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경전연구회
강좌》
13-8 마음은 찾을수록 멀어진다
學人不了(학인불료)하야 爲執名句(위집명구)하야
被他凡聖名礙(피타범성명애)일새
所以障其道眼(소이장기도안)하야 不得分明(부득분명)이니라.
祇如十二分敎(지여십이분교)는 皆是表現之說(개시표현지설)이라.
學者不會(학자불회)하고 便向表顯名句上生解(변향표현명구상생해)하나니
皆是依倚(개시의의)라 落在因果(낙재인과)하야
未免三界生死(미면삼계생사)하나니라.
儞若欲得生死去住脫著自由(이약욕득생사거주탈착자유)인댄
卽今識取聽法底人(즉금식취청법저인)하라.
無形無相(무형무상)하며 無根無本無住處(무근무본무주처)하야
活鱍鱍地(활발발지)라 應是萬種施設(응시만종시설)하야
用處祗是無處(용처지시무처)일새 所以覓著轉遠(소이멱착전원)이요
求之轉乖(구지전괴)니 號之爲秘密(호지위비밀)이니라.
찾을수록 멀어진다.
‘學人不了(학인불료)하야’, 학인들이 알지를 못해서,
‘爲執名句(위집명구)하야’, 이름과 구절에 執着하기 때문에,
‘被他凡聖名礙(피타범성명애)일새’,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그 이름에 걸림을 입었을새, 당했을새.
범부, 성인 또는 큰스님, 작은 스님,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등 이런 이름들은 전부 지어서 붙인 거예요.
내가 요즘 그 말 잘 쓰는데, 사람들이 전부 이름을 지어 붙인 것입니다.
언제 무슨 이름이 있었어요? 무비라고 하는 이름도 지어 붙여서 무비. 일단은 부르기 좋잖아요.
이렇게 分明히 存在하는 事物에다가 이름을 지어 붙인 것까지는 봐줄 수가 있어요.
이건 국화다, 뭐 흰 국화다 노란 국화다 그건 봐줄 수 있어요.
그런데 있지도 않은 것에 對해서 精神世界에 對해서 아주 여러 가지로 그려지는 그런 그림에 對해서
이름(相)을 지어 붙여 놨다니까. 그게 우리가 환장할 일이야. 왜냐하면
精神世界에 對해 지어 붙인 그 이름들을 자꾸 듣다 보면 세뇌가 돼 가지고 實在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修行四果가 없다면 말도 아닌 거요.
틀림없이 있는 거야. 너무나
확실하게 있는 거지. 그러나 修行四果는 단지
우리의 어떤 精神世界의
意識次元에 이름을 지어 붙인 것일 뿐인데 그것이 實在한다고 錯覺하는 것이요.
붓글씨를 하나 배워도 18급에서부터 1급까지
또 거기서부터 단수도 매길 수가 있고.
바둑을 배워도 마찬가지여. 18급 부터 1급까지, 1단 부터 9단까지 단수를 매길 수는 있는 거여.
그런데 그 9단 두는 사람이나 18급 두는 사람이나 뭐가 다른 게 있습니까? 없어요.
그저 그냥 다 사람일 뿐이야 사람일 뿐이라고.
그런 식으로 精神世界에 對해서 단지 이름을 지어 붙인 것일 뿐입니다.
나는 事物에다 이름 지어 붙인 것은 괜찮다고 봐. 그것도 嚴格하게 말하자면 誤謬가 적지가 않지만서도
그러나 그거 事物에다가 이름 지어 붙인 거는 우리가 常識人으로서는 理解한단 말이요.
이건 마이크라 하자, 이건 컵이라고 하자, 이건 연필이라고 하자, 이건 꽃이라고 하자, 좋다 말야 그건.
그런데 우리의 精神世界는 物質世界보다 훨씬 더 複雜하거든요.
몇 배로 더 廣大하고 몇 배로 더 複雜한 거라. 種類도 많고 奇奇妙妙한 거야.
精神世界는 不可思議하고 하루에도 뭐 八萬 四千 가지로 우리가 마음을 쓰는데
그거 쓰는 마음 하나하나 마다 전부 이름을 지어 붙혀. 그러나 지어 붙인 이름이지 아무 것도 아니거든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물결 따라서 작은 물결, 큰 물결, 동쪽으로 치는 물결, 서쪽으로 치는 물결,
1센티 짜리 물결, 2센티 짜리 물결, 3센티 짜리 물결.. 그거 本性은 그냥 물인데 그 이름들이 무슨 意味가 있습니까.
금방 내려가 버리면 아무 것도 없고 그런데 잠깐 파도치는 걸 가지고 그렇게 다양하게 이름 지어 붙이는 거죠.
爲執名句하야, 다 名句에 執着해 가지고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이름에 걸림을 당했을새
‘所以障其道眼(소이장기도안)하야’, 所以로 障其道眼이라, 그래서 道眼을 障碍한다.
