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 과연 세종대왕의 비밀 업적인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로 손꼽히는 한글. 세종대왕이 한글창제를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분명하지만 한글의 기원이나 문자를 만드는데 기여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의문점이 남아있다.
본지가 한글날 558돌을 기념한 특별취재에 따르면
훈민정음 보급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혜각존자 신미(信眉, 1405?~1480?)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에도 깊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밝혀졌다.
신미대사는 세종과 문종의 여러 불사를 도왔을 뿐 아니라 세조가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전을 번역, 간행했을 때 이를 주관하는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특히 『석보상절』의 편집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2300여 쪽은 이르는 방대한 양의 『원각경』을 비롯해 『선종영가집』,
『수심결』, 몽산 등 고승법어를 훈민정음으로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따라서 만약 신미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오늘날 전하는 상당수 한글문헌은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도 크게 기여했을 거라는 주장이 다양한 측면에서 제기되고 있다. 먼저 세종대왕과의 관계다. 비록 신미대사가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세종이 죽기 5년 전인 세종 28년(1446)이지만 그 관계가 대단히 친밀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죽기 몇 달 전 신미대사를 침실로 불러 신하로서가 아닌 윗사람의 예로 신미대사를 대하고 있으며, 당시 신미대사가 머무르던 속리산 복천암 불사를 지원하고, 대사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렸다. ‘존자’라는 명칭이 큰 공헌이나 덕이 있는 스님에게 내리는 칭호고, 더구나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祐國利世)’는 문구를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공이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승려인 신미대사가 집현전 학사였다는 기록은 조선사에서 유학자들에 의해 삭제 되었지만, 영산 김씨 족보에 ‘수성(신미대사)은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활동했으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신미대사의 친동생이자 독실한 불자였던 김수온이 한글창제 이전에 이미 중앙에 진출한 상태였다는 점도 이와 관련된다는 가설의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는 불교의 신성 숫자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훈민정음 창제 당사자들은 새로운 문자의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불교를 보급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이 사업을 진행했다.”(김광해 서울대 교수) “방대한 양의 불경이 한글이 창제 된지 얼마 안 되는 기간에 한문본이 편찬되고 번역까지 됐다. 이는 한글 반포 이전부터 불경에 정통하고 있었으며, 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의 운용법과 표기법에 통달하고 있던 인사들이 있어서 이 사업을 추진했다는 증거다.”(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 같은 기존 학자들의 주장도 그 당시 대표적인 학승이었던 신미대사를 상정할 경우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특히 얼마 전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한글 기원은 고려불경의 각필부호”라는 학설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는 견해가 많다.
지난 30년째 신미대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오고 있는 복천암 주지 월성 스님은 “억불숭유의 시대로 말미암아 신미대사의 공헌은 철저히 가려지고 삭제될 수밖에 없었다”며 “이제라도 그 분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신미대사는?
신미대사는 부친이 태종 때 정승까지 지낸 양반 가문인 까닭에 입산 전 유학 경전을 섭렵할 수 있었으며 출가 후에는 대장경에 심취했다. 그러나 한문 경전이 마음에 차지 않아 범어와 티베트어를 직접 공부하기도 했다. 특히 세종, 문종, 세조 때에는 경전번역 등 불사를 이끌었으며 예종이 불교탄압하려 할 때는 언문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한글창제와 숫자의 비밀
어느 종교건 특정 숫자를 신성시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불교는 유독 그런 성향이 강하다. 심지어 0에서 무한대에 이르기까지 숫자를 불교적으로 해석한 『대명법수』라는 책이 나올 정도다. 이런 가운데 훈민정음 창제가 백성들의 문자 생활의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한 표면적인 목적 외에도 불교를 보급하고자 하는 은밀한 목적을 가지고 이 사업을 진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울대 국문과 김광해 교수의 ‘훈민정음과 108’론이 바로 그것이다.
김 교수는 그동안 『한글창제와 불교신앙』(불교문화연구 제3집) 등 일련의 논문을 통해 창제 과정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불교의 대표적인 신성수 ‘108’과 관련된 여러 증거들을 제시하는 한편 그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 당사자들의 의도적인 조절임을 주장했다.
