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회를 시작하려고 나오는데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지금은 좀 그쳤네요. 이제 신정 1월 1일이 지나고 곧 설날이 다가옵니다. 사실은 하루하루가 계속해서 반복이 되고 있지만, 이렇게 우리가 한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한해 한해 끊어서. 그 다음 해, 그 다음 해를 새롭게, 새로운 한해라고 生覺하고 여기고 있는데, 거기는 아마 특별한 어떤 이유가 있을 거 같습니다. 그 이유는 보통 우리는 비슷한 일을 반복하게 되면,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서 그것이 나에게 익숙해지게 되면, 익숙해지면서부터 그것이 새로워지지 않게 됩니다. 새롭지 않고, 늘 하던 것들, 늘 하던 것이고 내가 익숙한 거니까 대충대충 넘기는 경우가 많죠.
그러다보면 똑같이 하루를 살았지만, 그냥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를 단순히 반복해 살았을 지언정, 뭔가 새로움이 넘치는, 뭔가 내 안에서 그것을 통해 새롭게 뭔가 배우거나. 이런 어떤 새로운 經驗들이 없어지게 됩니다. 같은 것이 그냥 반복되는 삶일 뿐이죠. 삶의 어떤 정체가 됩니다. 그런 예가 있습니다. 우리 삶은 만약에 우리가 더 이상 이 육신을 가지고 이 존재를 가지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면, 여기서 배운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겁니다. 삶이라는 경험을 통해 배울 것이 없다면, 生命을 이제 앗아가기도 한다. 생명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으니까. 이 생의 목적은 끝났구나. 다음 생에 가서 새로운 몸을 받아서 새로운 어떤 위치로서, 새로운 어떤 삶의 모습으로서, 새롭게 시작함으로서, 뭔가 새롭게 배워나가는 것이죠.
그 말은 우리가 늘 뭔가 틀에 갇혀서 똑같이 쳇바퀴 돌듯이 돌게 되면 그것이 우리를 뭔가 깨어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아마 제일 힘든 일은 우리가 정말 힘든 일을 많이 해가지고 힘든 것이 아니라, 도저히 하는 일이 없을 때, 하는 일이 없어서 백수로 노는 것이 하루 놀고, 이틀 놀기가 재미있지, 일을 하다가 휴가를 받으니까 그 휴가가 달콤하게 느껴지고, 아깝게 느껴지는 것이지, 며칠만 놀기 시작하면 노는 것처럼 사람을 힘들게 만들고, 괴롭게 만들고, 지치게 만들고, 차라리 나를 누가 들볶아 줬으면 좋겠고, 누가 나를 밤새도록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고,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意識이 쉬고 있는, 그냥 쳇바퀴 돌듯이 똑같은 반복되는 그런 삶이 이어지는 것이 즐거움인 것 같지만 그것은 결코 즐거움 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새로운 한해가 시작됨으로서, 한해가 시작되면 누구나 뭔가 지나간 한해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한해를 설계하고 이러거든요. 이렇게 새로운 한해를 맞으면서 해야 될 것이 먼저 지나간 한해에 대한, 이 지나간 한해라는 것은 꼭 작년 한해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가지고 있었던 수없이 많은 어떤 執着들, 固執들, 慾心들, 欲望들, 罪業들, 惡行들, 이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 작업을 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 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 삶의 구조로 살펴보면 저절로 참회하지 않을 수가 없고, 지나간 과거의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참회라는 말도 많이 쓰지만, 비움이라는 말을 많이 쓰죠. 비워야 된다. 참회한다는 거는 내가 잘못이 있으니까, 그 잘못을 스스로 참회해야 되겠구나. 이런 의미로 다가오기가 쉽기 때문에 비우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죠.
비우는 건 뭐냐 하면 本來, 本來 그렇게 잡을 게 없었고, 本來 그렇게 怨望할 게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는 진짜인 줄 알고 붙잡아 왔기 때문에, 그것을 있던 대로, 있던 자리로 되돌려 놓기만 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나라는 存在는, 우리라는 存在, 여러분이라는 存在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이라는 곳은요, 우리가 生覺하기에 진짜처럼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제가 이런 일, 저런 일 하다가 사람들과도 이야기 나누고 이런 저런 일들을 하다가요, 문득문득 그런 말을 툭툭 내뱉고 싶은 때가 많습니다. 그냥 이야기 하고, 밥 먹고, 이야기 나누다 말고, 문득 이런 말을 사실은 던지고 싶어요. 事實은 이게 다 정말 꿈에 불과한 것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진짜가 아닌데, 진짜인 것처럼 너무나도 놀랍게 닮아 있는 신기루이고, 幻影이고, 그림자고, 물거품일 뿐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敎理的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色受想行識이라는 物質의 世界와 精神의 世界가 그저 부딪히면 因緣 따라 잠시 만들어지는 虛象일 뿐이죠. 제가 이렇게 강의를 하다가 한 번씩 화를 버럭 내는 소리를 냈더니, 우리 장병들이 자다말고 번쩍 깨면서 갑자기 확, 놀랍니다. 그래서 탁! 쫄아 있어요. 그래서 “야, 내가 이렇게 화를 내니까 깜짝 놀랬지? 그 전에 하고 마음이 어떻드나?” 편안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화를 버럭 내니까.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긴장하고 있단 말이죠. 그러다 다시 얘기를 하고 나면, “아, 그냥 일부러 한번 한 거구나.” 하고 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평화롭던 법회를 듣고 있는 이 평화로운 평온, 이 시간에 강의를 듣고 있는 그 시간에, 편안하게 강의를 듣고 있다가 갑자기 “내가 뭐 잘못했나?” 싶어서 확, 쉽게 말해 쪼는 마음이 생긴단 말이죠. 두려움이 생긴단 말이에요.
