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칭 동아리 - 실습 24주차 ]
( 주제 : 自動化된 마음에서 벗어나기 - 깨어있기 )
< 자료 활용 가이드 >
1) (가족대화, 모임대화, 상담, 코칭 시 ) 자료를 출력한 후, 한부씩 나눠줍니다.
2)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는 부분에 밑줄 긋도록 안내합니다.
3) 서로가 어떤 부분에 밑줄을 그었는지 설명하고, 그 이유를 충분히 나누도록 합니다.
4)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의 질문 내용에 답을 적도록 합니다.
5) 질문에 답을 적은 내용을 서로가 공유합니다.
6) 마지막에는 서로에게 격려, 응원의 멘트를 한마디씩 합니다.
1) 인용도서1 : 마음에서 빠져나와 삶 속으로 들어가라 / Steven C. Hayes, Spencer Smith 지음
인용도서2 : 지금 이 瞬間을 살아라 / 에크하르트 톨레
2) 글 구성방식 : 대부분의 글은 인용도서 원문을 그대로 발췌하여 표현하였습니다.
3) 내용 중 ‘(필자) ==>(이텔릭체)’ 표시 부분은 자료를 구성한 필자가 설명을 돕고자 부연설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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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작성자의 설명 )
Q) 본 자료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필자) ==> 사람은 대부분 自動化된 反應에 反應하면서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서 양치질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버스를 타고, 회사에 가서 책상에 앉고, 인터넷 기사를 검색하고 메일에 답하는 모든 過程에서
自動化가 이뤄진다. 자신이 하루를 살면서 과연 몇 %나 無意識的으로 形成된 自動化 反應에 依해 살아가고 있는가를
確認해보면 놀랄 것이다.
問題는 이러한 無意識적으로 自動化된 反應으로 順應的으로 反應하면서 살게 된다면, 지금 보다
더 나은 삶으로의 發展은 더 以上 없게 된다. 그냥 現狀 유지를 하거나 더 退步하는 方向으로 가게 된다.
眞情으로 自身을 일으켜 세우고, 오늘보다 來日이 自身이 願하는 삶에 더 가까운 삶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自動化된 마음에서 벗어나서 깨어있는 意識으로, 變化를 위한 行爲를 試圖해야 한다.
變化를 위한 行爲는 깨어있는 意識에서만 가능하다.
깨어있기가 必要한 理由가 하나 더 있다. 이러한 自動化된 마음은 우리의 意識을 慾心과 執着에 얽매이도록 하고,
바로 지금 여기 이 瞬間을 살아가는 生生함을 놓치게 한다. 人間이 苦痛을 느낄 수밖에 없는 存在임을 받아들이고,
慾心과 執着으로 인한 生覺의 일어남을 알아차리고 멈출 수 있다면, 당신은 좀 더 平和로운 마음상태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1. 큰 그림 - ACT ( 마음챙김, 受容 그리고 價値中心의 삶 )
1. 마음챙김 ( 알아차림, 깨어있기)
마음챙김이란 당신의 經驗을 觀察하는 한 가지 方法으로, 數世紀 동안 東洋에서 다양한 形態의 冥想을
通해 修行되어 온 것이다. 生覺은 世上을 바라보는 렌즈와 같다. 우리는 모두 自身만의 特殊한 렌즈를
끼고는 그 렌즈가 經驗의 解釋을 左之右之하도록 許容하는 傾向이 있는데, 심지어는 自身이 누구라고
生覺하는지에 對해서까지도 렌즈의 支配를 許容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러한 生覺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의
危險性을 볼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言語의 錯覺으로부터 自由로워지면서, 당신은 매일 나타나는 많은 言語의 렌즈들을 더욱 自覺하게 될 것이며,
또한 그것들 중에 어느 하나에 依해 規定되지 않게 될 것이다. 당신은 보다 더 全切論的인 自己 認識 모델을
選好하게 됨으로써, 特定한 認知的 렌즈에 密着된 것에서 벗어나나 自由로워지는 法을 배우게 될 것이다.
2. 수용 (기꺼이 허용함)
內面의 苦痛스러운 內容에 부닥칠 때, 우리는 늘 하던 方式대로 行하고 싶어 한다.
