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지금 여기 이 순간에 현존하라

장백산-1 2013. 10. 18. 16:29

 

 

제1장. 마음은 진정한 자신이 아니다.

 

아무리 物質的으로 豊足하다 해도 存在의 기쁨과 흔들리지 않는 平和라는 참된 財産을

發見하지 못했다면 그는 아직 自己 內面의 黃金을 發見하지 못한 乞人입니다.

 

깨달음이란 먼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붙잡을 수 없는 超越의 世界가 아닙니다. 깨달음이란

眞正한 自身의 存在, 본래의 나와 '하나' 됨으로써 느끼는 自然스러운 意識狀態일 뿐입니다.

이러한 眞正한 自身의 存在와의 連結 狀態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眞正한 나 自身으로부터,

나를 둘러싼 世界로부터 斷絶된 듯한 錯覺에 빠지게 되고 自覺하든 自覺하지 못하든 스스로를

외로운 섬처럼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하고 안팎으로 갈등이 생겨납니다.

붓다는 깨달음을 ‘煩惱의 끝’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는 人間性을 뛰어 넘어야만 깨달을 수 있다는

어떤 暗示도 없습니다. 더 以上 煩惱가 없다면 무엇이 남을까요? 붓다는 거기에 대해서 말이 없습니다.

붓다의 그 沈默에 담긴 알맹이는 우리 스스로가 찾아야 합니다.

 

眞正한 우리 自身의 本質은 內面의 텅~빈 고요한 世界와 一致합니다. 生覺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

事實 엄청난 苦痛임에도 우리는 이점을 깨닫지 못하고 이 生覺의 소음이 內面의 텅~빈 고요한 世界를

가로 막고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萬物의 배경을 이루는 ‘하나’의 狀態에 머물러 全切性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平和로운 狀態입니다. 깨달음은 個體化된 自身이 가장 깊은 곳의 眞正한 참나와 '하나' 될 뿐만 아니라

物質化된 눈에 보이는 世上 속의 生命力과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自身을 마음과 同一視하면 보이지 않는 장막이 생겨나 固定觀念과 曲解가 생기고 自己 나름의 判斷과

分別心으로 世上과의 障壁을 만들어 眞情한 關係를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진정한 나 자신을 생각마음과

同一視하는 이런 障壁으로 인해 世上이 서로 分離되어 있다는 錯覺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物理的인 모습과 形象들의 次元 밑바탕에서 眞正한 당신의 참나는 眞實로 萬物과 '하나'

입니다. 生覺마음이라는 障壁에 가려 진정한 나의 本質/밑바탕을 忘覺하고 있을 뿐입니다. 생각마음은

진정한 우리의 方便/道具이지 우리를 左之右之하는 本質/根源/본바탕이 아닙니다. 생각마음이 내 것

이라고 믿는 것은 幻想이고 기만입니다.

 

진정한 당신 自身을 마음으로부터 自由롭게 풀어놓으라.

 

生覺하는 者가 누군지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하는 瞬間, 더 높은 次元의 意識이 活性化됩니다. 당신의

의식은 그제서야  生覺 너머에 廣大한 앎의 領域(根本知)가 있으며 生覺은 단지 그러한 생각 너머에

무한한 앎의 영역의 아주 작은 一部分에 불과하다는 事實을 自覺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마음/생각 너머에서 온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될 것입니다.

 

마음속 목소리/생각은 그때그때 제 意見을 내놓고, 推測하고, 判斷하고, 比較하고, 不平하고. 좋아하고,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속 목소리/생각은 당신의 條件化된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음이란 당신이 遺産으로 물려받은 集團的인 文化의 所産일 뿐만 아니라 당신 自身이 經驗한 過去

歷史의 産物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過去의 눈을 通해 現在를 보고 判斷하면서 完全히 歪曲된 視角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속 목소리/생각이야말로 眞正한 당신 自身의 가장 큰 敵입니다.

 

그러니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생각에 가능하면 자주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십시오.

낡은 축음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오랜 세월 되풀이해서 들려왔던 思考 類形에 특히 注意를 기울이십

시오. 이것이 生覺하는 者가 무엇인지를 지켜보라는 의미입니다. 그 마음속 목소리/생각에 귀를

기울이며 그저 듣고 목소리/생각을 관찰하는 觀察者로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의 自己 自身의 現存을 느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自己 自身의 現存은 生覺이 아니며

마음과 생각을 넘어서 常存하는  宇宙意識의 現象입니다.

 

生覺에 注意를 기울이게 되면 그 生覺뿐 아니라 그 生覺을 注視하는 者로서의 自身 또한 意識하게

됩니다. 새로운 次元의 意識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生覺과 自身을 同一視 하지 않으면 生覺은

힘을 잃고 당신은 生覺의 흐름이 끊어지는 經驗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生覺의 흐름의 틈새가 점점

길어지면서 당신은 內面의 고요와 平和를 느끼게 됩니다. 內面의 고요와 평화와의 連結 狀態 속에서

진정한 당신 自身은 훨씬 純粹한 存在의 充滿한 狀態속에서 生命力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純粹意識의 충만한 狀態란 自己中心的인 狀態 즉, 我相이 소멸지는 狀態입니다.

