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지도 않은데 있다 하네 / 용타스님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계신 여러분들이야말로 이 도량의 주역 중에 주역이십니다. 오늘은 '金剛經의 世界' 를 주제로 법문을 합니다. 法門은 셋으로 요약하여 진행될 것입니다.
하나는 '金剛經과 삶' 입니다. 삶과 금강경, 금강경과 삶. 이 두 키워드가 쌍벽을 이룹니다. 이 때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는 금강경이 더 중요한가요, 삶이 더 중요한가요? 헷갈리죠?
그런데 가만히 生覺해보세요. 여러분들은 金剛經을 몰라도 잘 살아 오셨잖아요. 그래서 삶이 금강경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저는 이 세상 70억 인구가 금강경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금강경보다는 99.99%로 삶이 인생이 더 중요합니다.
금강경 같은 경전들은 없더라도 살아갈 수 있어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경전 以前에 自身의 삶을 1순위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경전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소중한 삶 위에다 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삶이 중요하다는 마음을 가지세요. 삶이 중요하기 때문에 금강경도 중요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 사람들의 삶을 觀察해 보세요. 여러분들 자신의 삶을 觀察해 보세요. 여러분들은 그나마 이 도량에 나들이 하면서 인생을 잘 사는 方法을 배웠기 때문에 삶의 質은 많이 높아져 있을 겁니다.
그러나 경전을 모르고 그냥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大部分 習慣的으로 삽니다. 습관적으로 살면 어때요? 습관적으로 살면 거의가 地獄의 意識水準 쪽으로 달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經典, 智慧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意識水準이 낮은 삶을 '중생 놀음'이라 부릅니다. '고통이 있는 사람' 을 衆生이라 합니다.
금강경과 삶이라는 두 키워드를 놓고 볼 때 '삶이 금강경 보다 絶對的으로 重要하다' 는 事實을 받아들임과 同時에 '내 삶이 제대로 되려면 경전 말씀, 성자들의 말씀을 배우고 익혀야 되는 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그것이 1박자입니다.
둘은 중생의 삶이란 무엇이냐를 이해해야 합니다. 衆生의 삶은 마음이 不安定하고 不安하고 苦痛이 많습니다. 이러한 중생의 삶이 있기 때문에 경전이 생겨 난 것이지요. 70억 인구 전부가 이러한 중생의 삶, 衆生心을 넘어선 聖者라면 세상의 모든 경전들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겠지요.
하지만 大部分의 사람들의 마음이 不安定하고 不安한 고통스런 삶을 살기 때문에 聖者들의 가르침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면 不安定한 삶이 뭔지 理解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여기다가 그림을 하나 그려볼게요. 이것은 '니르바나'입니다. 니르바나라는 말은 마음에서 苦痛이 完全히 사라진 완전한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니르바나의 마음狀態'로만 存在하지 못하고 타락을 하게 됩니다. 타락 이전의 니르바나를 無心, 無爲, 極樂, 天國, 太極, 太虛, 道, 無心淸淨, 眞理, 깨달음 등등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완전한 것'을 指稱하는 單語는 여기에 다 들어갑니다. 이 表現들을 국어사전 말로 바꿔놓으면 '槪念 以前' 입니다. '槪念 以前' 이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槪念 以前'의 '意識 狀態'가 니르바나, 극락, 천국, 태극, 깨달음 등등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을 조용히 돌아보세요. 한결같이 다 '槪念 놀이'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 너, 내 가족, 네 가족, 내 집, 네 집, 내 회사, 네 회사 등등 分離하고 分別하는 槪念을 쓰지 않으면 못살 정도로 無數한 '槪念 놀이의 삶' 을 삽니다. 곧 槪念이 前提된 삶이 되버린 겁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럼 '개념 이전의 삶, 세상' 은 어떠할까요? 우리들의 삶에서 窮極에는 돌아가야 할 삶은 '개념 이전의 삶'이요, '지금 여기 그냥 있음의 삶'입니다.