즉, 이를 調整하고 分類하여 除去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眞實은 우리 內面的 삶은 外部 事件과 전혀 같지
않다는 것이다. 受容은 一般的으로 苦痛은 이를 除去하려고 애쓸 때 오히려 더 增幅되고, 그 속으로 더
휘말리게 되며, 더 외상적인 것으로 變換된다는 槪念에 基礎한다. 苦痛과 싸우는 동안 당신의 삶은 옆으로
밀려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受容은 虛無主義的인 自己敗排를 意味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저 苦痛을 참고 견디라는
意味도 아니다. 이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우리가 意味하는 受容은 지금 여기 이 瞬間을 能動的이고 生生하게
끌어안는것이다. 우리들 大部分은 能動的인 形態의 受容을 거의 또는 전혀 訓練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말을 理解하기 힘들고, 지금 당장 이 말에 따라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지 말기 바란다.
3. 專念과 價値中心의 삶
心理的 問題들과의 鬪爭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삶을 다시 살기 始作할 수 있으려면
苦痛이 줄어들 필요가 있다고 믿으면서, 苦痛이 줄어들 때까지 삶을 留保한다. 그러나 실은 당신이 願하는 삶은
지금 이 瞬間부터 始作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이것은 쓸모없이 마음을 管理하려 애쓰기보다는,
진정 원하는 삶에 참여하는 쪽으로 轉換하는 過程을 의미한다. 그러면 아래 質問에 답해 보라
Q) 지금 당신은 자신이 영위하고 싶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Q) 당신의 삶은 당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가?
당신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삶을 살 수 있으며,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마음에서 빠져나와 삶 속으로 들어가는 法을 배워야만 한다.
(필자) ==> 人間이 有機體로 온 이상, 배고픔을 피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肉體의 限界가 있는 것처럼,
精神的으로 言語를 習得하여 使用하므로 이로 因한, 에고의 執着과 마음의 同一視 現狀과 같은 精神的 限界가 있다. 卽, 쉽게 말하면 누구나 어떤 것에 執着하고 어떤 것에 사로잡혀서 現在와의 接觸을 놓칠 수 있다.
2. 인간의 괴로움은 普遍的이다
우리는 定常的인 人間은 그대로 놔두면 幸福하며, 단지 이상한 역사나 잘못된 생물학적 素因 때문에 平和가
깨지는 것이라고 假定하지 않는다. 代身에 괴로움이란 定常的인 것이며, 마음의 平和를 만들어 내는 法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고 假定한다. 人間이 아닌 存在는 도저히 想像할 수 없는 많은 問題들을 人間이 안고
있다는 것은 눈여겨볼만하다.
당신이 모르는 한 가지 秘密이 있다. 당신도 괴롭고, 저들 또한 괴롭다. 우리는 모두 苦痛을 겪는다.
충분히 오래도록 산다면, 모든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喪失感을 經驗한다.
모든 개인은 육체적 고통을 느낀다.
우리 모두는 슬픔, 수치감, 불안, 두려움과 상실감을 느낀다.
우리 모두에게는 당황스럽거나 수치스럽거나 모욕적인 記憶이 있다.
우리 모두는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苦痛스러운 秘密을 간직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강아지를 발로 차면, 강아지는 깨갱거리며 도망칠 것이다. 만일 당신이 規則的으로 강아지를
차면, 강아지는 급기야 당신이 다가오는 사소한 조짐만 보여도 공포와 회피 행동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보이지 않고 다가오지 않으면, 강아지는 불안을 느끼거나 회피행동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경우는 이와 사뭇 다르다.
言語的인 人間은 한 方向으로 學習한 關係를 가지고 두 개의 方向을 유추한다.
언어적 능력은 인간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였다. 어떤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그 이름을 지닌 對相이 떠오르게 된다. '우산' 이라는 單語를 읽을 때, 당신에게 어떤 生覺이 떠올랐는가? 물론 이런 生覺은 전혀 해롭지 않다. 그러나 만일
이름을 부른 對相이 무서운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 이름을 想起시키는 어떤 것도 두려움을 일으킬 것이다.
이는 마치 實際로 발로 차는 것이 아니라 찰 것이라는 生覺이 개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처한 상황이다. 이것이 言語를 가진 모든 인간이 처한 바로 그 狀況이다.
言語的 人間이 한 方向으로 학습한 관계를 가지고 두 方向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어떤 것을 다른
무엇에 대한 象徵으로 취급할 수 있는 能力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는 어떻게 苦痛을 피할지 안다.
즉, 당신과 당신 발자국 소리만 피하면 된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에 언제 어디서나 苦痛과 連關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마음속에 苦痛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苦痛을 피할 수 있단 말인가?
