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宇宙飛行士들의 覺性 體驗
人間의 모든 集團意識은 地球의 磁氣場에 묶여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카르마, 業, 集團意識, 觀念, 思念體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구 자기장이 갑자기 사라지는 瞬間 인간은 그 모든 集團意識을 벗어버리고 瞬間의 覺性 段階에 이를 수 있다는 假說이 있습니다.
아래의 내용과 같이 地球 磁氣場圈을 벗어나 일해야 했던 우주 비행사들의 경우, 實際 宇宙에서
어떤 覺性段階에 도달해서 지구로 돌아온 後 삶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1960 년대 초부터 본격화된 미국의 유인 우주 탐사 계획은 머큐리 계획(1961~1963)에서 아폴로 계획(1968~1972), 스카이랩 계획(1973~1974)에 이르기까지 많은 우주 비행사를 배출해냈다. 人類歷史上 最初로 地球의 大氣圈을 벗어나, 宇宙 空間에서 혹성 地球를 客觀的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이들은 여러 神秘 體驗을 經驗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이 體驗을 '우주감각(宇宙感覺, Cosmic Sense)'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들이 끝도 시작도 없는
宇宙에서 地球를 바라보았을 때 느낀 것은 一種의 精神的 衝擊인 同時에 神秘로운 精神的 고양감(高揚感)이었다. 또한 지상에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었던 莊嚴한 宇宙意識의 覺性이었다.
宇宙에서 地球로 돌아온 뒤, 이들 중 多數가 그들의 人生觀, 宇宙觀의 極的인 變化를 겪었으며, 前에 하던 일과는 전혀 다른 職業으로 轉換하였다. 代表的으로 아폴로 I5호 탑승자였던 제임스 어윈(James Irwin)이나 찰스 듀크(Charles Duke) 같은 사람은 宗敎 活動에 投身하여 傳道士가 되었고, 또 어떤 사람은 畵家나 詩人이 되었다. 또 어떤 사람은 公害와 地球 汚染을 反對하는 環境 運動家로 뛰어다녔으며, 아폴로 14호의 에드가 미첼(Edgar Mitchell) 같은 이는 超能力 硏究所를 세워 超常現狀(ESP) 硏究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우주 비행사들의 대부분이 본래 기독교도였음에도 불구하고, 宇宙에 다녀온 以後에는 特定 宗敎나 宗派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으로 變하였다. 더구나 이들의 宗敎觀도 달라졌다. 各 宗敎는 本質的으로 같은 것인데 그 표현 형태나 神을 부르는 名稱이 다를 뿐이라는, 보다 깊고 대범한 意識으로 바뀌었다. 또 이들 중 여러 사람은 깊은 종교적, 정신적 각지(覺知) 단계에 들어갔다. 제럴드 카아(Gerad Carr)나 에드 깁슨 (Ed Gibson), 에드가 미첼(EdgarMitchell), 럿셀 슈레이가트 같은 사람이 이 범주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이 인터뷰에서 전한 말 가운데 귀담아들을 만한 價値있는 말들을 추려보았다. 누구보다 먼저 宇宙를 直接 體驗해 본 이들의 말은 人類의 意識이 進步해 나가야 할 方向을 提示해주고 있다. 특히 마지막 에드가 미첼의 말은, 마치 深奧한 宇宙 哲學에 대한 講論을 듣는 것 같으며, 깊은 인상을 남긴다. 아래 내용은 일본의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의 저서 (우주에서 돌아오다)에서 引用하였다.
■ 돈 아이즐리 (Donn Eisely) : 아폴로 7호 탑승자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고 있으면, 지금 實際로 저 어딘가에서 인간과 인간이 領土나 어떤 理念으로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다는 것이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바보스런 짓이라는 生覺이 듭니다. 껄껄 웃고 싶을 만큼 바보스런 짓이죠.
