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강신주의 무문관과 철학] 21.
비심비불(非心非佛 구하려는 어떤 것도 없어야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경전에 대한 지적인 이해도 선원에서의
치열한 좌선도 결코 부처로 가는 길 아냐
평(平)의 마음 항상(常)때 우리는 마침내 부처가 된다
어떤 스님이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묻자, 마조(馬祖)는 말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
무문관(無門關) 33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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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김승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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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호(江湖)는 남종선의
본거지
중국 역사를 보면, 아니 허름한 중국 무협 영화를 보더라도 빈번히 등장하는 용어가 있습니다. “강호(江湖)”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아직도 나이든 저자들의 서문에는 “강호제현(江湖諸賢)에게 질정(叱正)을 바랍니다”라는 구절이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강호의 여러 현명한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꾸짖어 바로 잡아주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강호’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중국 불교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강호라는 말은 강서(江西)와 호남(湖南)을 줄인 말이라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다섯 번째 조사인 홍인(弘忍,
601~674) 스님에게는 걸출한 두 명의 제자가 있었지요. 신수(神秀, ?~706)와 혜능(慧能, 638~713)이 바로 그들입니다. 선불교의
역사에서 신수가 북종선(北宗禪)을, 그리고 혜능은 남종선(南宗禪)을 상징합니다.
바로 강서와 호남, 그러니까 강호라는 시골이 바로
남종선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북종선은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이란 대도시를 본거지로 두고 있었습니다. 강서를 대표했던 스님이
바로 마조(馬祖, 709~788)이고, 호남을 대표했던 스님이 석두(石頭, 700~790)였습니다. 두 스님이 없었다면, 혜능이 시작했다고 하는
남종선이 번창해서 뒤에 중국 나아가 동아시아 선불교의 주류가 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석두도 중요하지만 특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마조입니다. 그 유명한 백장(百丈, 749~814)도, 임제(臨濟, ?~867)도, 조주(趙州, 778~897)도, 그리고 ‘무문관’을 편찬했던
무문(無門, 1183~1260)마저도 모두 마조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조의 어떤 면이 남종선이라는 도도한 강물을 만들게
되었던 것일까요.
마조의 개성을 이해하려면, 그가 자신의 스승 남악(南岳, 677~744)에게서 무엇을 배웠는지 알아야만 합니다.
남악 스님은 바로 6조 혜능의 직제자이지요. 마조와 남악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옵니다. 어느 날 남악이 물었다고 합니다. “그대는
좌선하여 무엇을 도모하는가?” 그러자 마조가 말했습니다. “부처가 되기를 도모합니다.” 그러나 남악은 벽돌 한 개를 가져와 암자 앞에서 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기이한 풍경에 마조는 스승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벽돌을 갈아서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당황스런 얼굴로 마조는 물었다고 합니다. “벽돌을 간다고 어떻게 거울이 되겠습니까?” 그러자 남악은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벽돌을 갈아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좌선하여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마조의 이야기를 담은 ‘마조어록(馬祖語錄)’에 실려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남종선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을 끼쳤던 마조의 깨달음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2. 벽돌은 갈아도 거울이 될 수 없다
싯다르타는 싯다르타일 뿐이고, 나는 나일뿐입니다. 왜 나를 갈고 다듬어서 싯다르타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할까요. 물론
이것은 되려고 해도 될 수도 없는 일일 겁니다. 더군다나 이런 노력이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배신하는 것 아닐까요.
