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만든 불안과 공포 / 서경보 스님 영원한 나를 찾아서
自己自身이 만든 不安과 恐怖의 마음 / 서경보 스님
人間이 自己 속에 無限하고 完全하고 圓滿한 佛性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無限한 歡喜와 希望을 賦與해 주는 것이지만 이처럼 自己 속에 지니고 있는 無限하고,完全하고 圓滿한 佛性을 發煇할 수 있는 希望을 과연 實現 시킬 수가 있는 것일까?
결코 그것을 實現할 수 없다는 理由는 없다. 農夫가 뿌리는 씨앗은 반드시 그것이 生長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옥토에 뿌림으로서 그것이 자랄 수 없는 메마른 땅에 뿌려지는 일은 없다 .
여러분들 속에 佛性의 씨앗이 뿌려져 있다는 그 自體가 그 씨앗의 成長과 結實을 約束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설파하신 因果의 法則을 알았다면 이 사실을 믿지않으면 안된다. 여러분이 그렇게 佛性이 實現되는 일이 可能한 것은 ' 된다' 라고 믿는 確信인 것이다.
그렇게 確信한 後에는 決意가 필요하다. 여러분들 앞에 가로놓인 障碍는 心理的인 現象이다. "안된다 ' 고 生覺하는 障壁 , 우유부단이라는 障壁, 불신, 불결단, 의지박약이라는 障壁, 이와같은 障壁들을 打破할 때 비로소 佛性 發現의 凱歌가 오르는 것이다.
自己가 佛性을 가지고 있다는 信念이 同時에 '他人蔑視'의 觀念을 수반하게 되면 그것은 도리어 自己內在의 佛性을 가지고 生長시키고 結實케 하는데 防害가 된다 . 自己가 佛性의 存在라면 同時에 모든 人間도 佛性의 存在인 것이다. 人間뿐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과 存在하는 모든 것은 모두 佛性을 가지고 있다 . 그 佛性에 있었서나 本性에 있었서 서로서로 兄弟인 사실을 自覺해야 할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 有情 非有情 同時 成道 山川草木 國土悉皆成佛 ' 이라고 萬有를 찬탄한 것처럼 一切의 情이 있는 것과 情이 없는 것들을 禮拜하는 心情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런 心情에 到達했을 때 여러분은 萬有一切와 調和되는 것이다. 萬有一切와 調和되었을 때 萬有一切로 부터 祝福을 받으며 萬有一切가 여러분에게 줄 수 있는 惠澤을 받을 수 있다. 잘 받아 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 마음이 좁아서 오직 남의 결점만을 헐뜯고 비난 공격하고 부러워 질투하는 惡情이 타올라서 피투성이 투쟁을 일로 삼을 때 , 人間 自己 內在의 佛性은 그 爭鬪 精神에 흐려져서 그 佛性의 씨앗은 분노, 질투, 증오의 毒까스를 맡고 窒息해 죽어버린다.
人生에서의 不安은 어느 時代이고 存在하는 人類의 病이다. 개인간의 갈등이나 가정의 다툼이나 국가간의 분쟁도 그 不安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 人生의 不安을 克復할 수가 있다면 이 地球上에 바로 平和로운 世界가 펼쳐지게 될 것이다. 不安이라는 것은 대체로 未來에 일어날 수 있는 不幸, 損失, 疾病, 平和라는 生覺들에 關聯되어 일어나는 것이며, 樂天的인 사람은 그다지 未來의 不安, 恐怖에 괴로워 하지 않으나 神經質적이고 非觀的인 性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직 그 不幸이나 疾病이 닥쳐오기 前부터 미리 그것들을 想像하여 그것들이 마음의 世界에 까지 實物처럼 찾아온 것 以上으로 誇大하게 느껴져서 불안해하는 것이다.
