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서 살아야 합니까? > 부처님의 임종이 가까워오자 제자들은 슬픔에 젖어서 “이제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까?” 라며 물었다. 항상 곁에서 가르침을 주실 줄 알았던 부처님께서 떠나신다고 하니 하늘과 땅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감으로 이렇게 여쭈었을 것이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나의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고, 너 자신을 귀의처로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법등명(法燈明), 자등명(自燈明)으로 부처님의 유언이나 다름없는 말씀이다. 漢文으로는 등불[燈]을 귀의처로 하라고 했지만 原來 經典에서는 섬[島]을 귀의처로 하라고 하였다.
끝없는 고해 바다에서 자신을 구제해 주는 섬과 같은 곳, 그곳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고 眞理인 法을 찾을 수 있는 피난처라는 의미에서 法燈明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自燈明은 문자 그대로 自身을 귀의처로 하라는 것인데, 이것을 문자의 뜻 그대로 보면 수행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몸과 마음인 오온(五蘊)을 귀의처로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수행과 직결되기 때문에 부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몸과 마음보다 더 나은 피난처는 없다고 하셨다. 이 몸과 마음이 알아차림의 對相이기 때문이다.
法은 흔히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이야기하지만 한편으로는 實在하는 窮極의 法인 ‘無常.苦.無我’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對相’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스승들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無常.苦.無我는 궁극적으로 알아야 할 法이고 얻어야할 智慧이지만 이는 수행이 무르익어 條件이 성숙해서 얻어지는 結果 일뿐 수행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평소에 자주 생각해서 수행의 힘을 키우는 데에 도움은 될지언정 피난처로 삼을 수는 없다. 燈臺는 길잡이로서의 역할만 할뿐 現在 이 瞬間에는 뗏목에 의지해야만 피안에 도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無常.苦.無我를 깨닫는 것은 우리의 목표임에도 불구하고 수행을 함에 있어서는 이를 잊어버려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몸과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現象을 지켜보는 것뿐이다.
法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뜻인 對相은 사실 ‘알아차릴 대상’이라는 숨은 의미가 있다. 對相이 있어도 알아차렸을 때 法이 드러나는 것이지 對相에 휩쓸려서 反應해버리면 그냥 對相일 뿐이다. 그러므로 法을 歸依處로 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歸依處로 하라는 것은 알아차릴 對相으로 하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다리의 통증이 일어났다고 하자. 이때 통증은 봐달라고 나타난 대상이다. 이 때 “통증이 있네‘ 하고 알아차리면 單純한 對相이 아니라 法으로 轉換한다. 그러면 거기에 통증의 性稟이 있고, 存在하는 것들의 特性인, 일어나고 사라지는 無常이 있다. 또한 거기에 나의 自我와는 相關없이 그냥 條件에 의해 生滅하는 괴로움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痛症은 바로 法이다. 장애가 곧 스승이라는 말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렇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귀의처로 삼아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對相으로 할 때에 비로소 法이 되는 것이지 알아차림이 없으면 그냥 괴로움이고 煩惱일 뿐이다. 우리의 五蘊은 恒常 ‘와서 보라’고 法을 드러내고 있는데 중생들에게는 그저 喜怒愛樂의 對相에 불과하다. 그래서 중생들의 몸과 마음은 그냥 五蘊이 아니라 執着의 무리인 오취온(五取蘊)일뿐이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法燈明, 自燈明이라고 남기신 말씀은 ‘내가 없더라도 너희들은 나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올바를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法燈明과 自燈明은 따로 떨어져서 보면 안 된다. 法이 있어도 이것을 修行의 對相으로 할 때에 法이고 五蘊도 修行의 對相으로 지켜볼 때에 비로소 法이 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法이거나 自身의 五蘊이거나 오직 修行의 對相으로 알아차릴 때에 비로소 眞理인 無常. 苦. 無我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좀 더 유념할 것이 있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알아차린다고 말하는데 실질적으로는 몸과 마음의 느낌을 통해 아는 것이다. 여기에도 몸의 느낌이 있고 마음의 느낌이 있다. 다리를 움직이지 않아서 쿡쿡 쑤시는 것은 몸의 느낌이고 근심이 있거나 누구를 미워하는 것은 마음의 느낌이다. 이 둘은 따로 떨어져서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함께 일어났다가 함께 사라진다. 마음이 긴장하면 몸도 긴장하고 마음이 편안하면 몸도 이완된다. 기분이 좋으면 밝은 얼굴이 되고 슬프면 어두워진다. 깜짝 놀라면 손의 힘이 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리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선원에서는 화가 났을 때 화난 마음을 알아차린 다음에 얼른 가슴의 느낌을 보라고 한다. 그러면 화난 뒤 끝에 남겨진 가슴의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마치 호수에 던진 돌이 남기고 간 물결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마음이 지나간 흔적을 몸에서 느낀다. 이렇게 마음에서 가슴으로 대상을 바꾸면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효과가 있다.
어쨌든 몸과 마음은 영역이 다르지만 우리는 이것을 다 느낌이라 하고 이 느낌을 통해 우리는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며 108 煩惱를 한다. 따라서 알아차림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면 “느낌으로 아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느낌을 느낌으로 알지 못하고 불행, 행복, 분노, 사랑, 돈, 명예 등과 같은 名稱과 觀念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괴로움과 執着을 增幅시킨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해서 느낌으로 지켜볼 때는 싫다, 좋다고 하는 渴愛로 넘어가지 않고 法으로 보게 된다. 그래서 12緣起에서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자리가 바로 느낌에서 渴愛로 넘어가지 않는 자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느낌을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대념처경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념처(受念處)를 별도로 두었을 것이라는 스승의 말씀에 수긍이 간다. 그냥 몸을 알아차리는 身念處와 마음을 알아차리는 心念處만 있으면 될 텐데 따로 受念處를 언급한 것은 몸이든 마음이든 모두 느낌을 통해 알고 알아차림도 느낌으로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몸이든 마음이든, 느낌이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이것을 對相으로 삼아서 알아차리면 法으로 轉換한다는 의미에서 법념처(法念處)는 당연히 별도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행자가 몸과 느낌과 마음을 對相으로 알아차리면 차츰 智慧가 나서 無狀, 苦, 無我를 아는 智慧가 盛熟한다. 對相으로서의 법을 알아차리다 보면 차츰 眞理로서의 法에 이른다는 것이다. 느낌과 法의 이런 特性과 役割 때문에 몸, 느낌, 마음, 法을 알아차리는 사념처(四念處) 수행은 그냥 구색으로 갖추어 놓은 것이 아니라 修行을 完成시키는데 반드시 必要한 條件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시각으로 보아야 비로소 形式과 觀念을 떠난 實 修行에 接近할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께서 남기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겨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명심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느낌이 일어날 때마다 느낌이 있는 줄 알고, 이를 알아차릴 對相으로 지켜보면 그 자리가 바로 괴로움의 바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歸依處이고, 輪廻에서 벗어나는 脫出口’라고 整理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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