김 교수가 먼저 주목한 것은 ‘나랏말싸미듕귁에달아…’로 시작하는 한글 어지(御旨)와 ‘國之語音異乎中國…’로 시작되는 한문 어지다. 한글은 모두 108자고 한문 어지는 108의 꼭 절반인 54자로 이루어져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김 교수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더부러’ 등을 고의적으로 누락하는 등 적어도 4글자 이상이 탈락됐다는 것이다. 또 한문 어지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而己矣’를 사용하지 않고 ‘耳’를 사용하고 있는 등 글자의 수를 맞추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담겨 있음도 함께 지적했다.
훈민정음 창제과정에 나타나는 숫자의 비밀은 비단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김 교수는 108글자의 세종 어지가 실린 『월인석보』 제1권의 장수(張數)도 108쪽임도 밝히고 있다. 특히 다른 권들과는 달리 일련의 이야기를 중간에 잘라 별도의 권으로 만들면서까지 쪽수를 맞추고 있다는 것. 또 현재 국보 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의 경우 불교적인 우주관을 상징이라도 하듯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김 교수는 이들 경우 외에 다양한 사례를 하나하나 제시하며 “훈민정음의 창제 당사자들이 이렇듯 일련의 주도면밀한 노력을 은밀히 기울인 것은 불교 보급의 목적이 담겨 있다”며 “그러한 종교적 염원이 숫자를 조절하는 은밀한 방법으로 나타났다”고 결론 맺고 있다.
실제 세종에서 연산군 때까지 발간된 훈민정음 문헌의 65%이상이 불교관련 문헌이며, 유교 문헌은 단 5%에도 미치지 못한다.
“왜곡된 한글창제 역사 바로잡아야”
30년간 신미 대사 자료 수집 복천암 주지 월 성 스님
“한글 창제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신미 대사가 역사 평가에서 가려져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조선 초 뛰어난 학승 신미 대사의 비밀을 밝혀냄으로써 한글 창제와 관련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을 것입니다.”
지난 30년 간 신미 대사의 자료 수집에 전념해온 속리산 복천암 주지 월성 스님은 “신미 대사는 한글창제의 결정적 영향력을 끼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학자들의 그릇된 사관으로 한글창제의 배경과 과정이 왜곡돼 있다”며 “신미 대사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틴?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75년 사형인 탄성 스님의 권유로 복천암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월성 스님은 이 때부터 신미 대사에 관한 자료 수집에 천착했다. 신미 대사와 관련된 각종 기록을 발굴 정리하는가 하면 조선왕조실록을 열람한 것도 수십 차례. 스님은 신미 대사의 기록을 복원하는 것에 모든 것을 걸었다. 신미 대사의 기록을 복원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님이 신미 대사에 관한 자료 수집이 계속될수록 풀리지 않은 숙제가 남아 있었다. 당시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던 조선 초기에 어떻게 신미 스님이 집현전에 들어갔으며 한글 창제에 참여할 수 있었는가가 그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복천암을 찾은 영산 김씨의 한 후손으로부터 신미 대사와 관련된 족보와 대사의 친동생 김수온이 썼다는 『복천보장』을 전달받고 스님은 이 같은 의문을 하나씩 풀어갔다.
“신미 대사에 대한 기록이 전무해 스님이 어떤 인물인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산 김 씨의 족보에 신미 대사는 태종 때 영의정까지 지낸 귀족가문 출신이며 범자에 능통한 분이었다는 기록을 보고 신미 대사에 가졌던 의문을 하나씩 밝혀나갔습니다.”