그러다 그게 아니구나 싶으면 그 두려움은 바로 사라져버립니다. 누구가가 나를 미워하고 나를 원망하고 나를 욕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을 너무나도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그 사람을 아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고 났더니 알고 봤더니 그 사람이 나를 욕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욕했는데, 나는 나 혼자 “나를 욕했구나.” 하고 착각했던 거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그 사람이 더 이상 미워질 일이 없겠죠. “아, 내가 錯覺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미웠던 거지, 그 사람이 실제 미웠던 사람이 아니었구나. 내가 단지 착각했던 것 뿐이구나 하면 그 사람에 대한 미운 마음이 완전히 사라질 수밖에 없겠죠. 그거와 마찬가지로 이 삶이 진짜라고 느끼면, 생생한 이 물질로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이게 天上世界의 모든 天神들은, 이 33天에 있는 수없이 많은 레벨의 수없이 많은 천상세계 신들은, 우리와 다른 것, 인간과 다른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肉身이 있고 없고의 差異겠죠. 물론 意識의 차이도 나겠지만, 높은 의식을 가진 사람도 있으니까. 육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천상세계의 신들도 인간계에 내려오면 육신에 갇히기 때문에, 肉身이 가지고 있는 特別한 점이 뭐냐 하면, 모든 것이 진짜처럼 느껴진다는 겁니다. 눈으로 생생하게 보이고, 만져지고, 하다보니까 진짜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人間界로 내려오기 전에는 천상세계에 살고 있을 때나, 그 티벳 사자의 서 같은데도 보면, 우리가 죽고 났을 때의 意識이 맑게 깨어있을 때를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그때의 意識에서는 이렇게 우리가 이렇게까지 肉身에 執着할 줄은 꿈에도 生覺을 못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 천상세계의 신들, 여러분들이 인간계에 오기 전에, 인간계를 계획하고 내려 올 때만 해도, 내가 육신을 이렇게 까지 同一視하리라고는 想像도 못하고, 그러나 이 육신이 필요했던 이유는, 삶을 깨닫는데 있어서 생생한 게, 생생하게 부딪힘으로서 깨달을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머릿속으로 “야, 이건 꿈에 불과한 거야. 幻影에 불과한 거야.”라고만 안다면 “정말 그렇구나.”라고 느낄 수 있겠습니까? 못 느낍니다. 그런데 그것은 뭔가 실질적으로 내가 體驗하고 부딪혀서 느낀다면 그것을 깨닫기 쉬워지겠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났는데, 그 태어난 目的은 이 物質世界 속에서 이 인간이란 어떤 세계 속에서 눈귀코혀몸뜻으로 色聲香味觸法을 接觸하는 것을 通해서 조금도 진짜처럼, 생생하게 느끼는 經驗을 通해서 보다 진한 깨달음을 얻으라는 목적입니다.
보단 진한 깨달음을 얻어라. 그런 목적으로 그런 物質世界의 幻影이 實際인 것처럼 드러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게 물질세계가 이 몸뚱아리가 너무 진짜처럼 느껴지다 보니까, 여러분들이 배고플 때, 몸이 막 배고픔을 느끼지 않습니까? 추울 때 몸이 막 추워서 죽겠잖아요. 그런 것처럼, 그런 것들을 느낄 때 무엇이 느껴지냐 하면 생생하게 몸이 갈증을 느끼고, 몸이 추위를 느낀단 말이죠. 그럴 때 어떻게 우리가 “이것이 꿈이구나.”라고 느낄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건 다 꿈이야. 꿈이니까 배고파도 괜찮아. 추워도 괜찮아. 이건 어차피 꿈일 진데 어차피 뭐 상관있겠어? 하기가 힘들단 말이죠. 그러다 보니까 “아, 이건 진짜구나. 내가 배고픈 것은 實際구나. 내가 돈이 없어서 맛있는 것도 못 사먹고, 좋은 차도 못 차고, 좋은 집에도 못 사는 거, 기름 값이 없어서 기름도 못 대는 거, 아 이거 實際구나.” 이렇게 느끼면서
이 몸뚱아리를 가지고 사는, 이 色에 매여서 사는, 이 몸뚱아리의 人間界를 實體化 시키기 始作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완전히 實體化시키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物質的으로 存在한다고 해서 그게 진짜로 存在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이 物質世界를 가지고 實體라고 錯覺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부터 이게 실제이다 보니까, 실제니까 이건 더 잡아야만 되는 거예요. 배고 고프니까 배를 불러야만 되고, 돈이 없으니까 돈을 벌어야만 되고, 이건 하나의 꿈일 뿐인데, 모험일 뿐인데, 그래서 놀이하듯이 할 수가 있는 것인데, 꿈을 꿀 때 꿈이라고 아는 사람은 꿈속에서 그 무엇이 나오더라도 괴로워하지 않고, 꿈속에서 꿈을 즐길 수 있듯이, 人間界에 온 目的이 뭔지만 안다면, 인간계에 온 목적은 달성할지언정, 이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텐데,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단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지금 여러분들이 못 깨닫는 것에 대해서, 내가 空虛한 幻像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거에 대해서 괴로워 할 필요도 사실은 없습니다. 그래야만 이 인간계가 더 진짜처럼, 더 생생하게 느껴지니까. 우리는 그 생생하게 느껴지는 錯覺 속에서 삶을 배워나가고 깨어 나가야 하는 존재거든요. 그러나 그것의 短点은 뭐냐 하면 괴로움을 가져 온다는 것이죠. 너무나도 생생하게 진짜인 것 같은 괴로움을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남들보다 돈이 없을 때, “아, 저 사람은 조금 더 많이 가지고 노는 꿈을 꾸고 있구나. 