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풍경소리 http://www.pgsori.com/
법성게(法性偈)
初發心이 곧 정각(正覺)
초발심시변정각 (初發心時便正覺)
처음 마음을 發할 때 곧 正覺을 이룬다.
처음 發心한 그것이 變치 않고 그대로 있으면 곧 부처의 境地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이 子息에게 느끼는 마음이 있지요?
내 자식이라면 밥 먹는 밥상에 올라와서 그릇을 엎고
옆에서 똥을 싸도 귀엽기만 합니다.
부모가 子息에게 갖는 그 마음이 모든 사람을 對할 때도 똑같다면
바로 菩薩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앉아서 어떤 病院에서 팔십이 된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사람은 살다가 다 죽기 마련이지."하고 담담하게 生覺합니다.
그것이 내 어머니에게도 그대로 適用되면 그런 사람은 道人입니다.
마음에 일어난 것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適用되고 모든
時間帶에 같이 適用된다면 우리의 일어나는 마음이 곧 부처 마음입니다.
그런데 問題는 우리 生覺이 一貫性 없이 수시로 왔다갔다 한다는 것이죠.
"어머니가 죽어서 울었어요"
"왜 울어요?"
"사람이 죽었는데 슬프잖아요?"
"사람이 죽으면 슬퍼요?"
"아, 죽으니까 슬프죠."
"당신, 사람이 죽으면 恒常 슬픕니까?"
"조금 差異는 있지만 그래도 슬픈 일이죠."
"지난 번에 김일성이 죽었다 할 때는 어땠소?"
"기뻤죠."
"사람이 죽었는데 기뻐요?"
또 다른 側面에서 보면 初發心이란 出發이고 正覺은 끝이라 해서,
`初發心是 便正覺`이란 始作과 끝이 '둘이 아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많은 콩을 거두기 위해 콩 하나를 땅에 심습니다.
이 때 그 콩을 "씨앗"이라 하고, 後에 열매를 맺으면 이것을 "열매"라 불러요.
그러니까 씨앗은 始作이고 열매는 끝이라 할 수 있겠지요.
卽, 같은 콩을 한 사람은 "씨앗"이라 하고 한 사람은 "열매"라 합니다.
境界를 그으면 씨앗이 되고 열매가 되고 시작이 되고 끝이 되지만,
境界가 없으면 그건 씨앗도 열매도 아니고, 시작도 끝도 아닙니다.
이를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하지요.
시작이니 끝이니 하는 것은 다 分別心에서 나온 말입니다.
分別하지 않으면 시작이니 끝이니 創造니 終末이니 하는 것이 없으며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것도 따로 없어요.
分別이 끊어진 世界에서 본 無境界를 이야기한 것이지요.
생사열반 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생사와 열반이 調和를 이룬다는 것은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生死의 世界와 涅槃의 世界는 正反對인데, 이것이 둘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擴大하자면 分別이 끊어지면,
煩惱와 菩提가 둘이 아니고,
부처와 중생,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니며,
眞俗, 사바세계와 정토세계가 둘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이(理)와 사(事)의 境界가 사라져서 分別이 없다.
법계(法界)라 하면 一切의 存在가 各者 그 役割을 지켜 서로
엇갈리거나 뒤섞임 없이 雜多한 가운데서도 秩序 整然하게
調和를 유지하면서 緣起하고 있는 宇宙 萬法의 世界를 가르키는 말이지요.
그래서 '法界'란 事實 '하나'여서 여러 개가 있을 수 없지만,
華嚴經에는 이'하나'인 '法界'을 哲學的으로 네 가지로 分類했어요.
사법계(事法界), 이법계(理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인데,
이렇게 넷으로 區分해서 보는 것을 사법계관(四法界觀)이라 합니다.
그럼, 事法界란 뭐냐?