 

生覺하는 者을 지켜보는 대신 지금 이 瞬間에 注意를 集中하는 것만으로도 無心의 틈새를 볼 수 있습

니다. 이는 日常生活 속에서도 할 수 있는 修行法입니다. 온전히 지금 여기 이 瞬間에만 存在하십시오.

손을 씻을 때에도 모든 감각에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물이 흐르는 소리와 물이 닿는 느낌, 손의 움직임,

비누의 향기 등을 놓치지 마십시오. 당신이 느끼는 內面의 平和가 어느 程度인지가 지금 여기 이 瞬間에

現存하는  成功의 基準입니다.

 

깨달음이란 生覺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

 

깨달음을 向한 旅程에서 가장 重要한 段階는 마음을 진정한 自己 自身과 同一視하지 않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마음에너지의 흐름속에서 어떤 틈새를 만들 때마다 意識의 빛은 점점 더 밝아집니다. 더 이상

마음에너지의 흐름에 依持하지 않게 됨으로써 마음이 지어내는 內容物들을 그리 甚刻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大部分의 사람들이 하는 生覺 중에서 80~90%는 反復的인 雜念에 불과합니다.

生覺의 行列은 重毒이나 다름없습니다. 重毒이란 내 마음대로 生覺을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成長함에 따라 個人的이고 文化的인 條件을 基礎해서 自身이 누구인가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이미지 거짓된 自我를 ‘에고’라고 합니다. 에고는 마음의 活動으로 이루어지며 끊임없는

生覺을 通해서만 維持될 수 있습니다. 에고에게는 지금 여기 이 瞬間 現在의 瞬間이 存在하지 않습니다.

過去와 未來만을 重要하게 여길 뿐입니다. 에고는 恒常 過去에 執着하고 過去를 살아있게 하려고 합니다.

過去가 없으면 에고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에고는 未來에 에고자신을 投射함으

로써 어떤 解放이나 滿足感을 얻으려고 합니다.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瞬間이야말로 自由를 向한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生覺은 意識 없이는 存在할 수 없지만 意識은 生覺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의 상태에 있을 때에도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生覺하는 마음을 使用할 수 있습니다.

예전보다 훨씬 더 集中的이고 效果的인 方式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內面의

속삭임/생각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평화롭게, 實際的인 目的을 위해서 마음을 使用할 수 있는 것입니다.

 

生覺은 廣大한 純粹意識 領域에 連結되어 있지 않으면

어느새 힘을 잃고 혼란에 빠지고, 사라지게  됩니다.

 

생각하는 마음은 本質的으로 生存을 위한 道具이지 創造的이지는 않습니다. 위대한 科學者들도 生覺이

멈춘 瞬間의 고요한 상태에서 創造的인 돌파구가 열렸다고 말해왔습니다. 創造力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無心의 場所인 텅~빈 고요한 內面으로부터 나옵니다. 마음에너지는 創造的인 衝動이나 洞察에 形相을

부여할 뿐입니다.

 

人間의 細胞안 염색체의 DNA에는 600쪽 분량의 책 100권정도의 情報을 담을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속에서 作用하는 知性이 얼마나 廣大한지 그리고 우리의

앎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니 당신의 生命과 肉體라는 奇蹟이

創造되고 維持되는 것은 마음과 生覺을 通해서가 아닙니다.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창조적이지 못한

이유는 生覺하는 方法을 몰라서가 아니라 어떻게 生覺을 멈추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感情이란 마음에 對한 몸의 反應이다.

 

마음은 生覺, 感情, 無意識的 反應까지 包含합니다. 感情은 마음과 몸이 만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感情이란 生覺에 對한 몸의 反應입니다. 몸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反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肉體的이나 心理的으로 위협을 당하고 있다고 生覺하면 몸을 움츠리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의 두려움의 

感情으로 몸의 反應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강렬한 감정은 신체 내부에 生化學的인 變化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따라서 生覺을 注視하지 않을 수록 感情的인 에너지 소비가 더 많아집니다. 몸이 말하는 바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보십시오. 그러면 感情이 말하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몸은 恒常 마음을 충실하게 反映하여 보여 줄 것입니다. 당신의 感情 狀態가 眞正한 당신 自身은 아니지만

그 당시 마음 상태에 대한 相對的인 眞實인 것입니다. 生覺은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반면 感情은 주로 몸 안

에서 느껴집니다. 스스로에게 質問하는 習慣을 들이도록 하십시오. 지금 내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가? 라고. 이 질문이 올바른 방향을 가리켜줄 것입니다.

 

生覺과 感情은 서로를 돕고 돕는 못된 되먹임질 習性이 있어서 서로를 부채질 합니다. 一連의 生覺들은

感情의 形態로 스스로를 擴大하고 感情의 振動 周波數는 처음의 生覺에 에너지를 보태면서 서로를

키워가는 것입니다.

 

모든 感情은 眞正한 自身에 對한 認識을 喪失함으로써 느끼게 된 原始的인 感情이 變形된 것입니다.