宇宙에서는 하찮은 것은 보이지 않고, 本質이 보입니다. 表面的인 사소한 差異点은 모두 날아가 버리고
같게 보입니다. 종족이나 국가를 超越해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라는 한 종(種)으로만 보일 뿐입니다.(중략) 아무튼 우주 비행 이래 이국인(異國人)이나 이인종(異人種)이라는 것에 대한 느낌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 유진 서난(Eugene Cernan) : 제미니 9호, 아폴로 10호․17호 탑승자
宇宙에서 얻은 가장 큰 內面의 所得은 神의 存在에 대한 認識입니다. 나는 宇宙에서 神이 거기에 계시다는 것을 直感的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神의 이름은 宗敎에 따라 다릅니다.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불교 모두가 다른 이름을 神에게 賦與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어떻건 간에 神이 存在한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모두 인간이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神의 이름이 다르게 붙여졌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對相은 같은 것입니다. 宇宙에서 地球를 볼 때, 그 과도한 아름다움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地球가 遇然의 産物로 생겨날 리가 없습니다.(중략) 우주에서 지구를 보았을 때. 그것은 흔들림이 없는 확신이 되었습니다.
우주유영(宇宙遊泳)을 하기 위해 우주선 밖으로 나왔을 때, 비로소 自己 앞에 全宇宙가 있다는 것이
實感이 됩니다. 宇宙라는 無限한 空間의 한가운데에 自己라는 存在가 거기 내던져져 있는 느낌입니다.
달 위까지 가서 地球를 볼 때 이 宇宙의 無限한 크기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며칠이나 걸려서
超高速 로켓을 타고 가까스로 달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시간을 들여서 地球에서 벗어나 왔어도,
暗黑의 宇宙에 빛나는 별의 어느 것 하나에 한걸음도 다가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멀어진 地球의 크기만
變했을 뿐이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無限한 宇宙 속에서는 人類 歷史上 가장 긴 旅行으로 移動한 거리도 무(無)에 가까운
거리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無限한 宇宙를 눈앞에 마주하고 있었다고는 해도, 그 宇宙는 단지 우리가
볼 수 있는 限界를 넘어 無限하게 펼쳐져 있는 全宇宙의 極히 一部分, 정말 하찮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즉, 우리는 無限한 宇宙 속에 있으면서 그것의 아주 極微小한 部分에 감금돼있는 存在인 것입니다.
이 느낌 생각은 아득히 먼 달까지 가서, 달에서 지구를 바라보았을 때 실감이 됩니다.
■ 에드 깁슨(Ed Gibson) : 스카이랩 4호 탑승자
地球에서 宇宙를 보는 것과 茫茫大海 宇宙 空間에 나가 宇宙를 보는 것은, 정말 完全히 다른 經驗입니다.
人間은 스스로 宇宙를 알고 있다고 生覺하고 있지만, 實際로는 敎科書에 나오는 太陽界 構造의 도해(圖解)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觀念的으로 理解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地球 위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地球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주에 나가면 바로 눈앞에 지구라는 천체가 있고 태양이라는 천체가 있습니다. 눈앞에 태양계의 도해가 아닌 宇宙現實이 있는 것입니다. 태양계뿐만 아니라 宇宙 全切가 觀念이 아닌 생생한 現實 體驗으로 이해됩니다.
누구든 宇宙 空間에 나가면 그 現實에 압도됩니다. 그 境觀의 莊嚴함은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우주에서의 체험은 완전히 자연적이었습니다. 우주는 참으로 아름답고 훌륭하게 調和되어 있습니다. 우연히 이런 우주가 만들어졌을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주선 窓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地球가 바로 눈앞에서 무시무시한 速度로 廻轉하는 게 보입니다.
좌우간 90분 만에 한 바퀴를 도는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곳을 지났구나 하고 생각하면
바로 불타(佛陀, 석가모니)가 태어나신 곳을 지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라의 수와 비슷한 만큼의 종교와 교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종교이건 간에 우주에서 보면 지역적인 종교일 뿐입니다.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 인위적인 국경선이라는 것은 볼래야 볼 수가 없고 이 아래에서 많은 국가가 분리되어 대립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우스꽝스럽게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 종교 집단간 대립도 어리석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人間의 오감(五感)으로는 捕捉되지 않는 世界가 存在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오두막 속에 갇힌 채로 밖에 설치한 몇 대의 카메라로 바깥 世界를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으로 外界의 모든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오만입니다.