나는 조금 더 적은 것을 가지고 알차게 쓰는 꿈을 꾸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함으로서 내가 지금 내 차례가 무엇인지, 이 제가 차례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輪廻라는 것은요, 돌고 도는데, 윤회는 이 우리가 윤회를 힌두교적으로 잘못 생각하는 윤회방식은 뭐냐 하면요, 선업을 지은 사람은 계속해서 선한 세계로만 계속해서 윤회하고, 악업을 지은 사람은 계속해서 악의 세계로만 윤회한다. 그 業報는 정해져 있다.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그 輪廻의 目的은 業報를 받게 하는 것만이 目的이 아닙니다. 業報라는 것은 윤회의 세계에서 우리가 받아야 되는 하나의 법칙일 뿐인 것이지, 더 깊은 意味는 그게 진짜 意味가 아니라는 것이죠. 佛敎에서 말하는 輪廻의 意味는요, 輪廻를 하는 目的은 歸依해 나가기 위한 겁니다. 本來부처를 깨달아나가기 위한 目的이다. 즉 우리가 내가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나쁜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그렇게만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宇宙意識이우리를 돕고자 하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깨닫기가 가장 좋은지를, 最適化 된, 諸法實相이라고 해서 내 앞에 펼쳐진 그 狀況은, 그 삶은 나에게 最適化 된 狀況이다. 모두가 實相이다. 참된 모습으로서 온다. 이 말입니다.
만약에 업보만이 존재한다면, 힌두교적인 업보만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그렇게 얘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實相이라고 할 수가 있겠어요? 악업을 받는 순간은 괴로운 순간일 뿐이겠죠. 그런데 쉽게 말해서 악업을 아무리 많이 저질렀어도 끊임없이 그 사람은 악업만 받는다? 그렇지 않습니다. 악업을 받는 이유는 그 악업, 그 괴로움을 통해서 내가 뭔가 깨달아야 될 것이 있을 때만 그 악업이 옵니다. 악의 과보가 옵니다. 내가 그 報를 통해서, 이 狀況을 통해서, 이 괴로움을 통해서, 깨달아야 될, 배워야 될, 경험해야 할, 그 속에서 깨닫고 해야 될 무언가가 있을 때만 온단 말이죠. 왜냐하면 輪廻의 目的은 나를 地獄에다가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징벌을 줌으로서 지옥에다가 끊임없이 거기다가 붙잡아 놓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無限한 慈悲와 사랑으로서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한, 그런 無限한 慈悲心으로서 오기 때문에, 이 상황을 안다면 우리에게 처해있는 그 모든 괴로움, 아픔, 내가 저질렀던 잘못들, 내가 가지고 있던 욕심과 집착들, “이거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해. 적어도 이 정도는 내가 되어야 돼.”라고 붙잡고 있었던 그것들이 “아! 참, 한바탕, 그야말로 한바탕 꿈에 불과한 것이구나.” 여러분들이 꿈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이게 實際로구나 라고 강력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점점 더 실제라고 느끼면 느낄수록, 삶은 더 무시무시한 어떤 생존투쟁의 장이 되어 버립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힘들 때 그 사람을 돌봐주고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이런 어떤 사랑과 자비가 넘쳐나는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내가 남을 딛고 일어나야 되고, 내가 이 많은 사람들보다 더 높은 자리를 올라가야 하고, 그래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어떤 생존 투쟁의 장으로 전락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欲望과 慾心이 커지죠. 이게 實體化가 되면서 커집니다. 이게 空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가짜라는 걸 안다면, 이게 그렇게 과하게 커질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깨닫지 못하고, 진짜라고 錯覺하는 마음을 가지고 삶을 자꾸 하루 이틀 이어가며 살다보니까, “이게 정말 진짜구나.” 진짜구나라고 느끼니까 나의 아픔도 진짜라고 느끼고, 내가 놀았던 것도 진짜라고 느끼고, 성공이라 하는 것도 어떤 實體的인 내 具體的인 目的이 되어버립니다. 내 직업이 있다. 이 職業도 잠시 因緣 따라 인연 따라 최적화 되어서 나에게 지금 이 직업을 통해 내가 깨달아야 될, 배워야 될 뭔가가 있기 때문에 그 직업이 지금 이 시간까지 온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뭔가 더 배우고 더 깨달아야 것이 없다면, 우리 삶은 이렇게 단편적인 게 아니거든요. 백년이면 끝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뭐, 7~80년 살고 끝날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無限한 어떤 삶을 살아야 될 것인데, 눈 한번 감았다 뜨는 정도의 시간밖에 안 되는 거예요 宇宙 全切의 時間으로 본다면. 그런데 그 짧은 시간동안,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職業이, 이 돈이, 이 名譽가, 이 權力이, 이 所有가 이것들이 나의 實體라고 錯覺하면서 이것들에 목숨을 걸고, 목을 매고, 온 意識을 거기에 集中을 해가면서 산다는 게, 얼마나 참 황당스러운 일이고 어이없는 일입니까? 重要한 점은 이 物質이라는 存在는요, 刹那밖에 안 되는 겁니다. 宇宙에서 본다면, 저 天上世界에서 본다면, 刹那밖에 안 되는, 잠깐 시간, 잠깐 꿈꾸고 일어나는 짧은 시간밖에 안되는데, 이 짧은 시간밖에 안 되는 이 物質世界의 잠깐 時間을 진짜라고 錯覺해서, 내가 남들보다 더 올라가려고 그 사람을 짓밟고 일어나고, 이런 다는 게 얼마나 황당스러운 문제입니까?
