 사실 꿈 깬 者 立場에서 본다면 마음은 相關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잖아요. 마음껏 삶을 만들어내고, 주무르면서 마음껏 사셔도 좋습니다. 단, 相對方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相對方에게 不便을 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내가 하는 어떤 行爲 自體가 누군가를 위한 도움이 되는 行爲라면 무엇을 만들고 創造해도 좋다는 겁니다.
그러니 안되는 것을 기어이 하고자 執着을 할 必要는 없다. 남들이 돈도 잘 벌고 하여간 뭐든지 다 잘하는 거 같아요. 나를 보니까 나는 特別히 잘하는 거 같지 않다는 말이죠. 그러면 가슴 아파하면서 그 사람을 쫓아가려고 그 사람이 사는 方式대로 나도 한번 해보려고 미친듯이 쫓아가면 괴로움밖에 있을 수가 없죠. 그렇게 내가 되지 않는 데 그렇게 가려고 하는 걱 그 自體가 괴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럴 必要가 없다는 겁니다. 왜? 꿈이라는 것은 어때요? 화려하고 아름다운 꿈을 꿔도 좋고, 소박한 꿈을 꿔도 좋습니다. 그것은 어차피 꿈이기 때문에. 어제 봉녕사를 갔다가 나오는 길에 一柱門처럼 주차장 앞에 있는 두 글귀가 있었는데.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이라. 백 년 동안 物質을 物件을 蓄積함을 貪하고 物質을 貪하고 慾心을 貪하고 無數히 많은 어떤 것들을 貪해도 한 瞬間에 사라지는, 한 瞬間에 티끌로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하루 이틀 3일 마음을 닦는 것은 마음工夫를 하는 것은 千年의 寶物이 된다(三日修心千載寶). 아무리 무수한 것을 貪하고 慾心을 부려봐야 그것은 하루아침에 끝나는 티끌과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티끌과 같은 것을 끌어 모으려고 이 귀한 백년도 안 되는 귀한 시간을 虛費하느라고 에너지를 낭비해서는 우리 삶이 얼마나 空虛해지겠습니까? 그런데 이 世上은 幻想이지만, 진짜처럼 보이지만 陷井(함정)이 있습니다. 진짜처럼 보이거든요, 돈을 많이 벌면 그것이 진짜인것 처럼 주변 사람들이 나를 찬탄하고 따른단 말이죠.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으면 많은 사람이 나를 이렇게 따르니까 괜히 내가 으쓱하게 느껴지고, 내가 좀 우쭐하게 느껴지고, 뭐 좀 훌륭한 사람같이 느껴진단 말이에요. 거기에 속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사람이. 남들이 봤을 때 내 스스로 느끼기에 뭔가 대단한 존재가 된 것처럼 느껴지는 그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야 말로 이 世上이라는 그 幻想 속에서 속지 않을 수 있는 이 幻想의 世上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인 거거든요.
그런데 누구나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가짜인 이 꿈이 진짜라고 錯覺을 하는 겁니다. 진짜라고 錯覺을 하니까 執着을 하게 되는 거예요. 執着을 하니까 그것이 더욱더 이루어지지 않는 거죠. 그러니까 남들은 이루는데 난 이루지 못하니까 점점 더 괴롭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렇게 인생을 사는 것이 얼마나 갑갑하고 답답하고 공허하겠습니까?
그래서 무엇이든 自由롭게 삶을 創造하고 산다. 그러나 創造되어도 좋고 안 되어도 좋다. 난 이렇게 살지만, 이렇게 살아도 좋고 이렇게 안살아도 좋다. 저 사람은 저렇게 살지만, 난 저 사람대로 따라 갈 필요가 없다. 나는 나대로 내 삶의 길을 간다. 나에게 주어진 삶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 이 수없이 많은 60억 인구가운데 나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이 걸을 수 있는 나 자신의 삶의 길이 누구에게나 있는 겁니다. 그리고 自己 自身이 걷고 있는 그 삶의 길은 그 어떤 남들을 쫓아가는 일 보다 더욱 더 貴하고도 아름답고 獨尊的인 길인 겁니다. 꼭 필요한, 이 宇宙에서 나만이 成就 할 수 있는 나에게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唯一한 特權인 겁니다. 이 수많은 무수한 중생들 가운데 나만이 나의 길을 갈 수 있는 거예요.