人間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이런 感情은 그 모습을 鮮明하게 드러내지 않는 만큼 그냥 ‘苦痛’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당할지도 모릅니다. 마음이 하는 주요한 課業중 하나는 이러한 感情的인 苦痛에 對抗

하여 싸우거나 그것을 除去하는 일입니다. 마음이 그토록 분주한 것은 바로 이런 일를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마음 自體가 問題의 根源이기 때문에 마음은 당신의 苦痛을 解決해 줄 수 없습니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 물을 찾는 격입니다. 경찰서장이 불을 질러 놓고 방화범을 찾아 헤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는 感情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기쁨 평화는 感情 너머 훨씬 더 깊은

次元에 存在하는 것입니다. 사랑 기쁨과 평화는 純粹意識 存在의 深奧한 狀態입니다. 生覺의 흐름속에

틈새가 생길 때면 언제라도 사랑 기쁨을 맛볼 수 있고 잠시나마 심오한 平和를 經險할 수 있습니다.

快樂은 恒常 外部에서 오지만 사랑 기쁨 평화는 內面에서 일어납니다. 쾌락과 고통은 純粹한 사랑 기쁨

평화를 덮어 가릴 수는 있어도 破壞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기쁨 평화는 眞正한 당신 自身이 

本來 處해 있던 狀態의 一部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잔뜩 구름으로 흐려 가려있을 때에도 太陽은 어디로

사라진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모든 貪慾心은 純粹存在의 사랑 기쁨 평화 대신 外部 世上과 未來에서 救援이나 滿足을 추구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마음이 있는 狀態에서는 自由나 깨달음에 대한 所望조차도 未來의 滿足이나 完成을 위한 또

다른 執着에 불과합니다. 欲望에서 벗어나서 깨달음을 성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 現存하십시오,

마음/생각을 지켜보는 者(注視者/觀察者/純粹意識)으로 남아야 합니다.

붓다의 말을 引用하지 말고, 붓다라는 말이 참으로 意味하는 대로 깨달은 者가 되십시오.

 

에고를 가진 人間들은 스스로를 存在의 根源과 連結되지 못하고, 人間 끼리도 이어지지도 못한 채,

宇宙를 떠도는 無意味한 存在의 破片들로 誤認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을 眞正한 自己自身과 同一視함

으로써 苦痛을 피할 수 없고 그로 因한 感情的인 苦痛은 肉體의 苦痛과 疾病의 原因이 되었을 겁니다.

否定과 肯定은 銅錢의 兩面에 지나지 않습니다. 양면의 어느 쪽 마음이든, 마음을 진정한 自身과

同一視하는 에고의 狀態로 있는 限  潛在된 苦痛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제2장. 고통에서 벗어나기 --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수용하라 허용하라

 

분주히 움직이는 생각마음을 지켜보지 않는 限 苦痛은 저절로 만들어집니다. 마음은 언제나 지금 여기

이 瞬間을 否定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마음은 어째서 지금 여기 이 瞬間을 習

慣的으로 否定하는 것일까요?

 

마음은 過去와 未來라는 假想의 時間속에 存在하기 때문에 時間을 超越해 存在하는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瞬間을 위협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지구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간도 존재하지 않을지 모릅

니다. 따라서 無限히 創造的인 純粹存在의 潛在力과 生命力은 時間에 의해 가려지고 眞正한 本性은

마음에 의해 가려져서 흐려지게 됩니다. 人間의 마음속에는 時間의 무거운 짐이 끊임없이 蓄積되어

왔습니다. 人間의 마음은 所重한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를 無視하고 實在하지 않는 過去와 未來에

到達하기 위한 手段으로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를 縮小하고 外面해 버리면서 매번 그 時間의 짐을

더욱 무겁게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時間을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만이 自身의  全部라는 사실을 깊이 認識하십시오.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을 삶의 球心點으로 삼으십시오.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 現存하면서 실제로 필요한 경우에만 과거와 미래를 잠깐씩 방문하도록

하십시오.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를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나서 행동을 취하십시오.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가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당신이 그것을 選擇한 것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를 온전히 받아들임이 바로 당신이 宇宙임을 나타내 보임입니다.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의 힘에 連結되지 않으면 당신이 經驗하는 모든 感情的인 苦痛은 그 찌꺼기

를 남기게 됩니다. 이렇게 蓄積된 苦痛은 否定的인 에너지場으로서 당신의 몸과 마음을 점령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누군가에게 화를 내면 장차 그 者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곰곰 生覺할 겁니다. 그러면

無明의 어둠에 휩싸이게 되고 우울한 氣分이 들면서 생각마음을 지켜보는 者(觀察者/注視者/순수의식)

로서의 眞正한  自身이 存在하지 않는 狀態가 됩니다.

 

內面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生覺으로 바꾸지 말고, 比較 分別 判斷하거나 解釋하지 마십시오.

그 느낌을 당신 自身과 同一視하지 마십시오. 단지 그냥 그 느낌 생각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것들을 ‘지켜보는 者’로 沈默의 觀察者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지켜보는 者'로  存在함이 '바로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의 힘'입니다.

 

苦痛의 몸체라 할 수 있는 業障은 여성의 경우, 월경이 시작되기 직전에 특히 고개를 듭니다. 일단

우리가 自己 內面에서 일어나는 느낌 感情 生覺을 지켜보거나 體驗을 통해  現實의 基本 原則을

理解하면 우리는 가장 强力한 變化의 道具를 손에 쥔 셈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당신 自身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다행이도 깨달은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래서 그와

함께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瞬間 現存의 狀態에 머물 수 있다면 眞正한 당신 自身의 빛은 빠르게 밝아질

수 있습니다.