가장 重要한 事實은 뭐냐 하면요, 이 物質世界가 100년 밖에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意識, 마음은 어떻습니까? 이 물질적인 몸뚱아리는요, 몸뚱아리와 몸뚱아리가 處해있는 狀況이라는 것은, 수 없이 많은 시간 가운데 찰나찰나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意識/마음은 지금 이 瞬間의 刹那 말고 全 時空을 超越하는, 초월해서 모든 것을 넘어 설 수 있는 그 자리입니다. 그 根源의 자리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理由는 이 마음/의식을, 이 중요한 마음/의식을 가지고, 이 마음/의식을 내가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쓰느냐의 한 生覺이 全 과거생, 수억겁, 수백수천생의 수억겁의 모든 생의 業障을 한방에 消滅시킬 수도 있고요, 지금 이 瞬間의 한 生覺이 時空을 超越해서 모든 삶을 지금 이 瞬間에 깨달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마음을, 이 소중한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을 가지고, 이 백년도 안 되는 진짜배기도 아닌, 진짜처럼 보이기만 하는, 이 虛妄한 物質世界에 執着하느라고, 執着하고, 증오하고, 미워하고, 容恕하지 못하고, 나만 잘되라고 마음을 내고, 욕심 부리고, 그러는데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얼마나 황당스러운 짓입니까? 얼마나 해서는 안 될 짓입니까? 이 정말 한 순간의 꿈밖에 안 되는, 이 실제가 아닌, 실제처럼 너무나도 생생하게 보일 뿐인, 이 物質世界에 幻想을 가지고 虛相에 執着하느라고, 이 중요한 마음/의식을 그렇게 쓰면 되겠느냐 하는 거죠. 왜냐하면 이 마음/의식이 中心이 되어서 내 미래를 만들어 냅니다. 내 삶을 만들어 냅니다. 백%, 뭐 한 50%정도는, 아니면 한 7~80%정도는 어떤 絶對者가 있어서, 造物主가 있어서 내 인생을 내 삶을 딱 만들어 내고, 한 2~30%정도는 내가 딱! 결정지을 수 있다? 그게 아니고, 순도 100%를 내 마음/의식이 스스로, 내 삶을 결정짓는다.
무엇으로? 내 마음으로 내 삶을 결정짓는단 말이죠. 지금 이 순간에 내 마음/의식이 욕심과 집착을 연습하면요,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의식을 연습하면, 그것은 내 삶 전체를 과거생, 현재생, 미래생까지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 전체 생을 미움으로 물들이는 것이고, 집착과 욕망으로 물들이는 겁니다. 어리석음으로 물들이는 겁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 자비심을 내 던져 버린, 그런 마음으로 나의 삶 전체를 심지어 '진정한 나'라는 것은 바로 이 宇宙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宇宙 全切를 어리석음으로 물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말 엄청난 일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지금 내가 욕심을 부리고, 집착하고 누군가 미워하고 원망한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한마음이라는 것, 一心이라는 게 뭐냐 하면, 원효스님께서 그렇게 많이 말씀하셨던 일심, 한 마음이라는 게 뭐냐 하면요, 내가 지금 이 순간 일으킨 이 한마음이, 나의 과거와 미래 전체를, 시간과 공간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한마음이고, 내 이 한마음 하나가, 나와 남과 일체 모든 인류와, 욕계색계무색계의 일체 모든 중생들과, 짐승과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와 저 곤충들과, 이 우주에 전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와 連結되어져 있는 중요한 한마음이기 때문에, 그 한마음을 얘기를 한 겁니다. 그 한마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온 우주를 깨닫는 것이라는 게 바로 그겁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같이 살아가면서 쓰는 그 마음이 바로 이 한마음입니다. 이 일심이라는 시간 공간 쪽으로 온 宇宙 모든 것 全切가 다 連結되어져 있는 이 한마음을 가지고, 즉 이 부처의 마음을 가지고, 한마음 쓴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 위대한 한마음을 가지고, 일심을 가지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한다? 그것은 강력한 힘을 가집니다. 강력한 힘을 지닌 채 내 삶을 그렇게 만들어냅니다. 나의 미래가 누군가로부터 원망 받는, 증오 받는, 그런 어떤 욕심에 찌들린 이런 어떤 삶으로 내 인생이 바뀔 수밖에 없단 말이죠. 그런데 그런 일들을 하면서 살아 갈 것이냐? 과거에 지었던 그 많은 죄업이나 욕망 이런 것들을 지금까지도 계속 붙잡고 갈 것이냐? 그것이 아니다. 