나도 道眼이 벌써 열릴 뻔 했는데 수 십년을 그놈의 이름에 팔려 헤매다가 그만 道眼이 캄캄해져 버렸어.
道眼을 障碍해 가지고서 ‘不得分明(부득분명)이니라’,
분명함을 얻지 못함이라.
‘祇如十二分敎(지여십이분교)는’, 다만 저 십이분교는.
불교의 경전을 형식과 내용에 따라서 열 두 가지로 분류하는 거죠.
혹은 또 아홉 가지로 분류하면 9부교 또는 9분교. 또 12부경 무슨 12분교,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합니다.
내용과 형식이 예를 들어서 장행으로 산문으로 이렇게 죽 설명해 놓은 게 있고
혹은 또 게송으로 해 놓은데 또 응송이 있고 중송이 있고 그렇죠. 중송은 산문을 반복해서 한 것을 중송이라 하고.
그 다음에 응송은 예를 들어 거기에 맞추어서 이야기한 것 등등 또는 수기라고 하는 것도 있고.
무문자설, 부처님이 묻지도 않았는데 혼자 스스로 그렇게 법문한 것도 있고
또 인연에 대한 이야기, 그
다음에 비유에 대한 이야기,
그 다음에 뭐 본사, 본생, 부처님 당신에
대한 과거 이야기
또는 제자들에 대한 과거 이야기
별별 그런 걸 다 나눈 게 十二分敎야.
그 十二分敎 그게 다 뭐여? ‘皆是表現之說(개시표현지설)이라’,
表現하자고 해 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가 있다.
그런 것을 ‘學者不會(학자불회)하고’, 그런 사실을 學者들은 알지를 못하고 十二分敎 그 表現에 거기에 그냥 목을 매.
목을 매 가지고 자꾸 그런 걸 工夫해 나가다 보면 그 표현 거기에 세뇌가 돼 가지고,
‘便向表顯名句上生解(변향표현명구상생해)하나니’,
表現하자고 약속해 놓은 그런 名句를 向해서 알음알이를 낸다 이거여. 학자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表顯名句를 향해서,
表現名句上를 向해서 알음알이를 내나니,
‘皆是依倚(개시의의)라’, 이것은 거기에 다 의지하고 또 의지하는
것이다.
‘落在因果(낙재인과)하야’, 因果에 떨어져서,
‘未免三界生死(미면삼계생사)하나니라’,
因果에서 벗어나자고 하는 건데 因果에 딱 떨어져 가지고는 三界生死를 免하지 못한다.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어떤 가르침이 참 위대하고 정말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그것을 전해주고 싶다는 그런 것 있습니까 혹시?
천도가 그런가요, 천도 하는 것? 요즘 천도 많이 하죠. 불교
안에서 천도하는 이치,
예를 들어서 豫修齋(예수재) 지내고 하는 그거
많이 이용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불교에 대해서 대단한 법인가요?
무엇이 우리 마음속에 정말 대단한 법이라고 생각이 되는가,
이런 것도 한번 마음속에서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까 一物에 對한 眞正見解라고 하는 거
나는 참 그걸 아주 높이 평가합니다.
無依道人, 聽法無依道人.
바로 지금 이 瞬間 우리가 이것뿐(一物)이니까, 말하고 듣고 하는 이 事實, 이 存在,
이것이 들어서 다 하는 거고
이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고 이것이 이 세상 모든 것을 낳고 이 세상 모든 것의 根本이고.
법화경 같은 데서도 그 주머니 속에 꿰어 채워 준 보물이라고 하는 게 바로 이것 아닙니까.
그래서 나는 그 一物 이라고 하는 점을 부처님 가르침 중에 가장 소중한 가르침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옛날 根本佛敎 같은 데서는 因果의 理致, 緣起의 理致, 이걸 또 상당히 아주 소중하게 생각했죠.
뭐 첫 손가락 꼽는 가치 있는 가르침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닙니다.
그 사리불하고 목건련이 개종하고 불교로 귀의하게 된 동기도
연기의 이치를 설명 듣고 개종을 해 버렸거든요.
마승이라고 하는 비구를 만나서 당신 어떤 스승에게서 어떤 법을 배우냐 라고 물으니까
바로 ‘諸法從緣生(제법종연생) 諸法從緣滅(제법종연멸)
我佛大沙門(아불대사문) 常作如是說(상작여시설)‘, 이 게송을 소개했잖아요.
이 세상 모든 存在는 全部 因緣의 理致에 依해서 生기고
因緣의 理致에 依해서 消滅한다,
우리 부처님 대사문께서는 항상 이러한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게 緣起의 道理거든요. 연기의 도리 한 마디 듣고 그야말로 개종을 해 버리고
250명인가 되는 그런 많은 제자들을 다 데리고 부처님 앞으로 귀의해버렸죠.
