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그대 안의 붓다에게 절한다

장백산-1 2013. 8. 6. 12:49

 

 

 

[그대 안의  붓다]

 

 

고귀하고 성스러운 지혜의 완성자에게 귀의합니다.
거룩한 분이며 보시사트바인 관세음(觀世音)께서는 피안에 이른
지혜의 깊은 과정 속에서 움직이고 계셨다.
그가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오온(五蘊)이 있을 뿐이었으며,
그 오온(五蘊)의 자성(自性)이 공(空)하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대 안의 붓다에게 절한다.

그대는 미처 모르고 있겠지만, 꿈에도 生覺해본 적이 없겠지만, 그대는 붓다이다.

우주만물 일체가 붓다/佛性  以外의 다른 存在가 될 수 없다.

불성(佛性)은 붓다는 그대 存在의 本質的 核心이다.

佛性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이다.

그대는 佛性으로부터 나왔다.

佛性은 源泉인 同時에 目的이다.

우리는 佛性으로부터 와서 佛性으로 되돌아간다.

이 '佛性'이라는 하나의 낱말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佛性은 삶이라는 원(圓)을 완결짓는다.

佛性은 알파(alpha)에서 오메가(omega)까지 一切를 包括한다.

 

 

그러나 지금 그대는 깊이 잠들어 있다. 그대는 自身이 어떤 存在인지 모른다. 그대가 붓다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대 自身이 이미 붓다라는 事實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그대自身의 源泉으로 되돌아가면 그뿐이다. 그대自身의 內面을 들여다 보기만 하면 된다. 自身의 本來面目과 直面하면 佛性이 드러날 것이다. 그대가 自身의 本來面目을 보게 되는 날, 온 宇宙全切가 깨달음을 얻는다. 特定한 한 個人이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한 個人이 깨달을 수 있겠는가? 特定한 '한 사람'이라는 槪念 自體가 깨닫지 못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나'가
깨닫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기에 앞서 '나'가 떨어져 나가야 한다. 그러니 어떻게 '나'가 깨달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터무니없는 生覺이다. 내가 깨닫는 날 宇宙 全切가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의 瞬間 以後로 나는 붓다 以外의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이 世上 모든 것이 수 많은 形態와 이름을 갖고 있으며 수많은 問題를 안고 있지만 그들 모두가 붓다라는 事實에는 變함이 없다.

 

宇宙森羅萬相이 붓다 外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 안의 붓다에게 敬儀를 표한다. 여기

이렇게 많은 붓다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을 보니 참으로 기쁘다. 그대가 내가 있는 이 곳으로 왔다는 事實 自體가 그대自身의 佛性을 깨닫는 出發点이다.

 

그대의 가슴 속의 자리잡은 나에 대한 尊敬과 사랑은 그대自身의 佛性에 대한 사랑과 존경 外에 다른 것이 아니다. 나에 대한 信賴는 그대 外部의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곧 그대自身에 對한 信賴이다. 나를 信賴함으로써 그대는 自身을 信賴하는 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옴으로써 그대는 그대自身과 가까워질 것이다. 이미 있는 것을 認識하기만 하면 된다. 다이아몬드는 이미 거기에 있다. 다만 그대가 잊고있을 뿐이다. 또는 애초부터 그 다이아몬드에 대해 전혀 生覺도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여기 에머슨(Emerson)의 유명한 말이 있다.
"인간은 몰락한 신이다."

나는 한편으로는 이 말에 동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洞察力에는 어떤 眞理가 담겨 있다.
그것은 人間이 本來 제 모습 그대로 存在하지 않는다는 眞理이다. 이 말에는 분명히 洞察力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다소 전도(顚倒)되어 있다. 人間은 歿落한 神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는 神이다. 人間은 움트고있는 붓다이다.
싹은 진작부터 存在했으며, 이 싹은 언제라도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 다만 얼마간의 노력, 약간의 도움만 있으면......이 도움이 애초에 없었던 것을 새로이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다! 그대의 노력은 다만 그것을 드러내는 일에 불과하다. 이미 거기 감춰져 있던 것을 밝혀낼 뿐이다. 이것은 發明이 아니라 發見이다.  眞理는 이미 거기에 있다. 眞理는 永遠한다.