라는 걸 빨리 깨달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실은 뭐, 한해가 지나서 한해가 아니고, 하루가 지나서 그 다음 아침이 아니고, 일주일이 지나서 내일이 월요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그 事實을 깨달음과 同時에, 지난 過去의 모든 貪瞋癡 3毒과 모든 아픔과 이 모든 것들을 “아, 이것이 다 空한 것이구나.”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 잘못 저지르고 나서 “잘못 때문에 너는 地獄 갈 거야.” 그런 얘기를 지금까지 잘 믿어 오셨잖아요. 그래서 두려워 해가면서 살아오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얘기는 안 듣느냔 말이죠? 어떤 얘기? 과거에 저지른 그 어떤 잘못이라도 괜찮다. 괜찮다. 우린 아무런 잘못이 없다. 우리는 根源에서 그 어떤 잘못도 없다. 단 한 가지,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만 빼고. 내가 나 자신을 지금 이 순간 용서해 주면, 나의 모든 과거 업장이 일시에 소멸되는데, 그것을 내 스스로 못하는 겁니다. 내 스스로 “나는 벌 받아야 마땅해. 난 이런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거기 果報를 받아야 마땅해.”라고 스스로, 스스로 결정을 내리니까 그 결정이 現實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마음으로 붙잡는 것은 모두 현실이 되기 때문에. 마음에서 내려놓으면 모두 空으로 돌아갑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붙잡아 오던, 貪瞋癡 3毒을 붙잡아 오던. 그런데 붙잡아 온 目的이 뭐냐 하면 진짜처럼 보이니까. 생생하게 物質世界가 진짜처럼 보이니까 붙잡았다는 거죠. 그런데 이게 진짜가 아니라는 건 科學으로도 證明이 되었고, 이건 진짜가 아닙니다. 배가 고프다고 해서, 막, 배가 고프지 않습니까? 밤에 배가 약간 출출한데, TV에서 맛있는 거 먹는 장면이 나온다. 갑자기 뭐가 먹고 싶지 않습니까? 먹고 싶은 마음이 진짜라고 우린 錯覺을 해요. 實體化 시킵니다. 그러니까 그 狀況 속에 딱 몰입이 되어 버려요. 그 狀況이 나라고 생각해요. 배고픈 게 나라고 생각하고, 그걸 보고 나서 배고픈 것이 실체인 줄 착각합니다. 그 상황에 함몰되어 있으면.
그런데 그럴 때요, 그냥 다른 걸 굳이 하지 마시고요. 지금 이 狀況을 觀察해 보시라는 거죠. 내가 배고픈 것을 가만히 관찰해 보는 겁니다. 배가 고파서 뭔가 자꾸 먹고 싶은 마음, 먹고 싶은 마음을 한번 가만히 바라보게 되면, 불을 딱 끄고 누워서 내가 진짜 먹고 싶은가? 이거 진짜 먹어야 되겠는가? 가만 불을 끄고 가만히 한번 마음을 관찰해보면 이 배고프다는 게 實體가 없구나. 아무리 찾아보려고 찾아 보려고 해도, 배고픔을 찾아보려고 해도, 도대체 배고픈 게 어디 있는가? 찾아보려고 이렇게 찾아보면 찾아볼 길이 없어요. 그렇게 바라보고 관찰하다보면 내가 먹으려고 했었던 그 욕망, 욕망이 떠올랐던, 그 因緣 따라 欲望이라는, 뭔가 먹어야 되겠다는 마음이, TV에서 맛있는 걸 먹는 장면을 본다라는 因緣 따라 잠시 내 內面에서 因緣 따라 올라왔던 幻影일 뿐이지. 이게 實體가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因緣이 合쳐지면 그냥 마음이 올라오는 거예요. 여러분들 지금은 아무 일 없다가 잘 사시다가, 갑자기 因緣이 어떻게 누가 친구가 이렇게 뭐, 재미있게 놀다가 우리 회비에서 돈 남은 게 있어가지고 복권 하나씩을 사줬는데, 갑자기 복권을 딱 보니까 한 100억이 당첨이 됐어요. 그러면 그 당첨 됐다는 그 因緣 따라 갑자기 慾心이 생기기 시작하고, 갑자기 이 돈 절대 누구 주면 안 될 거 같고, 절대 나 혼자 써야 될 거 같고, 아내에게도 뺏기면 안 될 거 같고, 자식에게도 뺏기면 안 될 거 같은 마음이 생긴다니까요. 지금은 그런 마음이 안생기지 않습니까? 우린 돈이 없으니까.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과도한 돈이 생기면 그런 因緣 따라 마음이 생긴다. 그러니까 因緣 따라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옛날 왕들이 권력 가지고..자식과도 싸우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 나쁜 놈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因緣 따라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因緣이 모이면 그런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가 나쁜 놈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을 용서해줘야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은 진짜 나쁜 놈이 아니고, 그 사람의 因緣에서는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였어요. 왜냐하면 누구나 我相을 가지고 있으니까. 我相은 나만 잘되고자 하는 마음이거든요. 因緣이 모이면 我相은 動하게 되어 있어요. 누가 욕했는데, 욱! 하고 화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自然스러운 거예요. 자연스러움. 나쁜 게 아닙니다. 누가 나한테 욕을 했는데 내가 화를 내는 걸 보고, “나는 이렇게 화를 내다니, 나는 수행자가 아니구나, 나는 불자가 아니구나. 나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할 필요 없단 말이죠.