그런 이들에게는 연기의 이치가 제일 가치 있는 가르침으로 그렇게 봅니다.
‘儞若欲得生死去住脫著自由(이약욕득생사거주탈착자유) ’,
그대가 만약에 生死去住脫著이야, 죽고 살고 거하고 머물고 또 인연을 벗어버리고 하는데
住하는 것을 벗어버리는데 脫著, 벗어버린다, 自由로움을 얻고자 하는 거, 벗어버리고 잊고 하는 거,
脫과 著(착)에서 自由로움을 얻고자 할진댄. 그런 것들이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리고 있는 그런 모든 現象들입니다.
그러렇게 生死去住脫著에서 벗어나면 한마디로 大自由 卽, 解脫이죠.
‘卽今識取聽法底人(즉금식취청법저인)하라’, 여기에도 聽法底人 나오네요.
바로 이 瞬間 法門을 듣고 있는 그 存在, 그 事實을 識取하라, 識取, 알아차려서 取하라.
완전히 내 것으로 하라 라고 하는 뜻에서 取 字를 붙였습니다.
알아차려서 取하라. 이게 本來 나의
生命이고 佛敎의 生命입니다.
바로 이점이에요.
聽法底人, 無依道人, 또 無爲眞人, 隨處作主하는 그 主人公.
그 법문을 듣는 存在는
‘無形無相(무형무상)하며’,또 ‘無根無本無住處(무근무본무주처)하야’.
그러면서 ‘活鱍鱍地(활발발지)라’, 어디에도 매이지 아니해.
아무리 감옥 속에 또 감옥 짓고 감옥 속에 또 감옥 지어가지고
십 중 이십 중으로 철장을 그렇게 친다 하더라도
이 한 物件(一物), 無依道人, 聽法底人 이거는 그냥 저 높은 하늘로 우주 어디에나 천리만리 活活 自由롭게 다니죠.
그게 活발발地 아닙니까. 無根無本하며 無住處라, 아무리 철조망에 가두고 가두고 콘크리트로 천 겹 만 겹으로 가둬놔도
그 한 物件(一物) 그것은 활발발지하게 마음대로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로 쏘다니는 거죠.
그 한 物件(一物) 그건 누구도 석가모니도 하느님도 예수도 노자도 공자도 그 누구도 어떻게 할 길이 없어요.
‘應是萬種施設(응시만종시설)하야’, 이 한 物件이 萬種施設에 應하나, 이 한 物件(一物)이 萬 가지 施設함에 應하지만,
‘用處祗是無處(용처지시무처)일새’, 用處, 應用하는 그곳이 祗是無處라, 應하지만 그 한 物件 立場에서 보면
어느 곳도 處所가 있는 게 아니야.
‘所以覓著轉遠(소이멱착전원)이요’, 所以로 覓著轉遠이라, 그것을 찾으면 찾을수록 더욱 멀어진다.
지금 임제록 읽고 있다고 해서 거기에 내가 있는가, 아니 거기에 내 한 物件이 있는가하고 찾으면
벌써 저만치 도망가 있는 거요. 그 한 物件은 主客이 나눠질 수 없는데도 우리 意識이 臨時로 主客을 나눠 놓습니다.
主客, 찾을 놈과 찾는 나를 나눠 놓고 이렇게 한번 찾아보는 거에요. 그 한 物件은 나눠지는 게 아닌데.
그러니까 이 한 物件이 마치 그림자와 같아 가지고 自己 그림자를 自己가 못 밟듯이
自己 마음이 自己 손에 안 잡히는 거야.
그래 覓底轉遠(멱착전원)이라, 찾으면 찾을수록 더욱 멀어진다.
三世 前부터 마찬가지고 歷代 祖師도 역시 못 찾아요, 自己 마음을 그 一物을...
마음 마음 마음이여, 그
마음 참 찾기 어렵구나,라고 달마스님도 일찍이 그랬잖아요.
‘求之轉乖(구지전괴)니’, 求할수록 더욱 어그러지니, ‘號之爲秘密(호지위비밀)이라’,
마음,한 物件 이건 이름을 붙여서 秘密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 이 한 물건,마음은 分明히 있긴 있는데 찾지를 못하기 때문에 秘密이죠.
참 表現 근사해요. 이 마음, 한 物件을
일러 그것은 秘密이야, 그건 秘密이야 그래버려.
우리가 뻔히 알고
있지만 손에 안 잡히는 한 物件이야.
每瞬間 그것을 잘도 活用하고 있으나
그게 손에 안 잡히고 찾으면 찾을수록 멀어지고 求할수록 멀어진다.
그래서 한 物件, 마음 그건 秘密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거야. 참 표현이 아주
명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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