벽돌은 있는 그대로 벽돌일 뿐이고, 거울은 있는 그대로 거울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일체의 가치 평가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고요. 벽돌이
거울이 되지 못했다고 좌절하거나, 아니면 거울은 벽돌과 달리 귀하다고 해서 뻐기는 상황, 그러니까 가치 평가가 탄생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해묵은 집착에 빠지기 때문이지요. 더 좋다는 것을 추구하고 더 나쁘다는 것을 피한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외적 가치의 노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이런 일체 가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아닐까요. 이럴 때 우리는 세상을 주인으로 살아가는 부처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남악은 마조에게 “좌선한다고 해서 부처가 될 수 없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평생 남의 꽁무니만
쫓아다녀서야 어떻게 자신의 의지대로 한 걸음이라도 걸어보는 경험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란 무엇인가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집착은 무엇인가에 집중하여 마음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당연히 집착할 때 우리의 마음은 활발발하게
생동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아교처럼 굳어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주인공으로서의 삶, 다시 말해
부처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우리가 자비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부처가 되려고 집착하는 것,
나아가 부처가 되려는 방법으로 좌선에 몰입한다면, 이것은 스스로 부처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될 수 없다는 징표라고 할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마조어록’을 보면 마조는 자신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명료화합니다. “무릇 불법을 구하려는 사람은 마땅히 구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마음 바깥에는 별도로 부처가 있지도 않고, 부처 바깥에는 별도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문관(無門關)’의 33번째 관문은 “마음 바깥에는 별도로 부처가 있지도 않고, 부처 바깥에는 별도의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마조의 가르침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조의 제자 중 한 사람은 스승의 가르침을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나 봅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아마 ‘너의 마음에서 부처를 찾아라!’는 스승의 말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마조의 대답은 제자의 기대를 좌절시키고
맙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또 일이 벌어진 겁니다. 마음과 부처를 자꾸 외부에서 구하려는 제자가 등장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중요한 마조의 가르침은 “무릇 불법을 구하려는 사람은 마땅히 구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사자후에 담겨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것도 구하는 것이 없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떤 집착도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이제 더 막연하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일까요.
3. 평상시의 마음이 부처되는 길
동안거(冬安居)니 하안거(夏安居)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근기가 탁월한 스님들이 부처가 되려는 염을 세우고 치열하게
참선하는 기간을 말합니다. 그래서 동안거는 겨울에 뜨거운 땀이 솟구치도록 만드는 열기를 자랑하고, 하안거는 여름에 뜨거운 태양마저 얼려버릴
냉기가 고요한 사찰 마당을 휘감는 것입니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데, 겨울의 추위나 여름의 더위쯤 대수이겠습니까. 너무나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이지요. 그런데 지금 마조의 스승 남악은 이런 노력 자체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습니다. 벽돌을 갈아서 거울이 될 수 있다면 참선해서 부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조롱과 함께 말입니다. 마조가 반문했던 것처럼 벽돌을 아무리 정성스레 치열하게 다듬는다고 해도 거울이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좌선으로 부처가 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삶의 당당한 주인공, 혹은 활발발한 마음을 가진 주체가 될 수 있을까요.
마조를 상징하는 명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구절을 어디선가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평상시의 마음이 바로 부처가
되는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교종이 자랑하는 불경에 대한 지적인 이해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종 전통에서 강조하는 좌선도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그저 평상시의 마음만 유지할 수만 있다면, 바로 그 순간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을 민중에게도 열어놓았던 것처럼, 선종은 마조를 통해 몇 명 근기가 탁월한 스님들의 치열한
참선으로 축소되었던 부처가 되는 길을 진짜로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어젖힌 것입니다. 이제 부처는 선방(禪房)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상생활 도처에서, 예를 들어 6조 혜능이 몸소 보여주었던 것처럼 물을 긷고 땔나무를 나르는 운수반시(運水搬柴)의 과정에서,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 평상(平常)이란 말은 ‘일상생활’이라고 번역하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중요한 단어입니다.
‘평’이라는 글자는 저울이 균형을 잡고있는 순간, 혹은 물의 표면이 동요되지 않고 잔잔한 순간을 묘사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평’이라는
글자는 흔들리는 저울이나 요동치는 물과는 대조적인 마음 상태를 가리킵니다. 누구나 일희일비하는 분주한 일상생활에서 이런 고요하고 안정적인 마음
상태를 작으나마 갖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어느 한 순간에는 싯다르타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마음
상태가 지속적이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범한 우리들과 깨달음에 이른 부처들 사이의 차이입니다. ‘평상’이란 단어의 두 번째 글자
‘상(常)’이 우리의 눈에 강하게 들어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릅니다. ‘상’은 ‘항상(恒常)’이란 말이나 아니면 ‘상례(常例)’라는
말에서처럼 ‘지속’을 의미하는 말이니까요. 물을 긷고 땔나무를 나를 때도, 제자들에게 몽둥이질을 할 때도, 최고 권력자를 만날 때도, 어느
경우나 ‘평’의 마음이 지속될 때 마침내 우리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상시의 마음이 부처가 되는 길”이라고 마조가 말했을 때,
진정으로 공부해야 할 곳은 바로 ‘상’이라는 한 글자에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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