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寬容, 慈愛, 智慧 >
어쩔 수 없이 탐진치를 친구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하지만 우리에게 탐진치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탐진치가 없는 선한 마음도 있다. 선한 마음이란 탐욕 없음, 성냄 없음, 어리석음 없음인데 이것이 바로 탐진치의 반대 개념인 관용, 자애 지혜다. 사람은 태어날 때 이미 이런 선심, 불선심과 함께 이에 따른 선과보심과 불선과보심도 함께 갖고 태어난다. 그리고 부처의 마음인 “단지 作用만 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에는 천국의 마음도 있고 지옥의 마음도 있으며 부처의 마음인 불성(佛性)도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행을 통해서 선심을 키우고 궁극에는 단지 작용만 하는 무인작용심(無因作用心)으로 살아야 한다. 이렇게 탐진치가 없으면 탐진치 대신 관용, 자애, 지혜가 들어선다. 마음은 한 瞬間에 하나밖에 보지 못하는 屬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심이 없을 때는 불선심이 있고 불선심이 없을 때는 선심이 있다. 그래서 불선심이 있을 때 불선심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 대신에 알아차림이라는 선한 마음이 들어선다. 탐심을 알아차리면 관용이 들어서고, 성냄을 알아차리면 자애가 들어서며, 어리석음을 알아차리면 지혜가 들어선다.
예를 들어, 미운 대상을 만나 화가 났을 때 이 마음을 “그렇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현재의 화난 마음 대신에 관용과 자애의 마음이 들어선다. 지혜도 같이 들어온다. 먼저 싫어하는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이어서 상대를 받아들이는 관용이 생긴다. 그래서 오히려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용서도 하게 된다. 알아차리는 한 순간에 관용, 자애, 지혜가 현재의 마음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탐진치를 알아차리면 관용, 자애 지혜의 마음으로 바뀐다고 말한다.
그런데 관용이 있을 때는 관용으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보시의 마음이 생긴다. 관용이 있으면 남을 돕고 베푸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관용과 보시는 하나의 마음이라고 한다. 이런 마음은 다시 남을 사랑하는 자애로 이어진다. 받아들이지 못하면 밉지만 받아들이면 남을 이해하고 자애가 일어난다. 또 자애가 일어나면 남의 슬픔에 연민의 정을 보내는 마음이 일어나고, 연민의 정이 있으면 남의 기쁨을 함께 즐거워하는 마음과 함께 한다. 이것이 자(慈),비(悲), 희(喜), 사(捨). 사무량심인데 이런 마음은 결국 관용에서 비롯한다.
그렇게 때문에 사랑과 자비는 보내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이 있어서 넘쳐흐르는 것이라고 스승들은 말한다. 부처님이나 아라한은 탐진치가 불타버린 분들이라고 한다. 탐진치가 없기 때문에 관용과 자애와 지혜만 있다. 이러한 마음 상태는 수행자들이 추구해야 할 목표지만 사실 평범한 범부도 알아차림이 있을 때는 탐진치가 소멸하고 깨어있는 상태를 경험한다. 그래서 스승들은 이것을 ‘‘순간의 열반’이라고 한다. 아라한들은 생을 마치면서 더 이상 태어남이 없는 반열반(般涅槃)을 한다. 땔감은 다 타버리고 새로운 연료 공급도 없으니 더 이상 태어날 일이 없이 윤회를 마감하는 경우다. 그 외에 수다원 이상의 성자들이 수행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일시적이 열반”이 있다. 이 분들도 순간의 열반을 되풀이하면서 수행의 완성을 추구한다.
그러기에 한 번의 알아차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알아차림이 있는 한 순간, 순간이 보석 같은 소중한 것이고 키워야 할 자산임을 알아야 한다. 높은 산을 오르는 것도 한 발자국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호흡의 일어남, 꺼짐을 알아차리고 왼발, 오른 발이 나가는 것을 알아차리는 한 순간이 쌓이고 쌓여서 수행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수행자들은 한 순간의 알아차림이 축적되어 얼마나 많은 번뇌를 해결하는지 경험으로 안다. 그리고 예전보다는 화를 덜 내고 마음의 갈등이 수그러들었음을 체험으로 알 것이다.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미 관용, 자애, 지혜가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수행의 이익이다. 올달샘의 한 구절을 읽어보자.
< 소멸 >
겨울바람이 사라진 자리에 새싹이 돋는다. 번뇌가 사라진 자리에 지혜가 난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사라진 자리에 관용, 자애, 지혜가 난다.
소멸은 소멸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채운다. 불선심이 소멸하면 그 자리에 선심이 생긴다. 선심이 소멸하면 그 자리에 불선심이 생긴다.
소멸도 바람직한 소멸이 있고 바람직하지 못한 소멸이 있다. 가장 이상적인 소멸은 원인이 사라져 결과가 없는 것이다. 모든 원인이 사라져 결과가 없는 자리에 궁극의 열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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