■ 제랄드 카아 : 스카이랩 4호 선장
인간은 지구에다 거대한 구조물들을 잔뜩 지어 놓고 사람들은 또 그것들에 경탄하며 여기저기 구경을 다니거나 觀光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 어느 것도 自然이 만든 것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實際로 宇宙에서 보면 인간이 만든 것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미미합니다.
보이는 것은 바다, 강, 산, 숲, 사막 등 大自然뿐입니다. 自然 속에서 人間의 보잘 것 없음을 보고 있자면, 人間이란 것이 宇宙에서 그렇게 대단한 存在가 아니라는 것이 이해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지구에서 눈을 돌려 우주 전체의 廣闊함에 주목하면 이번에는 우주 속에 있는 지구의 존재 역시 인간의 생각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기권 밖 우주 공간에서 우주를 보면, 지상에서 우주를 보는 것의 5~6배나 더 많은 별들이 보입니다.
우주 공간 모두가 銀河처럼 보이며, 은하는 별들로 이루어진 고형물(固形物)처럼 보입니다.
지구는 이 우주에 떠있는 無數한 天體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지구를 무슨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지구 위에서, 또 지구는 우주에서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 밖에서 우주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돌연히 인간은 우주에서 너무나 하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이 인식되었습니다.
生命이 地球에만 存在한다는 생각은 전혀 根據가 없습니다. 우주에 널려있는 별들은 모두 태양이며, 지구와 마찬가지로 그 무수한 태양계마다 각기 생명체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주에 있는 무수한 별의 존재와 우주 창조 이후의 시간 흐름을 생각해본다면, 이 宇宙에는 無數한 生命이 모든 發展 段階別로
存在한다는 생각이 가장 타당하다고 봅니다. 지구상의 생명만이 최고의 발전 단계에 있다느니 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주 체험은 나의 神仰心을 한층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강화시켰다기보다는 擴張시켰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그 이전에 나의 신앙 내용은 편협하였으나, 우주 체험 以後에는 傳統的인 旣存
敎義에 별로 구애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를 認定하는 입장이며, 어떤 종교의 神도 다른 시각에서 보았을 때 붙여진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말하는 神은 하늘에서 지상을 굽어보고 있는 수염난 할아버지 같은 따위의 인격신(人格神)이 아니며, 萬物의 秩序와 均衡 調和의 背後에 存在하는 一種의 根源, 또는 패턴(Pattern)을 意味합니다. 모든 神의 名稱은 이러한 根源이나 패턴에 格을 상정하여 붙여진 명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 월터 시라(Walter SchfTa) : 머큐리 8호, 아폴로 7호 탑승자
우주에서 보면 국경 같은 것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국경이란 것은 인간이 정치적 이데올로기 때문에 제멋대로 만든 것이지, 원래는 없던 것입니다. 우주에서 自然 그대로의 地球를 보고 있으면 국경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지구인들이 저 아름다운 지구에서 민족 상호간에 서로 대립하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서글프고 멍청하게 느껴졌습니다.
■ 에드가 미첼(Edgar Mitchell) : 아폴로 14호 탑승자
超能力을 다루려면 우선 그에 合當한 精神과 感性의 安定이 先結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雜念이나 잔물결 하나 없이 마음의 靜寂을 유지해야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종의 니르바나(Nirvana, 열반)에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까지 가면 人間이 物質的 存在가 아니라 精神的 存在라는 것이 자연히 이해됩니다.
인간은 物質的 次元에서는 個別的 存在인듯 보이지만, 精神的 次元의 根源에서는 서로 連結되어 있습니다. ESP(초능력)의 成立 根據가 여기에 있습니다. 더 나아가면 인간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精神的으로
' 일체(一體, Spiritual oneness)'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超能力 現狀은 이 一體의 證明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一體이기 때문에 물리적 수단이 아닌 텔레파시로 外界와의 意思疎通이 可能합니다.
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Upanishad)>에 '신(神:Brahman, 梵)은 鑛物 속에서는 잠을 자고, 植物 속에서는 눈을 뜨며, 動物 속에서는 걸음을 걷고, 人間 속에서는 사유(思惟)한다'고 씌어있습니다.