똑같이 사장이다. 똑같이 지휘관이다. 남들이 이렇게 지휘하고 이렇게 회사를 운영한다고 해서 나도 그것을 똑같이 따라 갈 필요는 굳이 없다. 나만의 方式으로 成功하는 法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自己 다르마라고 그래요 自己 眞理, 自己 智慧가 自己 內面에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남처럼 쫓아가려고 하면서 왜 나는 저렇게 안 되지? 라고 하니까 괴로운 거죠. 그래서 우리는 自己다운 方式으로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인데, 우린 누구나 이미 자기답게 살고 있습니다. 삶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어요. 그러나 마음속에서 자꾸 남들과 比較하고 判斷하고 그러니까, 執着을 가지고 하니까 스스로 괴로움에 빠지는 거죠. 그러니까 괴로움에 빠진 것은 남 탓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그리로 기어들어간 것에 다름이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면 되냐 하면요, 이 幻影과도 같은 이 아름다운 世上을 아름답게 살면 됩니다. 아주 즐기면서 살면 됩니다. 누리면서 살면 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온전히 누리면서 살면 되요.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事實은 決定的인 괴로움이라는 것이 이 世上에 없습니다. 固定的인 괴로움이라는 건 없어요. 우리가 괴로움이라고 解釋한 것이 있을 뿐이지. 어디 회사에서 亡했다. 이 세상에서 亡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중생의 눈으로 봤을 때. 누구나 한껏 빛을 올리고 나면 누구나 무너지게 마련이거든요.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健康을 잃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한 번 태어나면 한번 죽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自然스러운 現象이에요. 문제 상황이 아니라 아주 自然스러운 상황입니다.
누구나 한번 오면 한번 가는 것이고, 한 번 성공하면 한번 실패를 맛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거는 괴로움이다 공허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내 인생이 완전히 비참해졌구나. 이런 것은 단지 나의 解釋일 뿐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운 眞理에 내가 否定的인 解釋을 할 뿐인 것이지 삶이라는 것은 否定的인 것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如如한 아름다운 일이 언제나 펼쳐지고 있는 겁니다. 그 아름답고 아주 廣闊(광활)하고 빛이 나는 이런 삶이 언제나 펼쳐지고 있는데 우린 거기에다가 계속해서 生覺으로 否定的인 生覺을 代入시키고 아픈 마음을 代入시키면서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와 같이 이 世上이 꿈이고 幻影인 줄 안다면 우리가 마음내서 무엇이든 한 번 해보면서 산다는 거죠. 인생 한번 태어났는데, 내가 내 빛깔대로 살면서 한번 누려보자는 거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무엇이든 한번 저질러 實踐해 보는 겁니다. 불교는 소극적인 종교가 아니에요. 執着을 버려야 된다고 했다고 해서 消極的으로 돈도 벌지 말고 성공하지 말라는 종교가 아닙니다. 熱心히 해서 成功해라. 무엇이든 한번 저질러 봐라. 實踐해 봐라. 하는 겁니다. 自己 빛깔을 뽐내봐라. 그러나 成功과 失敗라고 解釋하지 마라. 삶은 언제나 成功的이니까. 언제나 完成되어 있는 狀況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每 瞬間瞬間이 成功이고 每 瞬間瞬間이 完成입니다. 우리가 괴로워하거나 두려워해야 할 것이 하나도 없어지는 거죠. 그렇게, 그러한 方式으로 지금 이 瞬間 自身에게 주어진 삶을 즐겁게 熱情을 가지고 누리면 됩니다. 다만 그 熱情과 願力이 挫折되었더라도 괴로워할 필요는 없는 거죠.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이 世上에 가장 强力한 힘을 가진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돈 많은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이 아니고요, 권력을 가진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힘 있는 사람은요, “야, 저 사람은 저 사람 앞에 뭔 일이 벌어져도 저 사람이 성공을 하든 실패하든 相關없이 中心 잡힌 사람이라는 믿음을 주는 사람이 있거든요. 저 사람은 언제나 中心이 잡혀있는 겁니다 성공해도 실패해도. 얼마나 무서운 사람입니까? 얼마나 힘 있는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없이 언제나 中心이 잡혀있어요. 잠시 주춤할 수 있을 지언정, 금방 오뚝이처럼 되돌아오는 거죠. 그게 정말 힘 있는 사람입니다. 정말 내가 힘을 가지고 돈을 가져서 힘 있는 것이 아니라, 自己中心이 이렇게 확실하게 잡혀있으면 언제나 그 힘을 느낄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첫째로는 願하는 것을 이룰 땐 幸福이지만, 願하는 것을 이룬다 할지라도 그 또한 텅~ 비어 空하다는 事實을 알아야 되고. 물론 그 以前에 무엇이든 願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能力이 없어서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만큼 마음을 열지 못해서 無限한 可能性의 世界에 가슴을 열지 못했기 때문에. 또 내가 내 마음으로 스스로를 制限시켰기 때문에 이루지 못하는 것일 수가 있다는 可能性을 열어두고 그러고 나서는 가슴을 열고 그 일을 實踐하되, 안 된다할 지라도 거기에 크게 얽매일 필요 없다는 것이죠. 그렇게 첫 번째 우리들이 살아가야 될 삶의 방식인 원하는 것을 얻는데서 오는 행복을 충분히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한번 도전해보고 실천해 보고, 열정을 가지고 즐겁게 삶을 한번 나아가 보라는 거죠. 저질러 보라는 겁니다.
