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마음은 나의 것이 아니다 >
부처님 당시 최고의 논쟁가로 알려진 삿짜까는 강력한 국가 통합체제를 갖춘 리차위 일가 왕들의 스승이었다. 그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아트만'을 무기로 부처님과의 논쟁에서 이겨보려고 왕들을 대동한 채 부처님 처소로 갔다. 자아(自我)를 의미하는 아트만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無我와는 正 反對되는 槪念으로, 그가 만약 이 논쟁에서 이긴다면 인도 제일의 현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이들을 맞이한 부처님께서 물었다. “한 나라의 王이라면 그 領域에서는 王의 命令權이 通하겠는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몸(色)을 마음(識)대로 할 수 있는가. 이 느낌(受)과 생각(想)과 의도(行)를 마음(識)대로 할 수 있는가? 내 마음(識)을 마음(識)대로 할 수 있는가?”
내 몸, 내 마음이지만 나의 命令權이 통하지 않으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우리는 ‘無我’라고 하면 흔히 漢文의 뜻 그대로 ‘내가 없는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마음을 비운다’라는 말도 한다. 그러나 부터님이 發見하신 無我라는 眞理는 내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부처님의 혜안(慧眼)으로 살펴본 마음은 生滅하는 連續體일 뿐이다. 마음은 있지만 한 瞬間 일어났다 사라지는 마음이다.
이것을 스승들은 電磁波의 흐름에 비유한다. 전등의 불빛은 전자파들의 生滅하는 連續體라고 한다. 連結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끊어져 있는 波長의 나열이지만 우리의 눈에는 連續된 불빛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영화나 TV의 畵面도 이와 똑 같은 원리다. 화면에 비친 동작은 실제로는 수많은 필름을 빨리 돌려서 나타나는 錯視現象이다. 그런데도 관객들은 그 화면에 몰입해 눈물짓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마음도 이와 같아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의 連續體일 뿐, 사라지고 난 다음에 일어난 새 마음은 같은 마음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릴 적 마음이나 현재의 마음이나 또 앞으로의 마음이나 다 똑같은 내 마음인 줄 안다.
마음의 이런 屬性 때문에 부처님은 내 마음이지만 그 瞬間의 마음일 뿐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마음[識]은 누구의 統制도 받지 않고 條件에 의해서 스스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과연 이것이 나의 몸[色]이라면 숨을 멈추지 말라고 명령해서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을 것이고, 이 느낌[受]이 나의 것이라면 즐거운 느낌만 있고 통증 따위는 없을 것이다. 또 이것이 나의 생각[想]이라면 원하지 않는 상상이나 기억은 떠오르지 말아야 하고 이것이 나의 의도[行]라면 술이나 담배는 쉽게 끊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嚴然한 事實을 認定할 수밖에 없는 삿짜카는 부처님과 많은 대중 앞에서 할 말을 잃었고 그의 제자들은 모두 부처님께 歸依하였다고 한다. 사실 無我는 논리나 알음알이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스승으로부터 늘 듣는 이야기지만 無我는 수행을 통해 洞察智慧로 아는 것이고 經驗으로 아는 것이다. 실천 경험이 없는 범부들은 그저 觀念으로 밖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이해하더라도 自己 水準으로밖에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십년 전에 김 아무개로부터 들은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한 맺힌 원한이 되었다고 하자. 보통 사람들의 경우라면 생각하면 할수록 괘심하고 원망스러워서 그 한을 증폭시키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행을 해서 無我의 原理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래, 그것은 그 때 마음일 뿐이다. 그 사람의 목소리도 그것을 듣고 화가 난 마음도 이미 사라져서 없다. 단지 그것을 記憶한 새 마음이 또 화를 내고 있을 뿐이다.”라고 하면서 화를 制禦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빨리 이런 平定心을 찾느냐 하는 것은 수행의 정도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貪瞋癡를 끊은 아라한의 경우에는 아픈 記憶이 살아나더라도 이에 反應하지 않고 곧바로 “그렇구나!” 하고 알아차린다고 한다.
그러나 無我를 觀念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범부의 경우는 지금 화 난 마음이 그 때 그 事件의 連續 現象이라고 보고 여전히 그 사람을 원망하며 화를 낼 것이다. 그리고 이 화를 해결하기 위해 참거나 혹은 다른 데로 관심을 돌려 스스로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참아서 억누르거나 피해서 잠시 제어된 화는 潛在意識 속에 貯藏되어 있다가 機會가 되면 언제든 튀어나오게 되어 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결코 비워지는 것이 아니다.
알아차림이 있는 瞬間 수행자는 無我를 經驗한다. 그러므로 無我란 알아차리는 수행을 되풀이 하다보면 어느 순간 전광석화와 같이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을 스승들은 나무를 비벼서 불을 내는 것에 비유한다. 나무를 비비는 것은 오랜 노력과 시간이 걸리지만 불이 붙는 것은 한 순간이다. 마찬가지로 수행을 열심히 하다보면 어느 순간 지혜가 나는 것이지 지혜로워지겠다고 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내가 없다는 것을 아는 지혜는 알아차릴 대상이 아니라 수행의 결과일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마지막 유언이 부지런히 노력해서 알아차리라고 하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修行이란 無我를 아는 習慣을 키워가는 過程이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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