세 번 째는 '그냥 있음의 삶 / 자리'는 '無心한 자리'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이 자리입니다. 그냥 있음의 자리는 내 마음 속에서 分離 分別하는 一切의 槪念이 사라져 無心한 意識 상태, 無心한 마음 상태 즉,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이 자리가 되는 것이지요. 이리하여 一切의 걸림 없이 깨끗하고 고요하고 平和로운 '虛空과 같은 마음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槪念 놀이의 삶 以前' 으로 돌아 갈 수 있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無心으로 있지 못합니다. 槪念으로 '내가 있다, 네가 있다, 이것이 있다, 저것이 있다.'고 分離 分別하면서 줄기차게 槪念 놀음의 삶에 떨어지는 인생을 삽니다. 그러면서 '槪念 살이'를 當然히 괜찮은 人生이라고 錯覺하는 것입니다.
'있다'고 生覺하고 여기는 것만도 크나 큰 허물인데 그 보다 더 깊은 늪으로 墜落(추락)하면서 ' 있다, 좋다, 싶다, 썅' 합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 生覺해 보세요. 모두가 다 그러고 있을 것입니다.
槪念 以前의 無心한 狀態 즉, 어떤 分離 分別도 一切 없는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이 자리로 있지를 못하고 '있다, 좋다, 싶, 썅' 하는 槪念 살이의 인생을 쉼없이 살고 있지 않습니까!
'聖者의 삶'은 '있다', '좋다', '싶다', '썅' 등의 分離 分別하는 '槪念 놀이의 삶' 에 걸려 들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은 석가모니와 같은 모든 聖者들은 '나', '너', '이것', '저것' 등 一切의 分離 分別하는 槪念을 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세상을 살고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金剛經이 날카로운 答을 提示합니다. 그것은 '즉비 ~ 시명(卽非 ~ 是名)' 이라는 構造의 가르침입니다. 금강경에 97회 정도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컵 卽非 컵 是名 컵, '컵이란 컵이 아니라, 단지 方便上 이름이 컵이라 할 뿐이라' 는 構造의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아난아!" 하고 시자를 부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부처님 마음/의식 속에서는 '아난' 을 固定不變하는 實體로 實體視하지 않기 때문에 '아난'이라는 개념 이름에 걸리는 마음/의식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아난 卽非 아난 是名 아난(아난은 아난이 아니고 이름이 아난일뿐)' 이라는 사실을, 아난 卽非 아난, 즉 아난이라는 存在가 固定되고 不變하는 독립적인 實體가 아님을 깨닫고 있고 나아가 "아난아!" 라고 부르시지만 이것은 '시명(是名)아난' 이라,즉 삶의 便利를 위해서 方便上의 槪念, 이름인 "아난아!"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곧 聖者들은 億萬가지 槪念 / 觀念을 쓰면서 세상을 살되 宇宙萬物 그 어떤 것도 固定되고 不變하는 독자적인 實體性이 없음을 깨닫고 있기에 便宜上 方便上 분리 분별하는 槪念, 이름을 쓰면서 세상을 살지만 그 槪念, 이름에 걸리지 않고 개념 이름을 사용하면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있다' 는 分別하는 槪念은 '實體思考 (무언가가 다른 것과 分離 區別되면서 있다고 生覺함)' 이요, '좋다' 는 분별하는 槪念은 '價値思考' (무언가 다른 것과 분리 분별되어 좋다고 생각함) 이며, '싶다' 는 분별하는 槪念은 '欲求 欲望思考' (무언가 다른 것과 분리 분별되어 싶다고 생각함)이요, '썅' 하는 분별하는 槪念은 '忿怒思考' (무언가 다른 것과 비교 분별되어 欲求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생각) 입니다.
있지도 않은데 '있다!' 하고, 좋다고 할 만한 것도 아닌데 '좋다!' 하니 어리석음 [치심(癡心)]이, '있다 -좋다' 다음에 '싶다' 하니 欲望 欲求[탐심(貪心)]이, 싶은대로 욕망하는 대로 되지 않아 분노 화냄[진심(瞋心)]이 일어납니다.