모든 것이 因緣 따라 自然스럽게 일어나는 겁니다. 남들도 마찬가지에요. 남들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내가 과거에 잘못되었던 것도 그런 因緣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왜? 우린 我相을 가지고 있는 存在니까. 그러니 나 自身을 용서해주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 自身을 존중하고 살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건 因緣 따라 일어난 것일 뿐이지 實體가 아닙니다. 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이 정말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고,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했고, 나를 욕한다고 생각했던 그 수많은 남들 또한, 因緣 따라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가만히 살펴보면요, 그 자신이 불자면 불교식대로 생각하는 거 같지 않습니까? 또 예를 들어, 性向에 따라서 또 자신의 어떤 이런 거에 따라 자신이 所信 껏 행동할 거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나에게 得이 되느냐? 안되느냐? 이걸 봅니다. 쉽게 말해서 公式을 가지고 “아, 이 사람이 정말 훌륭한 사람이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 사람은 나에게 도움이 되느냐? 안되느냐?” 이게 더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에게는. 이게 我相 때문에 그래요. 아상 때문에. 그러니까 自動的으로 計算이 끝내는 게 我相의 役割이거든요. 그런데 그런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쁜 놈이냐? 나쁜 놈이 아니다. 그 我相을 認定해 줘야 됩니다. 尊重해 줘야 됩니다. 相對方의 我相을. 그럴 수 있구나. 그럴 수 있어. 저 사람은 너무 이기적이야. 하고 손가락질 할 필요 없습니다. 누구나 利己的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利己的인 我相이 實體가 아니라, 空한,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그것을 굳이 미워해서 그렇게 미친 듯이 實體化해서 미워할 필요가 있겠느냐? 겉으로 용서는 않하지만, 내면에서는 아, 용서가 되는 것이구나.
그걸 다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구나. 이걸 붙잡게 되면, 저 놈이 밉다고 내가 붙잡고 있을 뿐이지만, 내가 죽는 것이구나. 내가 아픈 것이구나. 내가 어떤 空性의 自覺이 있다면, 이 物質世界가 진짜 배기가 아니라는 마음이 있다면, 그렇게 미친 듯이 붙잡지 않는단 말이죠. 그러니까 저절로 용서하게 되구요, 욕심도 최선을 다해서 그걸 향해서 달려가기는 하지만 되도 좋고, 안 되도 좋은 거예요. 그 무엇도. 이 세상 그 무엇도 되도 좋고, 안 되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最善을 다해서 달려가야 되는 거예요. 그러나 아님 말고, 그러나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가장 重要한 目的이에요. 우리가 삶을 살아가야 되는 강력한 이유가 됩니다. 최선을 다해서 아름다운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거예요.
그 누구도 犧生시키지 않고, 내가 그것이 좋아서 달려가는 겁니다. 이 달려가는 이 길에 누군가를 犧生시키면서 달려갈 필요는 없는 것이죠. 그렇게 熱情을 다해서, 에너지를 다해서 달려가지만, 하나도 흔적이 없습니다. 흔적이 없으니까 되면 돼서 좋은 거예요. 그러나 되더라도 우쭐한 마음을 가질 것도 없어요. 되도 좋을 것도 없고, 안 되도 나쁠 것도 없지만, 그냥 난 최선을 다해서 한다.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그러나 되더라도 과도하게 우월감에 빠져서 남들을, 안된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얕잡아 볼 것도 없고, 내가 잘 했다고 해서 우월감을, 또 내가 못했다고 해서 劣等感을 느끼거나 ,남들을 질투하거나,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죠. 어차피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니까.
이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그렇게까지 목숨 걸 필요가 있겠습니까? 목숨 걸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가볍게 인생을 살아야 됩니다. 가볍게. 심각하지 않게. 너무 무게감 갖지 않고, 그렇게 되면, 지나간 과거가 놓여 집니다. 이제. 진정으로 참회가 되고 용서가 되고, 놓여 집니다. 이제 내려놔지죠. 중요한 것은요, 여러분들이 과거를 내려놓는 순간, 전혀 새로운 '無限한 可能性의 存在인 나'를 발목잡고 있던, '無限한 可能性을 向해 열려있던 여러분들'이 과거에 발목 잡힌 사람들이 많거든요. 많은 게 아니에요. 다 그렇죠. 그런데 나를 발목 잡고 있던 것이 놓여 지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또 지금의 시대는 그런 시대가 열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옛날에 기존에 이것이 진리라고 느껴왔던 것들이 이제는 그것이 진리가 아닌, 또 다른 전혀 새로운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이 지금의 시대는,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있는 시대입니다.