그게 아름다운 겁니다. 그러나 저질러서는 失敗도 그것 또한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智慧로운 삶이이겠습니까? 그렇게 아주 아름답게 熱情을 가지고 삶을 살아나가야 된다는 것이 첫 번째 幸福의 方式입니다.
그러면 제가 처음에 이 얘기를 했어요. 幸福에 이르는 데는 두 가지 方法이 있다. 첫 번째는 願하는 것을 얻을 때 幸福하다 그랬죠? 그리고 願하는 것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지금까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願하는 것이 없을 때 幸福하다고 그랬어요. 바라고 願하는 것을 내려놓았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 이미 完全한 幸福이고요, 願하는 것이 없으니까 마음이 未來로 가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 存在해 있는 거죠. 지금 이 瞬間의 滿足밖에 없고, 지금 이 瞬間에 存在하고 있기 때문에 未來에 오는 幸福을 추구하는 게 아니고 지금 이 瞬間 存在합니다. 그래서 現在가 中心이 되는 거죠. 그리고 每 瞬間이 最高의 結果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이제부터 몇 시간 정도 願하는 것이 없을 때 오는 幸福에 對해서 살펴 볼 예정인데요, 願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지금 이 瞬間 自足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스스로 滿足하고 있다는 얘기에요. 지금 이 瞬間 나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서 滿足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있을 人生에서 그 어떤 願하는 것을 이루고 난 뒤에도 滿足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願하는 걸 이루고 나도 幸福을 느끼지 못합니다. 어느 분이 그랬다 그랬데요. 엇그제 누굴 만나 이야기를 하는데, 쓰리스타로 轉役하신 분이 그랬답니다. 전에 여러 번 進級에 떨어져 보셨었는데, 그래도 어쨌든 쓰리스타까지 가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진급 떨어져 봤을 때 언제가 가장 괴롭던가? 하고 물어봤나 봐요. 그랬더니 그 분이 그러더랍니다.
쓰리스타 떨어졌을 때가 제일 괴롭다고. 그러니까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 많이 올라가야 되겠다는 生覺도 가지고 돈을 벌면 벌수록 더 많이 벌어야 되겠다는 生覺을 가지거든요. 병사들이 군 생활 하면서 군대에서는 이건 괴롭기 때문에 제대하면 그때부터 행복해지겠습니다. 라고 얘기했는데, 그건 정말 어리석은 生覺입니다. 군 생활하는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제대해도 그 삶은 그대로 그대로 가는 겁니다. 천만 원을 가지고 만족하지 못한 사람은 천억이 있어도 만족하지 못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願하는 것이 없는 幸福이라는 것은 自足과 滿足이 있는 삶이고, 지금 이 자리에서 幸福한 삶입니다. 未來에 무언가 成就해야지만 그때 가서 幸福한 삶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幸福할 수 있는 삶이고요, 그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할 수 있는 삶이 바로 眞情한 幸福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뭔가를 願해서 未來에 그걸 이루면 그때 가서 幸福하겠다. 그거는 眞情한 幸福이 아니죠. 여러분 人生에서 最高의 瞬間, 가장 빛나는 瞬間, 가장 절정인 瞬間은 언제였습니까? 지금입니다. 지금. 지금이 최고의 절정의 瞬間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내가 10년 前에 정말 最高였는데.”라고 生覺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언제까지고 幸福해지가 어렵겠죠.