差別 現相界의 立場에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언뜻 보기엔 같아 보이는 구더기 한 마리 한 마리도 自細히 보면
그 생긴 모양이 다 다르고, 江 가에 있는 모래가 수없이 많지만
가서 比較해보면 그 크기와 모양, 성분이 다 다르고,
밭에서 나는 고추도 빛깔과 모양이 다 다릅니다.
바다에 일어나는 수많은 波濤가 있지만
그 파도 모양과 일어났다 사라지는 壽命도 全部 달라요.
그래 만법(萬法)이라 하는데 이런 世界를 "사법계(事法界)"라 합니다.
그런데 파도 하나하나를 볼 때는 各 파도가 수없이 생기고 사라지지만,
바다 全切를 보면 바다물이 그냥 출렁일 뿐 파도가 생기고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또 아이들 눈에는 물이 얼음이 되었을 때, 얼음이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事實은 물이 얼음으로 그 모양만 變했을 뿐이지, 거기에는
따로 얼음이 생긴 게 아니지요.
그러니까 이 宇宙森羅萬相은 根源으로 돌아가 보면 다 '한 가지 모양'이예요.
그래서 만상(萬相)은 일상(一相)이고, 만법(萬法)은 일법(一法)이라고 하지요.
이 '하나'의 세계를 '이(理)의 세계'라 하는 겁니다.
根本으로 돌아가면 結局 理致는 '하나'다.
그러니까 사(事)의 世界가 虛相인 속제(俗諦)라면,
이(理)의 世界는 實相인 진제(眞諦)가 된다고 말할 수 있겠죠.
이런 世界를 "이법계(理法界)" 라 합니다.
그런데 虛相은 實相을 떠나서 나타나는 게 아니지요.
고요한 바다에서 파도가 일고 파도가 가라앉으면 고요한 바다가 된다.
바다와 파도가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水波不二).
卽, 眞諦와 俗諦가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무의 根源을 따지면 나무 뿌리에서 나뭇잎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하나의 줄기에서 수많은 나뭇잎이 나와요.
그러나 事實은 나뭇 잎 때문에 뿌리와 가지가 생성되는 것 이라서
잎이 뿌리를 만든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嚴密히 말해서 둘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이사(理事)가 무애(無碍)하다,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니다(理事無碍法界)라고 말합니다.
差別 現相界를 "색(色)"이라 하고 차별 현상계의 本質을 "공(空)"이라 말하는데. 이 空과 色이 둘이 아닌 세계를, 卽 `色卽是空의 세계`를 `理事無碍法界`라 합니다.
그러면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란 뭐냐?
差別 現相界 사이에서 걸림 없이 오가는 것을 말합니다.
本質에서 現相이 드러나고 現相에서 本質로 가는 데 걸림이 없는 것을
理事無碍라하고, 差別現相界에서 걸림 없이 오가는 것을 事事無碍法界
또는 화작(化作)이라고도 합니다.
比喩하면, 파도 치는 바다에 배 타고 놀러 나갔다가 큰 파도와 風浪으로
배가 뒤집혀서 물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살려달라고 아우성 치는 것이
事法界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라면,
방파제를 단단하게 치고 그 안에서 배타고 노는 것이
理法界에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理事無碍法界에 있는 사람은 넓은 바다에 나가서 바람과 파도를 利用해서
배를 타요. 파도를 떠나지 않고 그 파도 위에서 노는 겁니다.
그럼 事事無碍法界에 있는 사람은 어떠냐?
파도를 타고 즐기다가 어쩌다 물에 빠져요. 그러면 失手를 했느냐? 아닙니다.
물에 빠진 김에 물밑으로 내려가서 眞珠조개를 주워옵니다.
事事無碍法界에 있는 사람에게는 물에 안 빠져야 된다는 觀念마저도 없습니다. 물 속에 빠지면 빠진 대로, 물 위에 있으면 물 위에 있는대로 언제나 좋은 일이 있어요.
이사(理事)가 명연(冥然)하여 分別없다는 것은 이런 마음의 世界를 말합니다.
- 법륜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