옛날에는 나이가 들면 무조건 老化가 진행됐다라고 느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됐어요. 腦 細胞도 끊임없이 再生可能하다. 어느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까지 머리 쓰면 그 다음부터 못쓴다. 이게 아니라는 게 증명이 됐습니다. 우리 세포라는 것이, 늙고 나면 이게 더 빨리 죽고, 더 이상 생성이 안 된다고 錯覺하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다. 아니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반드시 한 100살쯤만 살다가 죽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사실은. 그런데 이게 意識/마음이 중요한 거예요. 내 의식/마음이 이 정도 나이 들면 늙어야 돼. 이 정도 나이 들면 죽어가야 돼 라고 굳게 믿고 있고, 그런데 이 잘못된 믿음이 個個人의 의식들이, 이 地球라는 全 人類의 集團意識으로서 굳어진 겁니다. 業도 集團的으로 되면 共業이 되듯이, 集團意識으로 굳어져 놓으니까, 지구라는 모든 존재들이 이 잘못된 믿음에 意識的으로 同意한 거예요. 아!~ 백살 정도 넘으면 아파야 되고, 늙어야 되고, 죽어야 되는 거야라고.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직전에 아난에게 “내가 한 1劫 정도 더 살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으냐?” 물어 보셨어요. 아난이 이건 내 상식으론 이해가 불가능한 얘기잖아요.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얘기에 대해서 적극적인 대응을 못합니다. 세 번을 묻는데 아난이 세 번다 똑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래. 지금의 중생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지겠구나. 80세에 그냥 열반을 스스로 選擇하신 겁니다. 이게 그냥 한 말이 아니에요. 事實은 우리 몸도, 우리 意識이 바뀌면, 바뀔 수 있습니다. 아픈데 어떤 불치병이 있느냐? 과학에선 불치병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불교에선 어떻습니까? 際行無常이에요. 끊임없이 變하는 것이지 定해진 건 없습니다. 어떻게 不治病이 있을 수 있겠어요? 그 어떤 病도 나을 수 있습니다. 뭐가 바뀌면? 意識/마음이 바뀌면. 그런데 우리는 그 의식/마음을 못 바꾸는 겁니다. 過去의 生覺의 틀에 박혀 있던 意識/마음을 결코 못 바꾸는 겁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의식 마음이 짓고, 마음 의식이 무너뜨리고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그 모든 것이.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그 모든 것들은 사실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의식/마음이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限界짓고 規定한 것이거나, 이 世上과 함께 同調해서 規定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 能力은 여러분이 制限하는 만큼 限定되지 않습니다. 그 制限/限界을 풀어내는 첫 번째 課題가 過去를 지난 過去를 完全히 텅~비우는 겁니다. 비움. 용서해주고, 참회함으로서 마음을 의식을 텅~비우는 겁니다.
그렇게 새롭게 새해를 맞는 겁니다. 새로운 하루를 맞고, 새로운 순간을 맞이하는 겁니다. 그랬을 때, 과거가 나를 발목잡지 않고, 어떤 制限된 意識/마음이 나를 발목잡지 않기 때문에 우린 그냥 말 그대로 새해가 열리는 겁니다. 새 삶이 열리는 겁니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하루, 전혀 새로운 아침 햇살을 맞을 수 있고, 전혀 새로운 눈빛으로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고, 똑같은 반복되는 직장을 아주 새로운 마음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올 이제 한해를 보내며, 한해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지난 과거의 모든 어떤 아픔들 이런 것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마음/의식을 완전히 텅~비움으로서, 그 모든 것을 이해해주는 겁니다. “아, 그럴 수도 있었어. 네가 나쁜 놈이라고 했던 게 아니라, 그 我相에서 그 意識 그 마음에서는 그럴 수 있었어.” 라고.
여러분들, 남들이 잘못했을 때, 그 사람이 지금은 개과천선을 했어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과거에 잘못했다고 그 과거를 뭐라고 그럽니까? 뭐라고 안하거든요. “아, 그때는 그 사람의 意識/마음이 그랬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바뀐 사람이야.” 지금 바뀐 그것을 찬탄해 주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과거는 그럴 수도 있었습니다. 그 어떤 잘못을 저지른다 할지라도. 그것이 我相의 屬性이니까. 내가 나쁜 놈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 그 나쁜 놈이라고 規定을 지을 만한 나라는 실체가 없으니까. 다만 因緣 따라 그 짓을 한 어떤 마음/의식이라는 녀석이 있었던 거예요. 그게 나라고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게 진정한 내가 아닌데, 내가 그런 罪意識에 사로잡혀오고 지금까지 사로잡힐 필요가 없죠.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나일 수 있어요. 나라는 게 없으니까. 그냥 어떠한 現象이 거기서 벌어졌던 겁니다. 어떠한 現象이 내 의식/마음 위에서 벌어졌던 것이 아니라, 그 텅~빈 時空 속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상대방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일이 어떠한 텅~빈 시공 속에서 그러한 事件이 벌어진 것을 내가 觀察했을 뿐입니다. 그 事件을 나와 同一視 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죠. 그럼으로써, 차차, 이제 意識이 깨어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意識이 깨어난다는 거는 뭘 意味하냐하면, 堅固하다고 느꼈던 것들, 確實하다고 느꼈던 것들, 진짜라고 느꼈던 것들, 이 모든 것들이 堅固하지도 않고, 진짜배기도 아니고, “아, 이게 참말로 텅~ 빈 것이구나. 實體가 아니구나. 내가 이렇게 까지 목숨 걸게 아니었구나. 아,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이었구나.”라고.