스님은 『복천보장』과 영산 김 씨의 족보를 통해 신미 대사는 한학에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범서 장경에도 능통한 학승으로 집현전에 초빙돼 한글 창제에 임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스님은 또 한글의 모음과 자음이 범어 글자와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 한글창제를 주도적으로 이끈 인물은 당시 범어에 가장 능통했던 신미 대사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특히 스님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이후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을 지었고, 『능엄경』, 『원각경』등 총 28종의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했다는 것은 불교에 대한 깊은 식견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한글 창제의 배경에 신미 대사가 제외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스님은 또 이 같은 한글 창제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신미 대사가 후대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당시 숭유억불이라는 강력한 통치이념을 추진했던 시대적 분위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스님은 “실록에 의하면 세종대왕이 신미 대사에게 ‘선교도총섭밀전정법지비쌍운우국이세원융무애혜각존자’라는 내리자 수많은 유생들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는 이후 문종 대까지 계속된다”며 “이런 이유로 한글창제를 주도했던 신미 대사가 역사적으로 가려지게 된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스님은 “이제는 신미 대사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뤄져야 할 때”라며 “왜곡된 신미 대사에 대한 기록을 복원하고 이를 통해 한글 창제의 역사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집현전 학자들 한글창제 무관”
훈민정음에 대한 오해
한글창제는 지금까지 신숙주와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의 명을 받들어 만들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인 통념이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이후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창제를 주도했다는 이론은 설득력이 없는 쪽으로 굳혀지고 있다.
한글창제 이후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이 집현전 학자들이며, 당시 집현전 부제학으로 실무담당을 맡고 있던 최만리를 비롯해 신석조, 김문, 정창손 등조차 “굳이 언문을 만들어야 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재상에서 신하들까지 널리 상의한 후 후행해야 할 것인데 갑자기 널리 펴려 하니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다”고 상소를 올리는 것 등의 정황으로 볼 때 집현전 학자들이 돕기는커녕 몰랐던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1443년 12월 세종대왕이 한글창제를 선언할 때까지 얼마나 철저하게 비밀리에 추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성삼문은 한글이 창제될 무렵에 집현전에 들어왔고, 신숙주는 창제 2년 전에 들어왔지만 그 다음해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관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실록에도 전혀 그런 말이 없다. 잘못된 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세종께서 이런 사실을 알면 통탄할 것”이라는 여증동 경상대 국문과 명예교수의 말처럼 집현전 학자 창제설은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따라서 이들 집현전의 소장 학자들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세종의 명을 받들어 훈민정음의 보급에 앞장섰을 뿐이다.
“집권 초 억불…중반이후 호불로 전향”
세종대왕과 불교
태종에 이어 1418년 즉위한 세종은 강력한 유교 통치 이념을 바탕으로 즉위 초기 배불(排佛)에 앞장섰다. 불교를 약화시키기 위해 7개 종파를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하는가 하면 “불교를 점진적으로 제거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은 공적으로 유교를 내세웠지만 사적인 부분에서는 초기부터 불교에 대한 애정이 나타난다. 집권 초 사찰의 건립 보수에 앞장섰는가 하면 왕실불교를 일으키는데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였다.
세종은 또 정권 중후반기인 즉위 20년 무렵 친불교적인 성향을 본격화하면서 조정 대신들과 불교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집권말기에 이르러서는 왕실에 내불당을 건립(즉위 30년)하는 등 적극적인 호불(好佛)정책을 추진했으며 반발하는 대신들에 대해 오히려 강력히 제지하기도 했다.
실제 세종 즉위 28년 3월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대군들이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경을 편찬하겠다고 하자 이를 공식적으로 허락한다.
그러나 당시 우부승지 이상철, 좌승지 황수 신 등이 중심이 된 조정 대신들과 전국의 많은 유생들은 세종대왕의 불교 신봉을 비판하는 상소를 잇따라 제기했다. 그러나 세종은 “경들은 고금의 사리에 통달해 불교를 배척하니 가히 현신(賢臣)이라 이를 만하다. 나는 의리(義理)를 몰라 불법을 믿고 있으니 가히 무식한 임금일 것이다.…이제 그대들의 뜻을 훤히 알겠으니 번거롭게 다시 청하지 말라.”며 대신들을 비꼬기도 했다.
세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불교가) 공자의 도(道)보다 낫다고 하는 것을 주자가 잘못됐다고 했으나 이는 석가모니를 잘 몰라서이며, 천당지옥·사생인과는 명확한 이치가 있으며 결코 허탄(虛誕)한 것이 아니다”라며 불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기도 했다.
이 같은 세종의 자비와 지혜가 결국 뭇백성들의 눈을 뜨게 한 글을 만들었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이 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권오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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