 

窮極的으로 모든 두려움은 죽음과 消滅에 對한 에고(個體化된 精神/意識/마음/靈魂)의 두려움입니다.

에고(存在의 根源에서 個體化된 精神/意識/마음/靈魂)의 한 구석에는 언제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內在되어 있습니다. 마음/에고를 眞正한 自己自身과 同一視하는 狀態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의

구석구석에 影響을 미칩니다. 마음/에고를 진정한 自身과 同一視하지 않고 나/마음/에고가 옳든 그르든

그것이 自我意識에 아무런 影響도 미치지 않게 되면 無意識的으로 나/마음/에고만이 옳아야 한다는,

일종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强한 欲求는 사라지게 됩니다. 人間關係를 좀먹는 모든 파워 게임과 갈등은

거기에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에고는 온전함을 찾아 헤맨다.

 

世上 모든 存在의 根源에서 個體化된 에고/마음/精神/意識/靈魂에 內在하는 感情的인 苦痛의 한켠에는

不完全함이나 결핍에 對한 知覺, 穩全하지 않다는 知覺이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에고는 自我를 느끼

고자 하는 마음에서 由來하기 때문에 에고자신을 外部에 있는 對相들과 끊임없이 同一視하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에고는 끊임없이 자신을 방어하고, 무언가로 배를 채워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아마 아직은 당장 믿기 어려울지 몰라도 아무리 늦어도 죽음이 임박해 올 무렵이면 이 事實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相對的인 時間 槪念을 떠나서 意識의 大轉換이 自然스럽게 일어나며 아주 平穩하면서도

同時에 강렬한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의 現存 意識이 대신 들어서게 되니다.

 

 

제 3장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만이 現存한다.

 

마음속에서 진정한 나(참나)를 찾지 마라

 

마음/에고는 胎生的  根本的으로 不完全하게 作用하기 마련이라는 事實을 理解하게 되면 마음/에고가

하는 일에서 派生되는 수많은 問題들로 고민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모든 문제들을 個人的인 問題로 삼을

理由도 없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고 그 自體가 本質的으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일상생활을 하기 위한 훌륭한 道具입니다. 마음이 不完全하게 不作用을 일으키는 일은 眞正한 自己

自身을 마음 안에서 찾고 그 마음이 自身의 眞正한 모습인 줄로 錯覺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에고의 마음이 되어 우리의 삶 전체를 차지해 버리고 맙니다.

 

마음에서 時間을 멈추어 버리면 마음의 활동은 멈춥니다. 過去는 우리에게 우리의 正體性을 선물하고

未來는 어떤 式으로든 救援과 成就를 約束합니다. 하지만 過去나 未來는 모두 幻想일 뿐입니다.

당신이 오직 貴하게 여겨야 할 일은 時間에서 벗어난 한 地點인 ‘지금 여기 이 瞬間’의 現存 뿐입니다.

당신이 過去와 未來에 焦點을 맞추면 맞출수록 당신은 眞正한 自身에게 가장 所重한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瞬間’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가 가장  重要한 이유는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만이 唯一하게 存在

하기 때문입니다. 眞正한 變化가 일어날 수 있고, 過去를 容解시킬 수 있는 唯一한 狀況은 오직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 뿐입니다.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 充實하면서 깨어 있으면 무슨 일을 하든

가장 單純한 움직임 하나에도 고결함과 봉사와 사랑의 意識(氣運과 情報)가 스며들게 됩니다.

 

行動의 結果에 연연하지 말고 行爲(생각/말/행동) 自體에 注意를 기울이십시오.

그 열매는 저절로 열릴 것입니다. 이 길이 카르마 요가의 길입니다.

注意力을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 集中할 때 당신은 고요함과 幸福 平和를 느끼게 됩니다.

 

 

제4장. 마음은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를 교묘하게 회피한다.

 

眞理를 깨닫기 위해서는 그 眞理를 몸으로 體化하며 살아야 합니다. 試鍊이 닥쳤을 때 그 狀況을 어떻게

處理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意識水準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이 相對的으로 順調로울 때

더욱 意識이 깨어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瞬間 現存의 힘이 자라납니다.

過去의 生覺과 感情이 自身의 內面에 日常的인 無意識의 배경으로 깔려있다는 事實을 처음으로 認識하고

나면 당신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非人間的인 産業文明은 根本的으로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瞬間' 現存의 喪失에서 나온 産物이고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瞬間 現存에 抵抗하는 마음이 集團的으로 不作用을 낳은 結果입니다. 그러니

外部에서 일어나는 일에 關心을 갖는 만큼, 自身의 內面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關心을 가지십시오.

自身의 內面을 들여다 보십시오. 당신 마음이 어떤 生覺을 만들고 있나요? 어떤 느낌이 드나요?

몸속으로 注意를 돌려보십시오. 確實하게 깨어 있는 意識으로 내면의 생각마음을 지켜보세요.

당신 마음이 당신이 마주한 狀況에 대해 어떤 生覺을 만들고 있습니까? 그로 인한 感情은 유쾌합니까?

