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거사 진영(日 동경박물관 소장).
‘지금 여기’의 거사선
宇宙를 삼킨 大自由人 방거사 ①
요즘 유행하는 SNS(Social Network Service) 가운데 지성인과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페이스북을 이용하다 보면, 재가 불자들은 자신의 종교를 쉽게 드러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SNS에서는 “정치나 종교 이야기를 하면 친구를 잃는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여서 종교적인 발언을 하기도 어렵거니와, 기독교인들이 다수인 세상이다 보니 불자들은 더욱 소심해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자기의 종교적 신념에 확신이 있다면, 구지 불교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마음공부와 연관된 좋은 글과 사진으로 얼마든지 시민들을 진리로 이끌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어렵게 불법(佛法)을 만난 재가자라면 응당 眞理에 대한 確固한 믿음과 自負心으로 세간에서 불자다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삶을 영위할 때 비로소 ‘거사(居士)’라는 호칭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조정사원』에서는 ‘거사’를 네 가지 덕을 갖춘 인물로 정의하고 있다. 그것은 관직을 탐하지 않고, 욕심을 줄여 덕을 쌓고, 재산이 있는 큰 부자이며, 불도(佛道)를 잘 수호하며 깨달음을 체득한 재가자를 가리킨다. 이처럼 법력(法力)과 재력(才力)을 갖춘 거사들이 활약하는 시대에는 불교가 찬란히 꽃필 수 밖에 없다. 印度의 유마 거사, 韓國의 부설 거사와 함께 3대 거사로 손꼽히는 방 거사가 활약하던 당 나라 때야말로 대승불교 특히, 선종의 전성기라 할만하다.
방 거사[龐蘊: ? ~ 808]는 중국 당나라 때 호남성(湖南省) 형양(衡陽) 사람으로 이름은 온(蘊)이고 자는 도현(道玄)이다. 아버지가 형양 태수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친구 단하와 과거시험을 보러가다가 주막에서 한 스님을 만나면서 진리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 “선관장(選官場)에서 관료가 되기보다 선불장(選佛場)에서 부처 되는 것이 으뜸이다” 는 스님의 말에 성불을 발원하고 당대의 선지식인 석두희천, 마조도일 스님 문하로 들어간다. 친구 단하는 훗날 목불을 태워 사리를 찾던 단하천연(丹霞天然) 선사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방 거사는 석두 선사와 마조 선사의 법을 이은 거사로서 약산유엄, 단하천연 선사 등 제방의 뛰어난 선승들과 많은 선문답을 나누어 선종어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재가 불자가 되었다. 원래 부호(富豪)로 잘 살다가 견성오도한 후에 전답(田畓)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재(家財)도구는 동정호(洞庭湖)에 내던져 버린 후, 그의 처와 딸 영조(靈照), 아들과 함께 초가삼간에 몸을 담아 돛자리를 짜고 짚신을 삼고, 대나무로 조리를 만들어 팔면서 청빈하게 살았다. 한국의 부설 거사 가족처럼 온가족이 모두 불법을 깨달아 재가수행자의 전범이 된 거사는 세간과 총림에서 모두 존경을 받은 선지식으로서 오늘날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분이다. 중국 호북성(湖北城) 의성(宜城) 방거촌(龐居村)에 소재한 동굴 방거동(龐居洞). 萬法과 짝하지 않는 것은 당신의 ‘性稟’이다
이제 방 거사의 고준(高峻)한 살림살이를 알아보자. 『벽암록』 ‘평창(評唱)’에 따르면 龐 居士는 석두(石頭) 선사를 처음 찾아갔을 때 이렇게 질문했다고 한다.
“萬法과 짝하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선사가 거사의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깨친 바가 있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날마다 하는 일 별다른 것 없네, 나 스스로 마주칠 뿐이다. 사물에 대해 취하고 버리려는 망심이 없고, 곳곳마다 펴고 오무릴 차별심도 없으니, 붉은 빛 자주 빛을 그 누가 분별하리오! 청산은 한점 티끌마저 끊겼고, 신통과 묘용이란 물 긷고 나무하는 일이로구나.’