물론, 어떤 분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저보고 뭐 그렇게 줏대 없이 이렇게도 좋다 그러고, 저렇게도 좋다 그러냐? 어지간한 것들, 세상에 삶을 살펴보면요, 사실 이렇게도 좋고, 저렇게도 좋더라고요. 제가 미친 듯이 執着하고 固執해서, 반드시 이렇게 해서 이렇게 되야 된다. 이럴 필요가 없더라고요. 제가 옛날에 어렸을 때, 이렇게 단체 무슨 뭐 회장을 하고 이럴 때, 너무 執着이 심하고 너무 固執이 심해가지고, 그 저의 학교, 우리 모임의 선배님들을 제가 옳다는 確信 때문에 다 그야말로 틀렸다. 틀린 것은 다 없애야 되고, 새롭게 해야 된다. 그래가지고 완전히 그 분들은 다 나쁜 놈으로 만들면서 까지 제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固執해서 그걸 끝까지 하는 삶을 계속 그 회장을 하는 내내 그렇게 했더라고요.
뒤늦게 돌아봤더니, “야, 내가 이렇게까지 執着이 심했었구나. 이렇게 까지 固執이 심했었구나.” 그 고집이 심하고 집착이 심했던 때를 경험하고 나니까, 제 스스로가 더 많이 생생하게 느끼는 겁니다. “야, 그렇게 까지 사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문제인데, 그거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인데, 반드시 해야 된다는, 반드시 이런 방식으로 되야 한다는데, 너무 과도하게 고집하고 있었구나.” 그러니까 뭐랄까요? 웃긴 겁니다. 우스운 거예요. 뭐 별거 아닌 거 가지고 저렇게까지 사람들과 담을 쌓으면서 까지, 욕을 하면서 까지. 그것을 왜 고집했지? 싶은 겁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세 번 얘기를 하십니다. 그런데 3번 이렇게 하자 했는데, 아니라 그러고, 이렇게 하자 했는데 아니라 그러면, 4번부터는 “그래 그럼 그렇게 해라.” 언제나 그렇게 하셨어요.
심지어, 석가족을 멸망시키려고 유리왕이 군대를 이끌고 가는데, 한번 막아서고 두 번 막아서고 세 번 막아서고, 네 번째는 갈 때는 놔뒀습니다. 석가족이 전멸이 됐죠. 그 어떤 것도 미친 듯이 고집할 것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물 흐르듯이 가는 게 좋아요. 사실은 우리가 막 對立해가지고 싸우는 경우도 왜 싸우냐 하면요, “내 方式이 옳다. 내 生覺이 옳다. 이 사람이 옳다.” 이런 固執 때문에 그럽니다. 事實은 그 모든 分別을 내려놓고 보면, 이렇게 되도 괜찮은 부분이 있고 단점이 있고, 이렇게 안되도 괜찮은 부분이 있고 단점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한쪽만이 絶對的으로 옳다고 生覺하는 것은 내가 執着하고 固執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 세상은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습니다. 그런 것처럼.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意識을 가지지 않고 사느냐? 그게 아닙니다.
分明한 마음/意識을 가지고 에너지를 가지고 살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過度하게 執着하지 않으면서 自由롭게 柔軟하게 물 흐르듯이 無爲로서 해나갈 수 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고집을 내려놓고 무위로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더 강력한 힘을 지닙니다. 더 힘이 없는 거 같고, 더 강력한 리더십이 없는 거 같지만, 사실은 무위의 삶이 더 큰 힘을 지닙니다. 柔軟한 것이 强한 것을 이깁니다. 그래서 요렇게 마음이 좀 이렇게 “텅~ 비었구나. 이 세상이. 야, 이거 꿈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산다면 대개 自由롭게 살 수 있어요. 심각한 거 같이 고민하지만, 텅~빈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냥 平和로운 거죠. 어차피 이 세상 모든 것이 텅~빈 바탕에서 한바탕 내가 연극속의 연기를 하는 것이고, 한바탕 꿈속에서 함께 반응을 해주는 것 이지만, 본래 텅~빈 바탕 根源에서는 이건 아무것도 아닌 거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통해서 내가 배우고 깨달을 수 있다면, 나쁜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이 좋은 일입니다. 나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깨닫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삶을 대상으로, 이 삶이라는 것을 가지고, 붙잡고 와서 싸울 필요 없습니다. 삶과 투쟁할 필요가 없죠. 그래서
宇宙意識의 흐름인 삶의 흐름을 올라타고 흐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이 삶의 흐름을 타고 한해 나의 앞으로의 생은, 앞으로 온 새해는 정말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과도하게 긴장하거나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과도하게 욕망하거나, 과도하게 미워하거나, 과도하게 과거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내가 가볍게, 편안하게 즐겁게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마음/의식을 한번 가져보세요. 그냥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지 않습니까? 삶에 그 어떤 시빗거리가 없어지니까. 그렇게 좀 마음을 좀 가볍게 이렇게 사는 한해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법상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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