萬物 속에는 신(神)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萬物은 정신성(精神性)에 있어서는 한 몸(一體)인 것입니다. 그러나 神의 覺性度는 萬物에 따라 다릅니다.
나는 열렬한 기독교도로 남부 침례교의 근본주의자였습니다. 아다시피 근본주의자의 교리는 성서에 씌어 있는 것은 모두 옳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는 科學者였고 技術者였습니다. 때문에 내 人生은 40년 동안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의 對立을 어떻게 해소시킬 수 있을까 하고 계속 고뇌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哲學과 神學을 어지간히도 공부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는 이 두 가지 眞理의 相克을 안은 채 宇宙로 갔습니다.
그런데 宇宙에서 나는 그야말로 한瞬間에, 그 오랫동안 苦惱해 오던 問題의 解答을 얻었습니다. 바로 宇宙에서 地球를 보았을 때였습니다. 正確하게 말하면 달 探驗을 마치고 地球를 向한 궤도에 오른지 얼마되지 않아서였습니다. 아스라이 먼 지구를 보았습니다. 虛空에 무수한 별이 暗黑 속에서 빛나고, 그 가운데 우리의 地球가 떠 있었습니다. 地球는 無限한 宇宙 속에서, 하나의 斑点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치게 아름다운 반점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언제나 내 머릿속에 있었던 몇 가지 疑問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왜 여기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인간은 단순히 지적 동물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우주는 물질의 집합에 불과한 것인가?'
'우주나 인간은 창조된 것인가 아니면 우연의 소산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모든 것은 우연의 손안에 있는가, 아니면 어떤 커다란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바로 이와 같은 의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의문과 동시에 그 答이 瞬間的으로 떠올랐습니다. 종교학에서 말하는 神秘 體驗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순간적으로 眞理를 파악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世界는 意味가 있습니다.
나도 우주도 우연의 산물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든 存在가 諸各己 그 역할을 짊어지고 있는, 어떤 神的인 計劃이 있습니다. 그 계획은 生命의 進化입니다. 생명은 目的을 가지고 進化해가고 있습니다. 개별적인 생명은 全切의 部分입니다. 개별적인 생명이 부분을 이루고 있는 全切가 있습니다. 모든 事物은 한 몸입니다.
한몸인 全切는 완벽하게 秩序整然하고 調和로우며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全切 속에서 나는 神과 한 몸입니다. 나는 신의 계획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우주는 창조적 진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한 순간 한 순간의 意識의 움직임 또한 宇宙를 創造해가는 행위라 하겠습니다.
이 매순간 순간이 새로운 창조로서, 진화는 창조의 계속입니다. 神의 思惟가 그 過程을 다루고, 人間의 意識은 그 神의 思惟의 一部로 存在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事實을 한 순간에 깨달으면서 비할 데 없는 환희와 행복감에 넘쳤습니다. 순간이었습니다. 진리를 순간적으로 깨침과 동시에 환희가 엄습해 왔습니다. 그것은 정말 지복(至福)의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神과의 一體感을 여실히 맛보았습니다.
지구로 돌아온 後 나는 이전과 달리 모든 宗敎와 모든 思想을 偏見없이 接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우주에서 느낀 저 神과의 一體感은 특정종교나 종파의 神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종교의 부분적 진리라는 것은 교단 형성 과정에서 빚어졌으며 진리의 길 밖으로 이미 벗어나 있습니다.
각 종교의 교주가 될 수 있었던 인물들 가령, 예수나 석가, 마호메트 또는 노자나 조로아스터 등은 모두
인간의 自我意識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 世界의 精神的 一體性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超能力者들이었으며 奇蹟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을 받아 추종한 사람들은 自我意識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깊은 眞理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세상을 뜨면 신자들의 집단은 '정신적 진리'에서 '인간적 자아의식'으로 끌려오고 맙니다. 그리고 교단이 조직되면 교단 전체는 더더욱 元初의 眞理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단화된 기성 종교는 어느 것을 보아도 이제는 참된 진리의 실재성(實在性)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신(神)이란, 宇宙靈魂 혹은 宇宙精神(Cosmic Spirit)이라고 해도 좋고, 宇宙知性으로 표현해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神은 하나의 巨大한 思惟입니다. 그 思惟에 의해서 진행되는 과정이 이 宇宙界인 것입니다. 人間의 意識은 그 思惟에서 分射된 스펙트럼에 지나지 않습니다. 宇宙의 本質은 物質이 아닌 영적지성(靈的知性)으로 그 영적지성의 본질이 神의 思惟입니다.