 

 

이 경문(經文)들을 注義깊게 들어라. 이 經文들이야말로 불교 문헌 중에서 가장 重要한 것이다. 그래서

이 경문들은 심경(心經;The Heart Sutra)이라고 불려진다. 이 경전은 불교의 가르침 중에 心臟腑인 것이다.

나는 아주 처음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이 지점에서부터 출발해야 불교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대 自身이 붓다라는 事實을 가슴 깊이 새겨라. 어쩌면 이 말이 뻔뻔하게 들리거나 허무맹랑한 가설(假說)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대는 이 말을 전적으로 믿기가 힘들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대가 붓다라는 이 事實을 하나의 씨앗으로 그냥 놔두어라. 이 事實을 둘러싸고 많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이 事實을 中心으로 삼아야만 비로소 그대는 이 경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전에 실린 경문들은 말할 수 없이 强力하다. 아주 簡潔하고 含縮的이지만 씨앗과 같은 潛在力을 간직하고 있다. 그대가 붓다라는 事實을, 싹트고있는 붓다라는 事實을 하나의 土壤으로 삼아라.

 

 

그대가 生成되어가는 存在로서 어머어마한 潛在力을 품고 있다는 事實을 가슴 깊이 새겨라. 아무 것도

缺如된 것이 없다. 이미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은 다만 理致에 맞게 整理하는 것 뿐이다. 조금 더 많은 覺性과 意識이 必要할 뿐이다......寶物은 이미 거기에 있다. 그대는 內面의 집 안에 작은 등불 하나만 밝혀놓으면 된다. 일단 어둠이 사라지면 그대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니다. 그대는 붓다가 된다. 그대는 偉大한 皇帝가 된다. 왕국 전체가 그대의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선언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自身을 거지로 믿는다면 이런 선언은 불가능하다. 自身을 거지로 生覺하는 한 이 선언은 꿈조차 꿀 수

없다. 有史 以來 수 많은 聖職者들이 "너는 거지이다. 너는 無知하다. 너는 罪人이다."라는 觀念을 注入시켜 왔다. 그대는 깊은 최면에 걸려버렸다. 이 최면 상태에서 깨어나야 한다. 이 최면 상태를 破壞하기 위해 나는 "그대 안의 붓다에게 절한다."는 말로 시작하는 것이다.

내게는 그대들 모두가 붓다이다. 이 基本的인 事實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깨달음을 얻으려는 그대의 모든 노력은 虛事이다. 그대는 이미 '그것'이다! 이런 理解를 묵시(默示)적으로 前提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出發点이다. 그렇지않으면 그대는 길을 잃을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출발점이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출발하라. 이런 관점이 "나는 붓다이다."라는 일종의 에고를 만들어낼까봐 염려하지 말라.
그런 걱정은 필요없다. 이 般若心經의 모든 句節이 에고가 存在하지 않는다는 事實을 分明하게 밝혀줄 것이다.
오직 에고만이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것은 實在한다.

 

世上은 幻像이며 靈魂만이 實在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오직 '나' 만이 眞實이며 다른 모든 것은 幻像이고 마야(maya)일 뿐이라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붓다는 正反對로 말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나'만이 虛僞이며 다른 모든 것은 實在이다. 나는 붓다의 관점에 同意한다. 붓다의 통찰력은 매우 예리하다. 가장 깊이 꿰뚫어보는 眼目이 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붓다의 통찰력을 능가하지 못했다. 그만큼 깊고 높은 次元을

꿰뚫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대는 붓다이다. 이런 觀点에서 始作하라. 그대 몸의 세포 하나하나, 마음 속의 모든 상념들이 이

事實을 宣言하게 하라. "나는 붓다이다!"라는 이 선언이 그대 存在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들게 하라.