이것은 이런 願하는 것이 없을 때 오는 幸福은요, 자칫 “그러면 마음속에 바라는 것도 없고, 소극적으로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라고 이야기하던데, 그게 아니라 이것이야 말로 積極的이고 主導的인 幸福입니다. 自己가 自己 삶의 幸福을 主管하고 있는 主導的인 主人公이 되는 삶을 意味합니다. 주변 狀況은 끊임없이 바뀌죠. 행복한 狀況도 있다가 불행한 狀況도 있다가 좋은 狀況도 있다가 나쁜 狀況도 있다가 끊임없이 주변 狀況은 바뀌고 變化합니다.
그런데 主導的인 幸福을 이러한 행복을 갖지 못하는 사람은 주변 狀況에 따라 마음이 계속해서 휘청거립니다. 누가 칭찬해주면 행복했다가 비난의 소리가 들리면 괴로워서 죽고 싶은 生覺이 들고, 돈을 벌면 행복한데 돈을 못 벌면 또 괴롭고. 자식이 성적을 좋게 받아오면 행복한데, 나쁘게 받아오면 괴롭고. 그러니까 주변 狀況에 노예처럼 사는 거예요. 항상 주변 상황이 좋아지지 않나하고 자꾸 바깥을 기웃기웃 거리면서 내안에 이미 있는 幸福은 내팽겨진채 바깥으로만 視線을 돌리는 삶인 겁니다. 그것은 主導的인 삶이지 못하죠. 주변 狀況이 主人이 되고 나는 그 삶의 奴隸가 되는 삶이죠. 주변 與件에 계속 휘청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의 말 한마디. 주변 시선, 주변 狀況 與件을 계속 해서 바라보면서 사는 삶밖에 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만족하고 자족할 수 있는 것은 積極的이고 主導的인 自身의 안에 있는 행복을 自身 스스로 가져오는 겁니다. 삶의 主導權을 내가 가지는 거예요. 狀況으로 넘기지 않고 내가 가지는 겁니다. 예를 들어 남들이 나한테 욕을 한마디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며칠 동안 괴로워하고 있어요. 그것은 내 삶의 主導權을, 내 행복의 可能性에 대한 主導權을 그 욕한 사람에게로 넘겨주는 겁니다. 내 인생의 主人이 내가 되지 않고 그 욕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 사람의 욕 한 마디가 나를 이렇게 휘청거리게 하고 이렇게 괴롭게 만들었던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常識으로 우리는 自身의 삶의 主導權을 相對方에게 넘겨주고 산단 말이죠. 그것을 다시 내안에 내 것으로 가져오는 삶. 그것이 바로 願하는 것이 없을 때 오는 幸福입니다.
누구든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해질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남들이 보기에 내가 生覺하기에 지금이 最惡이라고 生覺한다 할지라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구든 행복해지는 것이 可能합니다. 삶의 基本 原則은 幸福하게 사는데 있습니다. 이게 삶의 基本 原則이에요.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뭐라고 生覺하냐 하면, 삶은 언제나 괴로운 거야. 잠깐 행복이 왔을 때 대부분 어떻게 生覺 하냐 하면요, 不安하다고 그럽니다. 잠깐 행복이 왔을 때, 나한테 이렇게 행복이 와도 되나?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언젠가 이 행복도 무너지겠지?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행복하면 안 될 거 같이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신기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삶의 어느 瞬間 절정의 행복감이 느껴졌을 때에, 不安에 떱니다. 不安에 떨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 不安에 떠는 마음으로서 또 다른 不安과 不幸의 삶을 내 人生으로 가져오는 거에요.