인간의 이 心理的인 메커니즘을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 이라고 부릅니다. 이 탐진치 삼독심을 밑바탕으로 하여 生覺하고, 말하고, 行動하는 行爲(行業/三業)을 중생심의 삶, 개념놀이의 삶이라 합니다.
그러면 중생이 인간의 삼독심의 삶인 衆生心의 삶, 槪念놀이의 삶을 벗어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바로 그 代案이 금강경삼요(金剛經三要)입니다. 金剛經을 잘 살펴보면 세 부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衆生을 다 濟度하리라고 誓願하는 대원(大願), 둘째는 六波羅蜜의 삶을 사는 대행(大行), 셋째는 九類衆生을 다 濟度하겠다고 發願하고 六波羅蜜을 닦되 상(相 : 이미지, 槪念, 생각 망상 번뇌)에 떨어지지 않으면서 닦는 즉비 ~ 시명 (卽非 ~ 是名)의 길입니다.
여기에서 특히 유념해야 할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입니다. 大願, 大行 이 두 길은 大乘의 시대, 一乘의 시대엔 지극히 당연한 길이지만, 大願과 大行에 相應하는 마음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겁니다. 그 마음의 자세는 바로, 즉비(卽非), 파상(破相), 무유정법(無有定法),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의 마음의 태도입니다.
이 世上을 分離 分別하는 모든 이미지 이름 槪念을 日常의 必要에 따라서 마음대로 쓰면서 살아가되 모든 이름 槪念 觀念 앞에 그 槪念을 바로 否定해버리는 즉비(卽非)를 붙여 살아야 합니다.
'나' 라고 했으면 바로 '卽非 나(바로 나가 아님)'에 意識이 맑게 깨어있어야 하며, '컵' 이라 했으면 바로 '卽非 컵(바로 컵이 아님)'에 精神이 맑게 깨어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事實로 있다고 여겼던 컵도 나도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에 없습니다. 그럼 ' 컵 자체' 를 본다고 生覺하고 精神을 集中해 보세요. 무엇인가가 實體思考로 머릿 속에 들어왔을 때 그 存在 자체(自體)가 腦속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自身의 '主觀的인 認識의 틀(固定觀念/ 생각의 틀)'에 依해서 걸러져서 投映된 投影物(그림자), 現象, 表象物이 宇宙虛空에 드러난 허깨비 신기루 幻影 幻想에 불과한 實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自覺이 드는 사람은 벌써 깨달음의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이런 自覺이 확실한 사람들은 컵을 컵이라 부르면서도 그 컵은 固定된 實體가 있는 컵 自體가 아니라 단지 생활의 편리상 이름을 컵으로 붙여서 부르고 있을 뿐이라는 事實을 항상 알차려서 맑게 깨어있는 精神으로 깨달은 인생을 사는 겁니다.
그러면 컵 자체[物 自體]는 무엇일까요? 이 때 컵 그 自體 , 컵의 根源, 本質은 永遠히 붙잡을 수 없는 것이라는 眞實을 깨닫는 瞬間 一切의 主와 客(相對的 分別的인 世界)로부터 완전하게 自由로워져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金剛經은 永遠 絶對의 解放을 가르쳐주는 가르침이므로 금강경을 受持하는 功德이 이 몸을 恒河沙 모래알 수 만큼 獻身해버리는 공덕보다 더 높다는 것입니다.
이 世上의 모든 것들을 憐憫之情(연민지정)으로 끌어 안으면서 '無限한 虛虛空空의 宇宙空間에 있는 一切 九類衆生을 濟度하리라!' 를 간절한 마음으로 誓願하면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라는 자아(自我)에 떨어지지 않는 맑게 깨어있는 마음으로 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의 六波羅蜜을 行하고 또 實行하시기 바랍니다.
관세음보살
- 용타스님 _()_
- 해솔님이 올린 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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