이 不安과 恐怖라는 마음의 病은 조그마한 마음의 틈새로 부터 들어온다. 家庭의 마찰, 經濟의 변동, 侵略의 소문, 누군가가 말한 중상모략, 새로운 競爭者의 출현,이런 것들이 必然的으로 自己를 不利한 狀況에 빠뜨릴지 모른다는 不安 恐怖 그것이 病原體의 胞子가 되어 人間精神 全切에 侵入해서 浸殖하는 것이다. 대체로 새로운 計劃에는 반드시 不安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겁쟁이는 큰 사업의 계획자는 될 수 없다. 아직 보지 못한 世界의 幸福을, 그리고 極樂淨土를 그리는 사람만이 참으로 未來에 큰 事業을 이룩할 수 있는 사람이다.
不安과 恐怖의 마음을 품는 것은 主로 마음의 問題로서 事件 그 自體, 外界 그 自體의 問題는 아니다. 올바른 信仰心이 없어서 世上을 疑心하는 마음이 不安, 恐怖의 主된 原因이다. 그러나 이 세상이 나쁘게 보이는 마음도 結局에는 善한 것의 새싹이 된다.
이 世上에 善人은 한 사람도 存在하지 않는다고 나쁘게 보는 것은 보는 쪽의 마음이 反映되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므로 이쪽의 마음만 一轉하면 반드시 착해지게 마련이라는 眞理를 모르는 데서 不安, 恐怖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
그러므로 그 反對로 이 世上에는 惡은 결코 存在하지 않는다는 事實을 믿기만 한다면 不安과 恐怖의 마음은 저절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結局 不安, 恐怖의 마음은 世上의 實相에 對한 理解의 缺乏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世上의 實相에 對한 올바른 깨우침을 참으로 갖도록 한다면 不안 恐怖는 自然히 消滅되어 버리는 것이다. 不安 恐怖의 原因은 뭐니뭐니 해도 自己가 相對 ,卽 外界보다 힘이 弱해서 그것을 堪當해 내지 못하고 짓눌려 버릴지도 모른다는 想像에 뿌리를 박고 있다.不安 恐怖 그것은 어떤 意味에서 劣等感이라고 할 수 있다 . 自己속에 '無限한 힘이 內在되어 있다' 또는 '自己는 언제나 相對보다 두 배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하는 自信을 가질 수만 있다면 當然히 그와같은 不安 恐怖는 消滅되어야 할 性質의 것이다.
다행히 近代心理學은 , 現在意識의 밑바닥에는 潛在意識이라는 廣闊한 領域의 意識世界이 存在하고 있으며, 이 넓은 영역의 潛在意識 마음속에는 無限한 힘이 內包되어 있다는 事實을 밝혀준 것이다. 潛在意識은 過去의 어떤 작은 일과 經驗 情報라도 貯藏해서 記憶하고 있으며 또 經驗하지 않은 것이라도 알고 있으며, 危機에 處했을 때 어떻게 對處해야 좋은가 하는 神通自在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潛在意識은 '無限한 힘'을 內包하고 있으면서도 주어진 役活만을 바로 遂行할 뿐 그 이상 積極的으로 자진하여 作用하여 아무 일이나 하지는 않는다.潛在意識은 無限한 에너지정보체이지만 우리들 自身이 自覺되는 마음으로 模形을 提供한 것과 같은 模樣의 狀態가 되어 現象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그 사람이 만약 現在意識에 '損失 '이라는 生覺을 일으켜서 그 生覺을 潛在意識에 傳한다면 그 사람 內部의 潛在意識 에너지는 不安과 恐怖의 感情을 일으켜 마침내 現在意識이 마음에 그린 것과 같은 '損失 ' 狀況을 現實世界의 現象으로 現實化하게 한다.
가령 어떤 큰 事業을 하는 商人이 많은 商品을 倉庫에 넣어두었다고 假定하자 . 그런데 時局의 影響을 받아서 商品의 價格이 暴落하기 始作했을 때 , 그 商人의 마음은 놀라서 '損失 '이라는 觀念/生覺이 마음 卽,現在意識에 떠오른다 그러면 그 現在意識에 떠오른 '損失'이라는 觀念은 그것이 貯藏되어 있는 潛在意識面에 傳達된다.
潛在意識은 '損失'이라는 觀念/生覺을 傳해 받으면 自動反射的으로 ' 恐怖 '의 感情을 불러 일으켜서 그 恐怖의 느낌/感情에 對應하기 위한 마음의 에너지가 混亂한 爆發力으로 그 사람의 行動을 支配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意識은 당황하여 倉庫속에 貯藏해둔 商品을 싼 값으로 팔아버린다.