그리고 '나'라는 에고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이 문제는 저절로 사라지게 되어 있다.

 

'나'와 불성(佛性)은 共存할 수 없다. 佛性이 드러나면 '나'는 자취를 감춘다. 불을 밝히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般若心經의 경문으로 들어가기 前에 약간의 구조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고대의 불교 경전은
일곱 가지의 寺院에 대해 말한다. 수피(Sufi)들이 일곱 개의 골짜기를 언급하고, 힌두교에서 일곱 개의 차크라(Chakra)를 말하는 것과 같다.

 

첫번째 사원은 肉體의 사원,

두번째는 心理-身體(psycho-somatic)의 사원,

세번째는 心理學的(psychological) 사원,

네번째는 心理-靈的(psycho-spiritual)인 차원,

다섯번째는 靈的(spiritual)인 사원,

여섯번째는 靈性-超越의(spiritual-transcendental)의 사원이다. 그리고

일곱번째로 窮極의 사원, 사원 중의 사원은 超越(transcendental)의 사원이다.

 

이 般若心經은 일곱번째 사원에 해당한다. 이 경전은 일곱번째 사원에 든 자, 超越的이고 絶對的인 境地에

오른 者의 宣言이다. 이것이 '프라즈나 파라미타(prajna-paramita)'라는 산스크리트어(語)의 의미이다. 프라즈나 파라미타, 卽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超越의 世界에 대한 智慧, 저 피안(彼岸)의 境地로부터 온 智慧이다. 이 智慧는 모든 種類의 동일시(同一視)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可能하다. 낮은 것이나 높은 것,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을 막론하고 모든 同一視에서 벗어났을 때, 결코 아무 것에도 同一視되지 않을 때 이 智慧가 찾아온다.

覺性의 불꽃이 煙氣조차 없이 純粹하게 타오를 때 般若波羅蜜多라는 智慧가 찾아든다. 이런 까닭에 불교인들이 이 아주 작은 경전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불교인들이 이 경전을 心經(The Herat Sutra)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때문이다. 이 경전은 종교의 核心, 종교의 心臟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첫번째 肉體의 사원은 힌두교에서 말하는 물라다르 차크라(muladhar chakra)에 대응한다.

두번째 心理- 身體의 사원은 스바디스탄 차크라(svadisthan chakra),

세번째 心理學的 사원은 마니뿌라 차크라(manipura chakra),
네번째 心理- 靈的인 사원은 아나하타 차크라(anahatta chakra),

다섯번째 靈的인 사원은 비슈드하 차크라(vishudha chakra),

여섯번째 靈性- 超越의 사원은 아즈나 차크라(ajna chakra),

일곱번째 超越의 사원은 사하스라르 차크라(sahasrar chakra)에 對應한다.

'사하스라르'는 일천 장의 꽃잎을 가진 연꽃을 의미한다. 이 연꽃이 窮極的인 개화(開花)의 象徵이다. 감추어진 게 아무 것도 없는 狀態, 모든 것이 드러나고 현현(顯現)된 狀態이다. 일천 장의 꽆잎을 가진 연꽃이 활짝 피어났다. 하늘 全切가 이 꽃의 香氣와 아름다움, 그 祝福으로 充滿하다.

 

 

現代 世界는 人間의 가장 내밀(內密)한 核心을 探究하는 작업을 이미 시작했다.

이 현대의 노력이 어디까지 진전되었는지 알아보는 게 좋을 것이다.
파블로프(Pavlov)와 스키너(B.F.Skinner)를 비롯한 行動主義 心理學者들은 계속해서 肉體的 사원, 卽 물라다르

차크라의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 그들은 "인간은 육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첫번째 육체의 사원에 얽매여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오직 物質的 肉體를 통해서만 인간을 설명하려고 한다.

이런 태도는 올바른 이해를 가로막는 障碍가 된다. 그들은 좀더 高次元的인 領域에 대해 열려있지 않다. 애초부터 육체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斷定해 버리면 探究의 可能性 自體를 否定하는 것과 같다. 이런 態度는 偏見으로
굳어진다.