不快합니까? 당신은 그 感情을 당신 內部에 貯藏해 두기로 選擇한 적이 있습니까? 안이 깨끗해야 밖도

깨끗한 법입니다. 內部가 淨化된 사람이라면 外部의 세상을 汚染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幸福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幸福은 未來에 올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 이 瞬間 所有한 것들을

完全히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에게 無限히 感謝하십시오. 그러니 未來라는 있지도 않은 時間의

'기다림'이라는 마음 狀態를 버리십시오. 幻想인 기다림 속에 빠져드는 自身의 모습이 포착되면 거기서

벗어나십시오. 지금 여기 이 瞬間 現存의 瞬間으로 들어가 거기 現存하면서 純粹存在를 즐기고 누리십시오.

 

 

제5장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瞬間에 깨어 있다는 의미

 

예수나 붓다를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릇된 스승에게 이끌린 사람들도 많았고 지금도

많습니다. 어둠은 빛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제 6장. 몸 안에 뿌리내리기

 

물고기가 人間의 마음을 가졌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물이라고? 그게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어.” 몸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몸 안으로부터 몸을 느끼는 것이며 몸 안의 生命을 느끼고

그로써 眞正한 당신(참나) 外的 形像를 超越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피어올라오는

生覺은 一種의 集團的인 病입니다. 그때에 당신의 正體性은 完全히 마음의 活動으로부터 由來됩니다.

당신의 삶에서 정말 重要한 한 가지 일은 보이지 않고 破壞되지 않는 實在로서의 眞正한 自身을 認識

하는 일입니다. 純粹存在意識를 認識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부터 意識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한 가장 效果的인 方法 中 하나가 注意力의 焦點을 生覺으로부터 돌려서 몸 안으로 向하게 하는

것입니다. 손, 발, 다리, 팔, 당신의 배와 가슴속에서 生命을 느껴 보십시오. 몸 全切에 퍼져서 모든 器管과

모든 細胞에 活氣를 주는 微妙한 純粹에너지정보場(순수의식체)를 느껴보십시오. 단지 그냥 느끼면 됩니다.

 

肉體的 意識次元에서 보면 人間은 動物입니다. 그래서 動物的 本能에 점령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서

自身을 肉體로부터 分離시켜 몸으로 存在하는 것을 否定하면서도 몸을 갖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宗敎가 생기자 이런 分離感은 ‘나의 肉體는 내가 아니다.’라는 믿음으로 더욱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恒常 本質的인 變化 過程이 일어나는 몸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變化는 外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몸을 通해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진정한 스승은 肉身를 혹사하거나 離脫하기를 권유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몸/肉身/肉體는 眞正한 당신의 窮極的 實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을 등한시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無常하고 有限하며 죽음의 象徵인 몸이라는 幻像/虛像/幻影을 마음이 만들어 냈지만

그 몸 안에 眞正한 당신 自身의 本質的/根源的이며 永久的인 實在가 숨어 있습니다.

 

당신이 最大한 內面의 순수의식체에 계속 集中한다면 마음속에서 방황하면서 眞正한 당신 自身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注意力을 온통 마음과 外部 世界(外部境界)에 빼앗기지 마십시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集中하면서 可能할 때마다 內面의 몸(순수의식체)을 느껴보십시오.

내면의 몸에 居住하는 것은 언제나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瞬間' 現存의 本質的인 一部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卽時 內面으로 들어가서 내면의 몸 안의 순수에너지정보場에 最大한

集中하는 習慣을 들이십시오. 이것은 오래 걸리지 않으며 단 몇 秒만으로도 充分합니다. 도전을

받는 그 瞬間에 해야 합니다.

 

당신이 內面에 注意를 集中하고 內面의 몸(순수의식체)을 느끼면 意識이 마음으로부터 물러나 卽時

고요해지면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現存하게 됩니다. 內面의 몸을 意識하게 되면 肉體的인

側面에서도 혜택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肉體의 老化가 상당히 늦추어진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몸

의 순수에너지정보場은 時間이 흘러도 變하지 않는 永遠不滅의 존재입니다. 또 하나는 육신의 免疫

體係가 크게 强化된다는 점입니다. 몸은 관심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대부분의 疾病은 당신의 意識이

內面의 몸 안에 現存하지 않을 때 침투해 옵니다. 精神的인 免疫體係도 向上되어 쉽게 傳染되기 쉬운

否定的인 感情의 勢力圈으로부터 당신을 保護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그냥 수긍하거나 부정하지

말고 直接 試驗해 보십시오.

 

免疫體系를 增强시킬 必要를 느낄 때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간단하지만 강력한 ‘自己治癒冥想’이

있습니다. 確實하게 集中해서 연습하면 역시 효과가 있습니다. 그 '自己治癒冥想法'은 다음과 같습니다.

 

잠시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그리고 특히 밤에 잠들기 前이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당신의

몸에 意識을 흐르게 하십시오. 등을 바닥에 대고 똑바로 누워 눈을 감으십시오. 처음에 잠시 동안 注意

力을 集中할 身體部位를 選擇하십시오. 아무 곳이나 좋습니다. 최대한 강렬하게 그 부위들 안의 生命力

을 느끼십시오, 各 部位에 15秒 정도씩 注意를 集中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몇 차례 波濤 치듯이 온몸에

意識이 흐르게 하십시오. 발끝에서 머리까지, 그리고 다시 거꾸로 흐르게 하십시오. 一分 정도만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 다음 몸 안 全切를 '하나의 에너지정보場(하나의 의식체)'으로 느끼십시오.