지금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라는 瞬間이 있을 때, 이게 바로 삶의 本質이구나. 이게 내가 살아가는 삶의 役割이구나. 이걸 알아야 되는 겁니다. 내 마음 하나 돌이키면, 이 一切皆苦라는 것은 어리석은 중생이었었을 때, 중생의 삶을 살면서 모든 對相에 是非를 걸고 살 때 괴로움이라는 얘깁니다. 그 生覺을 내려 논다면, 언제나 우리가 處해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完全한 幸福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 앉아 계시는 분들이 저마다의 어떤 苦痛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幸福해질 수가 分明하게 있다. 條件을 하나도 바꾸지 않고도 주변 狀況을 하나도 變化시키지 않고도 지금 이 不安한 마음, 未來 때문에 不安해하는 마음을 조복시키고, 언제나 幸福한 삶을 살 수가 있다. 中心을 잡고 살 수가 있다는 거죠. 우리 장병들이 군 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던데,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이 얘기를 해주고 實際 많은 장병들과 대화를 나눴을 때, 군 생활도 이렇게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요. 어떤 병장 친구가 제가 이런 얘기를 하고 났더니 쫓아왔어요. “아, 법사님 제가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저는 군 생활이 너무 幸福하고 自由롭습니다.” 그래서, “군 생활이 自由로울 거 까지 있느냐?” 그랬더니. “군 생활이 정말 자유롭다.” 그래요. “왜 그러냐?” 그랬더니. 自己가 뭐 좀 失手를 해가지고 영창을 갔다 왔습니다. 영창 14박 15일 갔는데, 14박 15일 동안 영창에서 딱 잡고 앉아있어 보니까, 야 세상에 이러고 앉아있는 것처럼 힘든 게 없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는 힘들고 힘들고 했었는데. 그 보니까 그 친구가 영창에 가 있었을 때 제가 위문가서 만났던 친구인데 그 때 記憶하냐고, 그래서 “지금은 좀 어떠냐?” 그랬더니, “아, 지금은 너무 행복하다.” “왜 그렇게 행복하냐?” 그랬더니.
영창에 가서 14박 15일 앉아있는데 그렇게 힘들고 뭔가 모르게 그렇게 갑갑할 수가 없더래요. 뭔가 내 마음대로 피엑스도 못가고, 친구랑 대화도 못하고, 앉아만 있으니까 힘들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친구가 탁 나와 보니까 “야, 군 생활이 이렇게 自由로운 것이구나. 군 생활이 이렇게 便한 곳이구나.”라는 걸 깨달았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후임들한테 뭐라고 그러냐하면, 저한테 그럽니다. 이 얘기를 꼭 전해주십시오. 이래서 뭔 얘기냐 그랬더니. 제가 우리 후임들을 위해서 우리 군 장병들을 위해서 모든 군 장병들의 행복을 위해서 강추 하는 게 추천하는 게 하나 있다. 뭐냐? 영창 한 번 필히 必須 코스로 가봐야 된다. 우수개로 그러더라고요. 영창 한 번 갔다 왔더니 이렇게 행복하더라고 하면서. 그럴 수 있어요. 이렇게 큰 苦痛을 한번 맛보게 되면 다른 것도 너무 幸福해지죠.
제가 印度에 한 번 가서 보니까 印度의 여름에 너무 덥단 말이에요. 너무 너무 미친듯이 더운 겁니다. 그러고 났더니 한국에 와서 지금 몇 년이 지나도록 여름이 그렇게 더워서 괴로운 걸 별로 못 느끼겠어요. 그걸 이렇게 딱 經驗하고 났더니만, 아무리 더워도 이 程度는 더운 거 같지도 않고, 아니 幸福感. 幸福指數가 엄청 높아지는 걸 느낍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도 充分히 누구나 幸福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거를 한번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가 아니라, 일어난 일을 놓고 어떻게 反應하느냐에 따라서 幸福해질 수도 있고, 不幸해질 수도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가 重要한 게 아닙니다. 우리 人生에서. 그 일어난 일을 놓고 내가 어떻게 反應하느냐에 따라서 幸福과 不幸이 左右되는 겁니다.
우리 인생에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겼어도,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겼어도, 어떤 일이 생겼어도, 어떤 일이 벌어졌어도, 그거는 事實 本質的인 일이 아닙니다. 重要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정말 重要한 本質的인 것은 그것을 내가 어떻게 反應하고 어떻게 解釋할 것이냐?입니다. 우리가 봤을 땐 아주 最上의 狀況이라고 生覺하지만,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最惡의 狀況으로 生覺하지만 너무나도 幸福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다음시간에 이야기를 해보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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