人間의 境遇 言語的 關係를 誘發하는 임의적인 단서만 있어도 힘든 感情이 떠오를 수 있기 때문에,
心理的 苦痛에 對한 狀況的인 단서를 피한다고 해서 힘든 感情을 除去하는데 成功할 수는 없는 것 같다.
苦痛을 廻避하는 어떤 方法들은 그 自體로 病理的이다. 예컨대, 해리나 불법 약물의 복용은 일시적으로
苦痛을 줄여주지만, 苦痛은 前보다 더 甚한 水準으로 되돌아오며 후유증도 심각하다.
否認이나 學習된 無感覺 또한 苦痛을 減少시키지만, 곧 훨씬 더 큰 苦痛이 뒤따를 것이다.
(필자) ==> 이 명제를 들으면, ‘人生은 苦海다‘ 라고 선언한 붓다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原來 이곳은 괴로운 곳이고 肉體의 限界와 精神프로그램의 限界로 因해서 誤謬와 失手 투성이다.
그리고 生老病死와 精神的 慾情, 慾心, 執着등으로 因한 苦痛이 늘 發生한다.
이러한 苦痛의 中心에는 執着하려는 마음이 있으며, 이 마음과 同一時하지 않는 것이 核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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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에크하르트 톨레의 글 “지금 이 瞬間을 살아라” 글에서 인용
(필자) ==> 아래는 에크하르트 톨레가 깨어있기에 對한 生覺을 整理한 내용을 引用한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저자와 글의 분위기와 내용이 다른 것을 이해바라며, 가급적 원문을 그대로 실으려
했습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今世紀 最高의 賢者 중 한명으로 꼽히는 사람이므로 한번 잘 吟味해보세요
1) 眞情한 存在狀態
- 無數한 形態의 生命體 너머에는 永遠한 '오직 하나의 生命'이 자리합니다.
우리들 안에는 이러한 '永遠한 生命'이 깃들어 있습니다.
- 生覺이 停止되었을 때만 (無心의 狀態) 그 本質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우리 自身, 우리의 眞情한 本質에 接近할 수 있습니다.
2) 마음(생각)은 내가 아니다.
- 우리는 마음을 우리 자신과 同一視함으로써 眞情한 本質을 經驗하지 못한다.
우리 自身의 眞情한 本質은 內面의 고요한 世界와 一致한다.
갖가지 生覺을 헤아리면서 그런 生覺들을 '나'라고 錯覺하기 때문에 거짓된 自我가 만들어지고
두려움과 苦痛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입니다.
- 自身을 마음과 同一視하면 보이지 않는 障幕이 생겨나 固定觀念에 사로잡히게 되고, 말이나 이미지를
曲解하고 자기 나름의 判斷을 내리게 되므로 眞情한 關係를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3) 깨달음이란?
- 깨달음이란 萬物의 배경을 이루는 '하나'의 狀態에 머물러 全切性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平和로운 상태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깊은 곳의 自我와 하나 될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物質化된 世上 속의 生命力과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안팎으로 일어나는 苦痛과 계속되는 갈등의 끝일 뿐 아니라 멈출 줄 모르는 生覺의 끝이기도 합니다.
- 깨달음을 向한 旅程에서 가장 重要한 段階는 마음을 自己 自身과 同一視하지 않는 法을 배우는 것입니다.
마음의 흐름 속에서 어떤 틈새를 만들 때마다 意識의 빛은 점점 더 밝아집니다.
4) 생각하는 者를 지켜본다.
- 우리의 머리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야 말로 당신 自身의 가장 큰 敵입니다.
당신의 머릿속에는 대개 自己 自身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처벌하여
活力을 앗아가는 고문도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불행과 고통
疾病이 생겨나는 理由도 여기에 있다.
- 가급적이면 자주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始作하십시오.
낡은 축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오랜 세월 되풀이해서 들려왔던 思考 類形에 特히 注意를 기울이십시오.
이것이 내가 '生覺하는 자를 지켜보라'는 意味입니다.
-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는 아무런 見解도 갖지 말고 그저 듣기만 하십시오.
아무런 判斷도 하지 말고 비난을 퍼붓지도 마십시오.
판단을 하거나 비난을 하면 똑같은 목소리가 뒷문을 통해 다시 들어오는 셈입니다.