이 문답에서 ‘만법(萬法)’은 온갖 現象과 存在를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萬法과 짝하지 않는 사람’이란 外部의 境界에 影響을 받지 않는 存在이다. 現象世界의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깨달음과 미망, 부처와 중생 등 온갖 分別心에 執着하거나 매이지 않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自由로운 存在를 象徵한다. 卽, 三界 속에 있지만 삼계로부터 벗어나 있는 自己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자 主人公, 佛性, 自性, 性稟이 무엇인가 하는 根本的인 話頭이다.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한 존재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石頭 禪師는 물음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입을 틀어막으며 말문을 막아버렸다.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以前, 선도 악도 생각하기 以前, 시간과 공간이 창조되기 以前의 本來자리를 어찌 分別意識으로 알 수 있겠는가. 석두 선사는 本來心의 당체(當體)가 ‘온갖 마음의 作用이 미치지도 못하고[心行處滅] 언어조차 끊어진[言語道斷]’ 자리임을 일러준 同時에 또 하나의 秘密스런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입을 틀어막는 무념행(無念行)을 통해 佛性의 智慧作用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質問에 대한 答이 바로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이것'이 '그것'이라고 힌트를 주고 있다.
分別心ㆍ執着心 없는 無爲行으로 마음 텅~비우면 곧바로 ‘부처’
여기서 방 거사는 느낀 바가 있어서 ‘문 없는 문’의 문고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 확철대오를 한 것은 아니어서, 곧 마조(馬祖) 대사를 방문하고 똑같은 質問을 하게 된다.
“萬法과 짝을 삼지 않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대가 서강(西江)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셔버린다면 대답해주마.”
마조 대사의 거침없는 대답에 방 거사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비로소 自身이 온 世上의 물은 물론, 宇宙를 한 입에 삼켰다 뱉을 수 있는 삼계(三界)의 主人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모든 의문을 한瞬間에 절단해버리는 마조 대사의 방편을 통해 언어 以前, 생각 以前의 本來心을 證得한 방 거사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대사께 지어바쳤다.
시방에서 행자들 모여들어 十方同共聚 모두가 제각기 무위를 배우나니 箇箇學無爲 여기는 부처 뽑는 과거장이라 此是選佛場 마음 비워 급제해 돌아가노라 心空及第歸
이 게송에서 [心空]‘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수행의 핵심적인 方便임은 누구나 알지만 실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입으로는 “수행을 한다”, “불교를 공부한다”고 하지만, 거기에는 大部分 目的意識이 깔려 있다.
수행을 통해 자기 만족이나 명예, 건강과 행복과 같은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는 마음 즉, 執着心과 欲望心이 潛在意識 속에 숨어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가 目標로 하는 깨달음이나 열반은 얻을 바가 없고[無所得法], 그 무엇이라고 정해진 것도 아니다[無有定法]. 그러니 무엇을 얻거나 추구하는 욕망이 눈꼽만치라도 남아있다면 그르치고 만다.
이런 점에서 방 거사는 “무위(無爲)를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함이 없다’는 것은 人爲的인 造作이나 固定觀念, 執着, 分別心, 치구심, 欲望이 없는 무념행(無念行)을 말한다. 이른바 육조혜능 대사가 『금강경』 설법에서 깨친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應無所住 而生其心]”는 法門과 같다. 따라서 선(禪)을 닦는 수행자라면 늘 求하는 마음 없이, 좋으니 싫으니 하는 分別心 없이, 깨달음이니 열반이니 하는 그 무엇에도 집착하거나 끄달림 없이, 그 무엇도 ‘하는 바 없이’, ‘닦는 바 없이 닦아야[無修之修]’ 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음공부를 한다는 것은 밥 먹고, 똥 싸고, 일하고, 잠자는 24시간 가운에 이뤄져야 함은 물론이다. 수덕사 방장을 역임한 故 원담 선사께서 즐겨 쓰시던 휘호에는 이러한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十二時中 不作一物(24시간 내내 하나의 妄想도 짓지 말라)’.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固定觀念과 執着 없이 對相과 '하나'가 되어 무심(無心)으로 行한다면 그 行이 바로 無爲行이요, 물 긷고 땔 나무 나르는 신통묘용(神通妙用)일 것이다.
푸른바다 김성우(도서출판 비움과소통 대표) * 이 글은 월간 <고경> 2013.09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
'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백산의 갑오년 새해 인사! (0) | 2014.01.03 |
---|---|
새해 아침에 띄우는 편지 (0) | 2014.01.03 |
마음 법의 선물-3 (0) | 2014.01.01 |
에고/자아의식/자아관념의 환상 놀음에서 벗어나자 (0) | 2014.01.01 |
마음의 흐름을 잘 관찰하면서 함께 타고 흐를 뿐~~~!!! (0) | 2013.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