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차림이 없으면 도둑이 들어온다 >
우리가 안다는 것은, 안이비설신의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대상을 만나서 認識하는 過程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情報는 모두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을 通해서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마음[意]도 하나의 감각기관에 속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것을 육근(六根)이라고도 하고 貪瞋癡가 드나드는 육입(六入) 혹은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實際로 우리는 육문을 통해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意識하는 過程에서 108 煩惱를 느끼고 산다. 그러므로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이 육문을 통해서 느낌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림을 확립하여 더 이상 번뇌의 씨를 심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알아차림은 六門을 지키는 문지기다. 이 문지기가 없으면 탐진치라는 도둑이 들어와 主人 행세를 하며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있으면 탐욕이나 성냄에 빠지지 않고 어리석음도 차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문지기의 역할을 얼마나 충실히 하는가에 따라서 수행의 기준을 삼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도둑을 지키는 문지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경전에 보면 많은 수행자들이 六門을 지켜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중에는 유명한 뽀띨라 장로의 이야기가 있다. 뽀띨라 장로는 경전을 꿰뚫는 뛰어난 교학자로서 부처님 당시 18개의 무리, 500여명의 비구들에게 삼장을 가르치는 대 스승이었다. 많은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으로 아라한이 되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수행을 소홀히 하였는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어느 날부터 그를 대할 때마다 “바보 뽀띨라여! 어서 오너라. 바보 뽀띨라여! 앉거라.” 하며 말끝마다 그를 머리가 텅 빈 바보라고 불렀다.
부처님의 의중을 눈치 챈 그는 경전 가르치기를 그만두고 수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30여명의 아라한들이 머무는 숲 속 사원으로 들어가, 제일 연장자인 아라한에게 수행의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나 대 스승인 그를 맞이한 장로가 이를 사양하자 다음 아라한에게 가서 청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아라한들도 모두 사양하자 결국은 일곱 살의 어린 사미인 아라한에게 가서 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뽀띨라 장로는 자신의 自慢心을 잠재우고 수행에 임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게 되었다. 이 때 어린 아라한은 그의 마지막 自尊心조차 시험하기 위해서 연못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하였다. 장로가 즉시 이에 복종하자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어린 사미승이 한 법문이 바로 ‘六門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이렇게 물었다.
“여섯 개의 구멍이 있는 언덕에 개미집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으로 도마뱀이 들어갔다고 하면, 이 도마뱀을 어떻게 잡을 것입니까?”
그러자 장로는, 다섯 개의 구멍을 막고 하나의 구멍만 남겨놓은 채 도마뱀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이 알아차림으로 도둑을 지키는 방법이다. ‘눈, 귀, 코 , 혀, 몸이라는 다섯 개의 구멍으로 들어오는 모든 現象을 알아차림이라는 마음의 문지기로 지켜보는 것이다. 이렇게 문지기 노릇을 지속하면 마음이 감각대상을 만나 탐진치로 반응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점진적으로 마음이 순화되어 청정함을 유지할 수 있다. 이렇게 淸淨心을 啓發하여 執着이 떨어지면서 涅槃의 境地까지 도달한다는 것이다. 이 지시를 따라 뽀띨라 장로는 六門 중에서 마음이라는 단 하나의 門만 열어놓고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들어오는 모든 現象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하였다.
이렇게 문지기 역할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門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을 일일이 다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들어오는 대상이 싫어서 피하거나 억누르지도 말고, 좋아해서 덥석 붙잡지도 말며, 무엇이 들어오든 개입하지 않은 채 그냥 지켜보아야 한다. 이것이 위빠사나 문지기의 역할이다. 그래서 스승들은 알아차릴 때 극장의 관람객처럼 그냥 보기만 하라고 한다. 그리고 ‘물 위에 떠 있는 공처럼’ 깊이 개입해서 몰입하지도 말고, 밀착해서 지켜보되 거리를 두라고 한다. 좋은 것은 붙잡고 싫은 것은 막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맥 놓고 지켜보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으로 판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즐거운 대상은 더 갖고 싶어서 집착하고, 싫은 대상은 피하고 무시하거나 화를 낸다. 그나마 선한 사람이라면 대상을 통해 욕망이나 화가 일어났을 때 억누르거나 참는 사마타 방법으로 대처해 보지만 이것도 일시적일 뿐 근본적으로 번뇌를 소멸시키는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자, 실제로 예를 들어본다. 요즘 많은 여성들이 괴로움을 호소하는 것 중 하나가 아들이나 남편이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내는 처절한 機械音이다. 그런데 사실 소리 그 자체만으로 보면 높고, 낮은, 혹은 길고, 짧은 波長의 連續體일 뿐 그렇게 우울증이 걸릴 정도로 공포의 대상은 아니다. 또한 우리가 소리를 듣는 다는 것도 소리라는 감각대상이 空氣를 타고 귀라고 하는 감각기관과 부딪쳐서 소리라고 아는 이식(耳識)이 일어난 것일 뿐이다. 그냥 소리이고, 그냥 아는 것일 뿐인데 우리는 내 자식, 혹은 내 남편의 시간을 빼앗고 인격을 망가뜨리는 기계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 때 수행자는 먼저 소리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린다. 다음은 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린다. 그러면 직접 소리를 겨냥했을 때보다 소리에 대한 민감함이 약간 떨어진다. 다음으로 소리를 마음자리에 두고 알아차린다. 그러면 그냥 소리일 뿐이다. 이것이 경전에서 말하는 밖에서 알아차리기, 안에서 알아차리기의 한 예다. 나중에는 안팎으로 두루 알아차린다. 이렇게 같은 소리지만 어디에 마음을 겨냥하느냐에 따라 느껴지는 것은 다르다. 소리에 알아차림을 두었을 때는 싫은 소리라는 先入見이 强하기 때문에 대상에 넘어가기 쉽다. 그러나 귀나 마음자리에 두고 소리를 들을 때는 사무치게 싫은 컴퓨터 소리라는 선입견이 배제되고 그냥 소리로 들을 수가 있다. 客觀化해서 듣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보고, 듣고, 감촉하는 瞬間에 分離해서 보면 대상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등의 육체적 혹은 정신적 느낌으로 발전하지 않고 느낌 그 자체로만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탐진치라는 도둑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할 뿐 아니라 이미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는 도둑을 순화시켜서 대상 때문에 생기는 마음의 병을 미연에 방지하고 또 스스로 치유도 할 수 있다. 다음은 옹달샘의 한 구절을 읽어보기로 한다.
< 감각적 욕망 > 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일어나는 욕망이 감각적 욕망이다. 욕망은 반드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을 통해서 들어온다. 감각기관의 문에 알아차림이란 문지기가 있으면 감각적 욕망이란 도둑이 들어오지 못한다.
알아차림이란 문지기가 없으면 감각적 욕망이란 도둑이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며 몸과 마음을 마음대로 지배한다.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면 일어난 만큼 괴로움이 따른다. 감각적 욕망을 여의면 여읜 만큼 즐거움이 따른다.
감각적 욕망은 무상한 것이며 괴로움이며 나의 것이 아니다.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날 때 지고의 행복이 있다. 감각적 욕망의 혐오에서 벗어나 초연해지는 것이 해탈의 자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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