- 목소리가 들리면 '아 목소리가 들리는 구나'하고 알아차리기만 할 뿐, 거기에 끼어들지 않고
'여기'에 남아 그저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5) 무심의 상태 (생각하는 者를 지켜봄)
- 生覺에 注意를 기울이게 되면, 당신은 그 生覺뿐 아니라 그 生覺의 목격자인 自身 또한 意識하게 됩니다.
새로운 次元의 意識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당신을 점령하고 있던 生覺은 힘을 잃고 재빨리 자리를 피합니다.
- 生覺이 자리를 비키면 당신은 生覺의 흐름이 끊어지는 經驗을 하게 될 것입니다.
'無心'의 틈새를 經驗하는 것입니다. 이 틈새가 처음에는 몇 秒에 지나지 않겠지만 점차 길어질 겁니다.
무심의 틈새를 경험할 때, 당신은 內面의 고요와 平和를 느끼게 됩니다.
6) 無心의 상태 (지금 이 瞬間에 集中함)
- 生覺하는 자를 지켜보는 代身 단순히 지금 이 瞬間에 注意를 集中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흐름 속에 틈새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단지 지금 이 瞬間을 確固하게 意識하기만 하면 됩니다.
- 마음의 움직임으로부터 우리의 意識을 거두어들여서 注意를 集中하고 예민하게 깨어 있음으로써
無心의 틈새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 단지 日常的인 活動에 目的을 附與하고 거기에 最大限 注意를 集中함으로써 그 自體가 目的이 되도록
하십시오. 집이나 직장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 그 계단 하나하나에, 걸음을 옮겨놓는 동작 하나
하나에, 들이쉬고 내쉬는 呼吸 하나하나에 注意를 集中하십시오. 온전히 지금 이 瞬間에만 存在하십시오
7) 에고에 대한 설명
- 人間은 成長함에 따라 個人的이고 文化的인 條件에 基礎해서 自身이 누구인가에 對한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거짓된 自我를 '에고'라고 합니다. 에고는 마음의 活動으로 이루어지며 끊임없는 生覺을
通해서만 維持될 수 있습니다. 에고라는 用語는 사람에 따라 意味가 다를 수 있겠지만 내가 그 말을
使用할 때는 無意識적으로 自己 自身을 마음과 同一視함으로써 創造된 거짓된 自我(假我)를 뜻합니다.
- 에고에게는 現在의 瞬間이 存在하지 않습니다. 過去와 未來만을 重要하게 여길 뿐입니다.
에고로 存在하는 限 우리의 마음은 不作用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 에고는 恒常 過去에 執着하고 過去를 살아 있게 하려고 합니다. 過去가 없으면 自身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고는 또한 스스로를 未來에 投射함으로써 繼續的인 生存을 保障받으려 하고
거기에서 어떤 解放이나 滿足感을 얻으려고 합니다.
8) 무심의 상태와 창조력
- 無心이란 生覺의 헤아림이 없는 意識 狀態입니다. 우리는 그런 方式으로만 創造的으로 生覺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生覺은 그런 상태에 있을 때에만 진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죠.
生覺은 自己보다 훨씬 더 廣大한 意識 領域에 連結되어 있지 않으면 어느새 힘을 잃고, 혼란에 빠지고
破壞的이 됩니다. 진정한 예술가들의 창조력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無心의 場所로부터, 고요한 內面으로
부터 나옵니다. 마음은 창조적인 충동이나 통찰에 形像을 附與할 뿐입니다. 위대한 과학자들도 生覺이
멈춘 瞬間의 고요한 狀態에서 창조적인 突破口가 열렸다고 말해 왔습니다.
自動化된 마음에서 벗어나기 - - 깨어있기
Q1) 당신은 현재 자동화된 마음에서 살아가십니까? 깨어 있으십니까? 당신의 깨어있는 정도를 기술해주세요
Q2) 당신은 자신의 의식을 깨어있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Q3) 생각하는 자를 지켜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Q4) 지금 이 순간, 마음이 일으키는 고통의 생각을 바라보면서, 알아차릴 수 있고, 또한 그 생각을 내려놓고 내가 원하는 삶의 내용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Q) 당신이 알아차리고 깨어서 바라봐야할 생각은 무엇입니까? Q) 그 생각이 일어남을 수용한 후, 당신이 전념해야 할 가치로운 행동은 무엇입니까?
Q5) 당신이 다음 한 주 동안 집중해서 노력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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