그 느낌을 몇분간 유지하십시오.

 

內面의 몸(순수에너지정보場)과 接觸하기 어려울 때는 呼吸에 먼저 集中하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호흡을 하면서 복부가 약간씩 팽창하고 수축하는 것을 느끼십시오. 만일 그 호흡의 느낌이 느껴진

다면 눈을 감고 自身이 意識의 바다라고 想像하는 發光體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느껴보십시오.

그리고 그 빛속에서 呼吸하십시오. 그 發光體가 당신 몸을 가득 채우고 빛나게 하고 있는 것을

느끼십시오. 이제 당신 意識은 당신의 몸속에 있습니다. 어떤 對答이나 解決策, 또는 어떤 創造的인

아이디어가 必要할 때마다 잠시 生覺을 멈추고 內面의 몸인 에너지정보場에 注意를 集中하십시오, 고

요함을 느끼십시오. 그리고 나서 生覺을 다시 회복했을 때, 그 生覺은 新鮮하고 創造的이 될 것입니다.

어떠한 思考 活動이든 生覺과 內面의 고요함 사이를 往復하는 習慣을 가지십시오, 머리로만 生覺하지

말고 몸 全切로 生覺하십시오....

 

몸 안으로 들어가기 前에 먼저 容恕하라

 

容恕는 삶에 抵抗하지 않고 삶이 당신을 通해 살도록 許落하는 일입니다. 容恕하지 않는 일은 마음의

本性이며, 마음이 만들어내는 거짓 自我(에고)는 투쟁과 갈등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마음은

容恕할 수 없습니다. 오직 眞正한 당신만이 容恕할수  있습니다. 예수가 寺院으로 들어가기 前에 먼저

容恕하라고 했던 말의 意味가 바로 그것입니다. 現在를 容恕하는 것이 過去를 容恕하는 것보다 훨씬

더 重要합니다.

 

만일 지금 모든 瞬間을 容恕한다면, 그래서 있는 그대로를 許容한다면 나중에 가서 後悔할 일을 쌓지

않게 되는 셈입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無禮하고 가슴 아픈 말을 하더라도 공격, 방어, 회피와 같은 無

意識的인 反應과 否定的 感情 狀態로 휩쓸리지 마십시오. 그것이 그대로 당신의 存在위를 지나쳐 흘러

가도록 하십시오. 아무런 抵抗도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더 이상 아무도 마음을 다치지 않습니다.

그것이 容恕입니다.

 

듣는 기술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때는 마음으로만 듣지 말고 몸 全切로 들으십시오. 몸 안의 에너지場을

느끼면서 들으십시오. 그러면 生覺으로부터 注意力이 돌려져서 마음의 干涉을 받지 않고 眞正으로

들을 수 있는 텅~빈 고요한 空間이 생깁니다.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相對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膳物입니다.

 

大部分의 人間關係는 主로 마음의 交流일 뿐입니다. 存在와 存在의 交流인 眞正한 靈的 交流는 이루

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式으로는 어떠한 關係도 盛熟할 수 없으며, 그래서 수많은 갈등이 빚어지는 것

입니다. 마음이 삶을 支配하고 있을 때는 渴藤과 다툼과 問題가 不可避하게 일어납니다. 하지만 당신이

內面의 몸(순수에너지정보場)과 連結되고 있는 狀態에서는 眞正한 關係가 꽃 필 수 있는

無心의 텅~빈 바탕 空間이 만들어집니다.

 

제 7장. 顯示(顯現)되지 않은 世界로 들어가기

 

당신의 몸 안 어느 部位에서 에너지가 느껴지면 그 느낌을 冥想으로 連結하십시오. 時間은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10분에서 15분 정도면 충분합니다. 먼저 의자에 앉으십시오. 뒤로 기대지는 마십시오. 척추를

똑바로 세우시고 몸을 편안하게 하면서 눈을 감으십시오. 몇 번 심호흡을 하십시오. 아랫배로 숨을 쉬고

있는 자신을 느끼십시오. 그러고 나서 몸 안의 순수에너지정보場을 全切的으로 認識하십시오. 느끼십시오.

生覺하지 말고,,,, 可能하면 肉體에 대해 아직 갖고 있는 마음의 이미지를 모두 버리십시오. 그 내면의  몸인

순수에너지정보場과 '하나'가 되면 더 以上 主體와 客體, 나와 내 몸이 따로따로 나뉘어 認識되지 않습니다.

이제 안팎의 差異가 없어지면서 內面의 몸인 순수에너지정보장도 더 以上 없습니다. 몸 안 순수에너지정보

場으로 깊이 들어가 可能한 限 오랫동안 純粹意識 存在의 領域에 머무르십시오. 物理的인 몸과 呼吸과

身體의 感覺을 다시 認識하게 되면 눈을 뜨십시오.