그와 똑같은 時局的 環境속에 있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그 狀況을 좋은 機會로 삼아 混亂스러운 恐怖의 마음 상태에서 싸게 팔아버린 商品을 極히 有利한 條件으로 買占하여 巨富가 되기도 한다. 恐怖라는 느낌/感情은 潛在意識에서 發現된 에너지의 混亂된 爆發이므로 理性的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事件에 對하여 理性的인 判斷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損失 ,敗背, 疾病이라는 現在意識이 그려져서 潛在意識의 건반을 두드리는 限 , 潛在意識의 건반은 공포의 가락을 演奏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그러므로 潛在意識이 공포의 감정을 연주하지 않기 위해서는 現在意識이 損失이나 敗背나 疾病을 想像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不安 恐怖의 느낌 感情을 潛在意識에 불러 일으키지 않게하기 위해서는 現在意識이 損害,敗背,疾病등의 否定的인 生覺들을 現在意識에 그리지 않도록 마음의 王國을 支配하는 것이 必要하다. 그런데 마음의 王國을 支配하는 그것이 어떻게 可能할까. 그것은 먼저 眞理를 아는 일이다 眞理를 아는 일은 一切의 否定的인 生覺/想像으로부터 解放되기 위해서 必要한 條件이다.
그렇다면 眞理란 무엇인가? 眞理란 한마디로 實相을 말한다. 이 實相인 眞理는 假相에 속하는 肉體의 눈과 귀로는 보고 들을 수가 없는 實在다. 그러므로 肉體의 눈과 귀로 보고 들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說明할 수가 없다. 眞理는 絶對의 權位를 가지고 自主的이고 아무 것에도 束縛되지 않는 自由로운 實在라는 實相이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實相의 世界 眞理의 世界에 있었서 人間의 意識은 어느 곳 어느 것에도 걸리지 않는 自由意志이기 때문에 假想世界나 理想世界에서 그 人間 意識의 自由意志를 獲得하기 위해서 투쟁할 필요는 없다. 現象의 相이 아무리 固定되고 묶여 있는 것처럼 보여도 人間의 實相, 眞理의 實相은 묶여있지 않는 것이다. 묶여있지 않는 人間의 實相, 眞理의 實相인 自由로운 마음 狀態 ,解脫의 마음 狀態를 佛 이라고 한다.
그래서 人間의 實相은 부처(佛)인 것이다. 現象人이라는 自覺으로부터 實相人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나의 本質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가는 곳을 알기 보다 더욱 알기가 어려운 '實相의 人間' 을 꼭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實相의 人間 이것을 만났을 때, 모든 不安과 恐怖가 마음에서 解消되어 버린다 . 다시 한마디로 말하자면 眞理, 卽 實相을 깨달았을 때 마음에 不安과 恐怖가 깨끗히 사라지는 것이다.
비슷한 例지만 이런 일이 있다 . 信仰心이 두터운 中年의 婦人이 절에서 佛供을 드리고 해가 지고 밤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절 마당에서 개구리 한 마리를 밟아 죽였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殺生을 했노라고 後悔하고 念佛을 하였으나 워낙 마음이 착하고 어질며, 信心이 두터워 잠을 이루려고 해도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밟아 죽인 개구리를 날이 새면 달려가서 땅에 묻어라도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새벽에 절을 찾아갔다 . 어젯 밤에 개구리를 밟은 마당에 가보니 개구리는 없고 썪은 오이 반토막이 짓밟혀서 오이씨가 터져나와 있었다. 그 부인은 그제서야 어둠속에서 밟은 것이 개구리가 아니라 썪은 오이였음을 알아차리고서 後悔하는 마음을 놓았다 . 이 이야기가 말 해주는 바와 같이 實相을 깨달으면 마음의 不安과 恐怖가 사라지는 것이다 . 人間은 모든 일에 實相을 把握해서 깨어 있는 意識으로 살아가야 함에도 假相에 錯覺하고 執着하고 얽매여서 마음에 不安과 恐怖를 人間 意識 스스로 사서 괴로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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