人間이라는 것은 自我意識을 가진 에고(Ego)와 普遍的 靈的 存在와의 結合體입니다. 前者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인간은 有限하고 高級스러워진 物質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갇혀 있던 자아의식이 열리고 後者의 존재를 認識하게 되면, 人間에게는 無限한 可能性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窮極的으로 普遍的 精神과 合體가 됩니다. 신(神)과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宗敎는 宇宙의 精神的인 本質과 一體感을 經驗한, 神秘 體驗을 가진 人間이 그 우주의 정신적인
본질을 諸各各 다르게 表現함으써 생겨난 것입니다. 즉 그 우주의 정신적 본질에 대한 원초적 체험은
본질적으로 같지만 그러나 그것을 表現하는 段階가 되면 그 時代, 그 地域 文化의 限定을 받고 맙니다.
모든 기존 종교의 틀은 限定되어 있고 좁기 마련입니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틀은
너무나 좁기 때문에 그 전통적 교의가 자행하는 인간 의식을 속박하는 일은 너무나 해가 큽니다.
인간적 에고(Ego)에서 벗어나면 이 세계가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에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知覺 저편의 精神的 世界가 보이기 시작하고, 자기가 지금까지 眞理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보다 큰 眞理의 一部에 지나지 않는다는 事實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意識의 變革, 시각(視角)의 轉換이 모든 것의 열쇠임을 모든 宗敎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회개하라" "다시 태어나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희랍어로 '회개'는 '메타노이아'라고 합니다. 그것은 무슨 나쁜 짓을 저질렀으니 그것을 반성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我執을 버리고 世界를 전혀 다른 觀點에서 보면 精神的 世界가 이미 지금 여기에 있다는 뜻입니다.
힌두 전통의 '소마티'라는 것도, 불교의 '니르바나'도, 혹은 신비 사상에서 말하는 '조명(照明) 체험'도
모두 같은 말입니다.
神秘的 體驗의 特徵은 그 체험에는 언제나 '宇宙 感覺(Cosmic Sense)'이 있다는 점입니다.
위대한 精神的 先覺者들은 地上에 있으면서도 宇宙 感覺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저는 시작도 끝도 없는 광활한 宇宙 空間에 나갔던 行爲를 通해 그것을 體驗한 것입니다. 宇宙虛空에서는
普通사람도 宇宙 感覺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주는 그런 체험을 하는 데는 가장 좋은 장소입니다.
人類의 進化 方向은 뚜렷합니다. 人間 意識이 精神的, 靈性的으로 보다 盛熟하고 擴張되는 方向입니다.
장차 지구 생물에서 우주 생물로 進化해 갈 것입니다. 즉 예수라든가 석가, 마호메트 등은 일찍부터 이런
進化의 方向을 人類에게 적시해준 선구자 입니다. 어떤 進化건 種 全切가 바뀌기 前부터 進化의 方向을
앞질러 보여주는 種의 個體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출처 :우주의 비젼 (Cosmic Vision)
'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고/자아의식/자아관념의 환상 놀음에서 벗어나자 (0) | 2014.01.01 |
---|---|
마음의 흐름을 잘 관찰하면서 함께 타고 흐를 뿐~~~!!! (0) | 2013.12.30 |
[스크랩] `대자보 붙인 고등학생 징계하겠다` 청소년들 대자보 곳곳서 수난 당해 (0) | 2013.12.28 |
[스크랩] "`안녕들 하십니까` 순간적 이벤트로 끝내선 안 된다" (0) | 2013.12.28 |
그냥 그런대로 살아갈 수도 있다 (0) | 2013.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