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진치는 나의 동반자 >
불교에서는 탐진치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경전이나 주석서, 스승님들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이 세 가지의 불선심이 중생들의 번뇌를 이끌어가는 주범이다. 그래서 탐진치를 삼독(三毒)이라 하고, 이것을 한 마디로 번뇌라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것은 탐진치, 번뇌를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행을 완성한 부처님이나 아라한은 탐진치가 불타버려 더 이상 번뇌가 없는 분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탐진치를 우리말로 하면 보통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고 하는데, 이런 용어의 뜻만으로는 이것들이 나와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일 수 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은 기억도 없고 큰 욕심 없이 소박하게 살아왔으니 탐심(貪心)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고, 화가 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도 웬만하면 잘 참아왔으니 진심(嗔心)은 그저 조금만 일으켰을 것이며, 더구나 어느 정도 배울 만큼은 배웠고 이성적으로 처리해왔기 때문에 치심(恥心)과도 거리가 멀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데 이런 엄청난 착각을 하게 되는 이유는 탐진치라는 한문 용어가 주는 거리감도 있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탐진치를 지극히 피상적으로 그리고 관념적으로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눈, 귀, 코, 혀 등을 통해 대상을 인식할 때 처음에는 그냥 “그렇구나” 하는 ‘맨 느낌’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어느새 “좋다 혹은 싫다”고 하는 ‘육체적인 느낌’으로 반응한다. 그것도 모자라 또 다시 “좋아죽겠네 혹은 싫어 죽겠네” 하는 ‘정신적인 느낌’으로 발전시켜버린다. 이것을 부처님은 느낌에서 화살을 두 번 맞은 상태라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의 느낌은 화살 두 번 맞은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꽃향기가 좋으면 우리는 코를 벌름거리며 꽃으로 얼굴을 가져간다. 또한 향기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꽃을 꺾어 화병에 꽂아놓는다. 이는 좋은 느낌에서 더 좋은 느낌을 갖기 위해 무언가를 도모하고 꾸미는 행위다. 마찬가지로 나쁜 느낌이 일어나도 빠르게 반응하여 피하거나 억누른다. 어디선가 구린내가 나면 우리는 얼른 상을 찌푸리고 코를 막는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렇게 사소하고 미세한 것에서 시작하는 좋거나 싫은 느낌이 더 강력한 집착으로 전환하여 수차례 화살을 맞다보면 도둑질, 구타, 방화, 자살 등 극단의 행위로도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이나 아라한은 맨 느낌으로 지낸다고 한다.
그래서 탐욕을 아비담마, 논장(論藏)에서는, “끈끈이와 같이 거머쥐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숯불 위의 고깃덩어리처럼 달라붙고, 염색된 안료처럼 버리지 못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성냄은 “얻어맞은 독사처럼 잔인함을 특징으로 하고 마치 한 방울의 독처럼 퍼지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처를 태우고 숲 속의 불처럼 성을 내고 기회를 노리고 화를 낼 기회를 노린다.”고 하였다.
이런 엄청난 결과와 비극을 초래하는 탐욕과 성냄의 발단은 지극히 단순한 마음인 ‘좋다, 싫다’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탐진치와 거리가 먼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탐진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커피 냄새가 좋다, 구린내가 싫다”는 사소한 말 한 마디도 탐심에서 비롯한다면 이것을 탐욕이라기보다 ‘바라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실제로 연기론(緣起論)에서는 바라는 마음을 갈애(渴愛)라 하고, 이 갈애가 모든 번뇌의 근원이라고 한다. 갈애는 우리의 삶과 괴로움을 이어가게 하는 연료요 땔감이다. 그러니까 반대로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끊어지고 집착이 끊어지면 윤회의 굴레에서도 벗어난다는 것이 12연기의 요지다. 깊은 고민 끝에 모든 것을 포기하면 이외로 마음의 평화가 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바라는 마음이 없어져서 번뇌의 원인을 제거한 까닭이다.
싫어하는 마음인 진심은 사실은 바라는 마음인 탐심에서 비롯한다.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싫어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가려울 때 손이 가서 긁는 것, 맛이 없어서 내 뱉는 것, 무서운 것을 보고 눈을 가리는 것, 괴로움을 잠재우기 위해서 음악을 듣고 다른 즐길 거리를 찾는 것은 모두 원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피하거나 억누르는 행위다. 그래서 이런 행위는 대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냄이고 그 뿌리는 탐심이다.
그렇다면 치심인, 어리석음이란 무엇인가? 12연기에서는 이것을 무명(無明) 혹은, 무지라고 하는데, 이때의 무명은 “모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좀 더 실감나는 표현이다. 무엇을 모른다는 것인가? 한 마디로 진리를 모른다는 것이다. 진리를 모른다는 것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 원인과 결과를 모르는 것, 과거와 미래를 모르는 것, 해탈의 길인 팔정도를 모르는 것 등이라고 경전에서는 말하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 괴로움이며 불만족이라는 것, 이것을 주관하는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영원한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하고, 모르기 때문에 자아(自我)를 추구하고 이것을 강화하는데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면서 탐심과 성냄을 키워나간다. 그래서 어리석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냄의 뿌리는 탐욕이고 탐욕의 뿌리는 어리석음이라고 말한다. 번뇌의 원초적 근원은 어리석음이다. 여기에 갈애라는 연료가 끝없이 제공되면서 집착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12연기에서는 갈애와 무명, 두 가지가 우리의 번뇌와 윤회를 돌리는 근본원인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미세한 마음가짐조차 탐진치의 영역에 포함된다면 문제가 하나 생긴다. 보시, 지계, 수행을 하겠다는 선한 의도까지도 ‘바라는 마음’이니까 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가? 실제로 그렇다고 주장하는 학파가 있는 모양인지 마하시 사야도는, 우리가 아라한이 되기까지는 적어도 이 세 가지에 대한 욕심은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탐심이 아니고 서원(誓願) 혹은 발원(發願)이라고 한다. 부처님도 헤아릴 수 없는 오랜 겁 전에 부처가 되겠다는 발원을 하고 바라밀 공덕을 쌓았고, 그 조건이 성숙하여 부처가 되신 것이다. 사리불이나 아난존자 등 수 많은 제자들, 기원정사를 만들어 부처님이 계실 숙소를 제공한 아나타삔디까의 경우도 부처의 제자가 되겠다는 선한 발원을 하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 결과를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수행의 완결을 보기 전까지는 선한 의도는 가져야 한다는 것이 정답이다.
그래서 스승들은, 목표는 있으되 함에 있어서는 바라는 마음 없이 하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바라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행을 좀 하려면 이미 바라는 마음이 먼저 들어와 있다. 그래서 스승들은 수행에서나 일상에서나 이미 일어난 탐욕은 “탐욕이 있네!” 하고 알아차리고, 이미 화를 내버렸으면 “성냄이 있네!”하고 알아차리고, 그것 때문에 후회하고 있으면 그 마음이 바로 현재 알아차릴 대상이라고 강조한다. 탐진치는 제거할 대상이 아니라 알아차릴 대상일 뿐이다. 옹달샘의 한 구절을 적는다.
< 불 >
탐욕은 욕망을 지피는 불이다. 성냄은 몸과 마음을 태우는 불이다. 어리석음은 탐욕과 성냄을 지피는 불이다.
세 개의 불은 자신을 불태우고 온 세상을 불태운다. 세 개의 불이 진실을 불사르면 법을 볼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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