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布施)의 종점(終點)은 중생 성숙
-물질 보시가 더 나은가 법보시가 더 나은가?
흔히 물질보시(財布施)는 법보시(法布施)보다 못하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적어도 제가 보는 바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보시의 종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시하는 그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보시는 중생 성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중생을 밝히고 중생을 성숙시키지 못하는 보시는 그것이 물질이든 가르침이든 모두 헛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물질보시를 아무리 많이 해도 중생 성숙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괜스리 물건만 낭비한 것이 될지 모릅니다. 더 나아가 보시를 받은 분들을 더 어둡게 만든다면 그것은 차라리 아니 함에 못할 것입니다. 좋은 뜻에서 시작된 서구의 아프리카 원조가 오히려 아프리카인들의 자활을 막고 의존심만 더 키웠다는 이야기는 이런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물질을 퍼부어도, 중생을 성숙시키지 못한다면 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경전을 전하고 좋은 가르침을 전해도 그것이 중생 성숙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그 또한 괜스리 업(業)만 더한 꼴이 됩니다. 그래서 보시는 삼륜공적시(三輪空寂施)라, 준 사람도 받은 사람도 준 물건도 받은 물건도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준 사람도 성숙되고 받은 사람도 성숙 물건 마저 빛나게 됩니다.
준 사람은 주었다는 생각이 없으니 마음에 자만심, 교만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니 주기 전이나 준 다음에나 한결같이 언제나 따뜻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상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고 내가 네게 뭘 해 줬는데, 무얼 줬는데 하는 마음이 있으면 예전의 한결같은 마음은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받은 분은 받은 물건도 없고(?) 받았다는 생각도 없으니 평생 따를지 모를 빚과 부담에서 해방됩니다. 비굴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저 감사할 뿐이요 주신 분의 은혜만 마음 속에 간직될 뿐입니다.
법공양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을 줬다는 생각도 법을 받았다는 생각도 받은 법도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법을 전하는 사람이 내가 법을 전했다, 가르침을 폈다 하는 생각이 있으면 그 것은 교만입니다. 이 세상은 완전하여 줄 법도 받을 법도 없습니다. 다만 지금 사정이 줘야 하고 받아야 하므로 괜스리 우리가 주고 받은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생각이 끼여들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야 법공양이 완전하게 됩니다. 즉 중생 성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경전에 숱하게 나오는 법보시가 재물보시보다 낫다는 말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법보시 재보시의 구분은 그저 중생의 생각일 뿐 부처님의 자리에는그런 구분이 없습니다. 보시는 그저 보시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보시는 무슨 보시든 모두 중생 성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그것이 또한 참된 보시입니다. 따라서 재물공양이 법공양이요, 법보시가 바로 재물보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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