 

다시 顯示된 世上(現實界)으로 돌아오게 되면 당신은 잠시 버려두었던 形態로서의 正體性을 回復하게

됩니다. 이름, 過去, 삶의 狀況, 未來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本質的인 側面에서 당신은 이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당신안에 있는 '참된 實在 現實'을 잠깐이나마 經驗한 것입니다. 그

'참된 現實'이 당신과 分離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 世上(現實界)과도 分離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제 다음과 같은 靈的 修行을 해보세요. 부지런히 삶을 영위해 나가되 注意力을 完全히 外部世上과

마음에 빼앗기지 마십시오. 注意力의 一部는 內面에 남겨두십시오. 內面의 몸(순수생명/순수의식/순수

에너지정보場)을 느끼시고 內面 깊숙한 곳의 텅~빈 고요함을 느끼십시오. 당신의 意識은 神이라고

불리는 根源의 本質과 이 世上(현실) 사이에 놓인 다리가 됩니다. 이렇게 個體化된 당신의 마음/意識/

精神/靈魂이 存在 根源의 本質과 連結된 狀態를 우리는 ‘깨달음’이라고 부름니다.

 

또 다른 門

 

現示되지 않은 世界로 들어가는 또 다른 門은 生覺을 停止함으로써 열립니다. 이는 매우 간단한 方法으로

출발할 수 있는데, 意識的으로 呼吸하거나 예민하게 한 송이 꽃을 바라볼 때, 그 瞬間 마음이 거기 干涉하

지 않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確固하게 現存하고 있는 동안에는 굳이 生覺을 停止하려고 애쓸

必要가 없습니다. 마음이 自動으로 生覺을 멈추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狀態를 抵抗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내맡김’ 또한 顯示되지 않은 世界로 들어가는 門입니다.

內面의 抵抗을 일으키는 에고마음이 어느 정도 弱化되기 때문입니다. 顯現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는 門을

여는 것은 당신 自身에게 달려있습니다.

 

內面의 몸(순수의식의 場/순수생명의 장/순수에너지정보場)과의 接觸(正門임), 確固한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의 現存, 마음으로부터의 獨立,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내맡김, 이러한 것들이

모두 당신이 使用할 수 있는 現顯되지 않은 나타나지 않은 純粹意識의 世界로 들어가는 門입니다.

그 중에서 한 가지만 使用해도 됩니다. 열린 그 門으로 사랑이 들어옵니다.

당신이 할 일은 사랑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들어오는 門을 찾는 것입니다.

 

沈默에 귀 기울이라.

 

만일 당신이 보아야 할 곳을 알고 있다면 어디에서나 그것을 發見할 것입니다. 그 門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립니까? 차 지나가는 소리는? 귀 기울여 보십시오, 그곳에서 現顯

되지 않은 純粹意識世界의 現存이 느껴지지 않나요? 느껴지지 않는다면 소리가 들어오고 나오는 沈默

속에서 그것을 찾아보십시오. 소리보다 沈默에 더 注意를 기울이십시오. 外部의 沈默에 注意를 集中하면

內面의 沈默이 創造됩니다.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하나의 門이 열리고 있습니다.

 

모든 소리는 沈默에서 태어나서 沈默으로 돌아가서 消滅하며, 살아있는 동안에도 沈默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沈默은 소리를 存在하게 합니다. 그 소리는 現示되지 않는 純粹意識世界의 一部입니다.

 

空間을 認識하라

 

물리학자들은 原子들 사이 거리는 엄청나게 떨어져서 텅~빈 空間으로 있다고 합니다. 때문에 原子들로

構成된 당신 肉體나 顯示되어 보이는 딱딱한 物體들도 거의 完全히 텅~빈 空間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게다가  原子 內部는 거의 텅~빈 空間이라고 합니다. 顯示되지 않은 텅~빈 純粹意識世界는 이 世上에

沈默으로 現存할 뿐 아니라 宇宙 全切에 펼쳐져 無所不在하게 充滿해 있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텅~빈

空間 虛空속에 떠있는 物體/物質에만 關心를 기울일 뿐, 그 텅~빈 空間 虛空 自體에 注目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 텅~빈 空間과 沈默은 本來 同一한 有와 無의 두  側面입니다.

텅~빈 空間/沈默  有/無  그것들은 內面의 텅~빈 空間과 內面의 沈默이 外部로 드러난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顯示되지 않은 텅~빈 純粹意識世界와 生生하게 連結된 狀態라면, 現顯된 눈에 보이는

世上과 그 世上안의 모든 生命體/意識體가 形象을 超越하여 '오직 하나인 生命/意識'만을 表現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인 生命/意識'만을 깊이 尊敬하고 사랑하며 所重히 여길

것입니다. 당신은 또한 깨닫게 될 것입니다. 形相 있는 모든 것은 消滅할 수밖에 없으며(無常) 

窮極的으로는 고정된 실체가 없는 그다지 重要하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無我).......

가장 偉大한 奇蹟은 宇宙를 存在하게 하는 텅~빈 고요함과 廣闊함이 텅~빈 空間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內面에도 똑같이 있다는 事實입니다. 完全하고 철저하게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

現存할 수 있다면 당신 존재는 無心의 고요한 內的 텅~빈 空間으로서 宇宙 存在의 텅~빈 바탕 根源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당신 內面에 時間과 空間의 眞正한 本性을 지니고 있습니다. 텅~빈 空間은 無心의 平穩하고 無邊廣大한

깊은 純粹意識의 領域이며 時間은 現存, 卽 永遠한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 對한 認識입니다.

