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효의 한국불교에 고함] 8. 예술적 생기 살아있는 사회 |불교평론(타종교)
[김형효의 한국불교에 고함] 8. 예술적 생기 살아있는 사회
근대 기독교 유입 이후 선악 二元的 분리 풍토 ‘선’강요 ‘악’될수 있어
공인된 기록에 의하면, 불교는 한국에 들어 온지 가장 오래된 종교요 사상이다. 지금은 종교와 철학을 이원적으로 분리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기독교 유입에 따른 결과이고, 그 이전에는 종교와 철학의 차이가 없었다. 佛敎는 思惟方式과 生活方式을 가르치는 思想과 가르침이지, 지금같이 믿음을 가르치는 종교적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불교는 기독교의 강세와 함께 변한 측면이 없잖아 있다. 부처님은 결코 예수님처럼 믿음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불교는 믿으라하지 않고 보라고 한다. 눈으로 직접 응시하라는 의미가 부처님 설법에 큰 몫을 차지한다.
永遠을 말하시던 예수님이 삼십대 초반의 나이에 이 세상을 하직하셨다. 永遠을 말씀하시지 않던 부처님은 팔십 세까지 사셨다. 예수님의 永遠은 불교와 함께 다른 東洋思想의 분야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 永遠은 무슨 意味를 안고 있을까?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다시 復活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도한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손으로 잡으려 하자 몸에 손을 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랬을까?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스러워 하셨던 예수님은 그 흔적을 갖고 復活하셨다. 復活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확인시킨 다음 승천하셨다. 確認시켰다지만, 그것은 눈으로 본 일이지 손으로 만지거나, 같이 生活을 하신 것도 아니다.
그러면 예수님 빼고 또 누가 復活 하셨을까? 달마대사가 復活해 西域으로 가는 것을 목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달마대사임을 입증시키기 위해 신 한쪽을 지팡이에 매고 다른 한 짝은 무덤 속에 남겨 두고 가셨다는 것이다.
죽음이 인생의 終末이 아님을 佛敎와 基督敎는 다 같이 가르친다. 死後 世界가 있다는 것이다. 사후 세계가 있기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死後의 世上을 對備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하라는 것다. 기독교와 달리 불교는 輪廻說을 신봉한다. 막연한 영원의 개념보다 윤회가 더 이해하기 쉽다.
나는 불교적 輪廻思想이 基督敎的 永遠槪念보다 훨씬 쉽게 와 닿는다. 기독교적 영원개념은 모든 이가 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죽고 다시 사는지 애매모호할 때가 있다. 불교적 윤회는 선업이든 악업이든 業力이 作用한다. 그 業力은 華嚴思想처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신봉하는 세계에서는 절대적이다. 유심(唯心)의 짓는 바가 업(業)이다. 이 業 思想은 매우 重要해서 人間의 모든 生活을 決定하는 일을 그것이 담당한다.
그런데 한국불교는 그 業을 늘 나쁜 側面에서만 보는 傾向이 있다. 業은 二重的이고 兩可的이다. 善業과 惡業이 바로 그것이겠다. 그러므로 나쁜 業을 짓지 말 것만을 强調해서는 안 된다. 이 世上의 모든 것은 二重的이고 兩面的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이 世上의 法道다. 善은 善만으로 홀로 作用하는 것이 아니라, 惡業이 반드시 同伴하고 있다. 남에게 친절하고 자상한 일은 同時에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誘惑의 손길로서 作用할 수 있다. 육조 혜능 조사의 말씀에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의 善이 저기에서는 誘惑의 惡으로 작용할 수 있기에 善惡을 너무 分明하게 區分해서 짓지 말라는 말씀이다.
선악은 二重的이어서 외곬으로 작용하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선과 악은 각각 선과 악으로 또는 경우에 따라 악과 선으로 돌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에 선과 악을 너무 절대시하는 일을 마다해야 한다. 예컨대 과부의 재혼 금지는 조선시대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律法化 되면서 極道의 惡法으로 固着化되어 많은 과부들에게 참을 수 없을 만큼의 고통으로 작용하여 人權의 엄청난 彈壓을 招來하게 되었다. 善을 너무 强調하면 그것이 惡으로 逆轉한다. 倫理道德이 너무 支配的인 社會는 조선시대의 답답한 再版을 招來한다. 우리는 윤리도덕을 강조하는 사회보다 오히려 藝術的 아름다움을 生命으로 여기는 그런 活氣 있는 社會를 더 가까이 해야겠다.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출처: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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