 

공산주의자, 막시스트(Marxist), 行動主義 心理學者, 無神論者들은 "人間은 肉體일 뿐."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 자체가 더 고차원적인 영역으로 가는 문을 닫아 버리고, 마침내 그들은 장님이 되고 만다.

물론, 物質은 分明히 存在한다. 물질은 가장 명백한 現狀이므로 굳이 증명할 필요도 없다. 物質的 肉體는 分明히 存在하므로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조차 없다. 그리고 증명할 필요도 없는 이유로 해서 肉體만이 唯一한 實體로 認定된다. 이것은 완전히 넌센스(nonsense)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모든 尊嚴性을 喪失한다.

 

成長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成長해 나아갈 수 있는 可能性이 없다면 삶에는 어떠한 尊嚴性도 있을 수 없다. 人間은 하나의 事物로 轉落한다. 이때 그대는 可能性을 向해 열려있는 存在가 아니다. 그대에게는 육체 이상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육체에 불과하다. 그대는 먹고, 배설하고, 섹스하고, 아기를 낳을 것이다. 이런 일을 되풀이 하다가 어느 날엔가 덧없이 죽을 것이다. 세속적이고 하찮은 일이 기계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그러니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떻게 시(詩)와 춤이 있을 수 있겠는가?

 

스키너는 [自由와 尊嚴을 넘어서:Beyond Freedom and Dignity]라는 책을 썼다. 그러나 이 책은 '넘어서'라는
말대신 [자유와 존엄성의 아래로:Below Freedom and Dignity]라고 불려져야 옳다. 이 책은 자유와 존엄성 이하의 관점을 나타내고 있다. 인간에 대해 가장 低次元的이고 醜惡한 觀点을 표방하고 있다. 이것을 명심하라.

육체에는 아무 것도 잘못된 게 없다.

나는 육체에 반대하지 않는다. 육체는 아름다운 사원이다.

다만 육체를 全部라고 여기는 그 生覺이 醜한 것이다.

 

 


人間은 일곱 개의 칸을 가진 사다리에 比喩될 수 있다. 그런데 그대는 첫번째 칸에 同一視된다. 이렇게 되면 아무데로도 나아가지 못한다. 사다리는 이 世上과 피안(彼岸)의 世界를 이어준다. 이 사다리는 物質과 神을 連結시킨다. 그러므로 사다리 全切와의 關係 속에서 使用되기만 한다면 첫번째 칸이라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다. 만일 이 첫번째 칸을 딛고 올라갈 디딤돌로 여긴다면 이것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일이다. 이때 그대는 肉體에 感謝를 表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다리의 나머지 여섯 부분을 잊고 오로지 첫번째 칸을 崇拜하기 시작한다면, 사다리 全切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첫번째 段階에 갇혀 버린다면, 이때부터 問題가 發生한다. 이때 그 칸은 더 이상 하나의 단계가 아니다. 하나의 段階는 다른 段階와 이어질 때에 限해서 段階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칸은 사다리 全切의 一部일 때에 限해서 칸이 될 수 있다. 만일 그것이 더 이상 칸이 아니라면 그대는 거기에서 막혀 버린다.


物質的인 사람들은 恒常 硬直되고 固着되어 있다. 그들은 恒常 무엇인가 缺如되어있다고 느낀다. 그들은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한다. 그들은 圓을 그리고 돌고있을 뿐이며 매번 같은 곳으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그들은 지치고 권태를 느낀 나머지 自殺을 生覺하게 된다. 그들의 뭔가 자극적인 것을 찾는데 血眼이 되어 있다. 뭔가 새롭고 신선한 일이 일어나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이런 式의 삶에 무슨 새로운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우리가 熱中하고 있는 모든 것은 장난감 外에 아무 것도 아니다.

가져온 곳 : 
카페 >마인드스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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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행변(行變)|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