 

 

제8장. 성숙한 인간관계 (성숙한 인연 가꾸기)

 

당신이 現存으로 갈 수 있는 地點은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저기 어딘가에 별도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보다 당신을 깨달음에 더

가까이 데려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過去에 일어난 일들 때문에 당신이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 注意를 깊이 기울이지 못할

理由는 없습니다. 未來에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 이 瞬間 하지 않으면 결코 하지 못할 것입니다.

 

眞正한 사랑은 생각 마음 너머에서 생기기 때문에 對立性 二元性이 없습니다. 깨우친 사람이 드문 만큼

지속적인 사랑도 드뭅니다. 당신이 마음과 同一視되어 있는 限 당신은 外部 對相에서 自我意識을 끌어

옵니다. 社會的 地位, 富, 名譽, 所有, 재산, 외모, 成功과 失敗, 믿음, 학력, 경력, 체계등 窮極的으로

眞正한 당신과 아무 相關도 없는 것들로부터 眞正한 自身이 누구인가에 對한 自覺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眞正한 사랑입니다. 그러다가 特別한 關系가 생깁니다. 지금까지 重要하게 生覺해 왔던 모든

外部的인 狀況/條件들이 이젠 相對的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집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을 代身해주고, 당신의 삶에 意味를 주고, 당신의 正體性을 確認시켜 주는 단 하나의

焦點, 사랑하는 戀人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느끼는 眞正한 사랑이 그 反對 感情인 공격성,

감정적인 폭력, 執着, 所有 등을 包含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좀 더 完全하고 確實한 自意識

을 必要로 하는 에고의 强한 欲求일 뿐이고, 相對方은 一時的으로 그 欲求를 充足시켜 주는 外部 對相일

뿐입니다. 重毒은 당신의 고통(두려움, 결핍등)을 감추기 위해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利用하는 것입니다.

重毒은 더 이상 效果가 없을 때가 있기 마련이고 그때의 苦痛은 前보다 더 심하게 느껴집니다.

 

중독 관계에서 성숙한 관계로

 

重毒 關系를 眞實한 關系로 變化시키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 속으로 더 깊이 注意를

돌림으로써 現存을 强化하십시오. 무엇보다 당신 自身에 대한 判斷을 中斷하고 당신의 파트너에 대한

判斷을 中止하십시오. 變化를 위한 가장 큰 촉매는 어떤 식으로든 相對方을 判斷하거나 變化시키려

하지 않고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를 完全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사랑할 수 있고, 함께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 속에서 더 깊이 現存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은 누구를 가리거나 선택하지 않습니다. 太陽빛이 萬物을 가리지 않듯이 眞正한 사랑은

어느 누구도 特別하게 對接하거나 멀리하지  않습니다. 獨占이나 멀리 내침은 眞正한 사랑이 아니라

에고의 사랑입니다.

 

眞正한 사랑은 宇宙萬物이 서로 '하나' 라는 事實에 대한 깨우침이요, 그것이 곧 참사랑입니다.

內面的인 變化에 관련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 自身을 變化시킬

수 없으며, 당신의 파트너나 다른 누구도 變化시킬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오직

眞正한 恩寵과 사랑이 들어올 수 있는 內面의 텅~빈 空間을, 變化를 受容하기 위한 內面의 텅~빈 空間

을 마련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關系가 삐걱거릴 때마다 自身의 內面 텅~빈 空間 狀態에 對해 알아차

리십시오. 알아차린 그 상태를 유지하십시오.

 

당신의 삶을 靈的 修行의 場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必要할까요? 世上이 穩全해지기를,

누군가 다른 사람이 깨우치기를 기다릴 必要는 없습니다. 누군가와 말다툼을 始作하는 瞬間, 당신은 당

신의 마음과 同一視되어 있는 것이며, 자기 에고를 방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고에게 眞正한 당신을

넘겨준 것입니다. 당신 스스로가 無明의 어둠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입니다. 당신의 파트너가 無知에

휩싸여 行爲할 때에는 어떠한 判斷도 하지 마십시오. 判斷을 한다는 것은 無知에서 나온 相對方의 行動을

그 사람과 同一視하는 것이거나, 自己 自身의 無知를 다른 사람에게 投映해 놓고는 相對方이 그렇게 한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탓하지 말고, 느끼는 그대로를 表現하는 方法을 배우고 演習하십시오.

 

眞正한 關系는 텅~빈 바탕 자리 純粹意識 存在에 對해 깨어 있을 때에만 可能합니다. 純粹意識 存在를

認識함으로써 당신은 相對方의 몸과 마음을 하나의 스크린 속에서 연극놀이 하는 연극배우 처럼 여길 수

있게 됩니다. 당신 自身의 참모습을 느끼듯, 그 스크린 너머에 있는 相對方의 眞正한 참모습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苦痛이나 無知로 因한 行爲에 直面했을 때도 당신은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 現存하면서 텅~빈 바탕 자리 純粹意識 存在와 連結되고, 그래서 相對方의 겉모습 너머를 바라

보고, 眞正한 당신 自身의 存在를 通해 相對의 찬란하고 텅~빈 바탕 자리 純粹한 意識의 存在를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에크하르트 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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