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경전연구회
강좌》
14-5 修行 (수행)이란 業(업)을 짓는 일이다
儞諸方言道(이제방언도)호대
有修有證(유수유증)이라하니 莫錯(막착)하라.
設有修得者(설유수득자)라도 皆是生死業(개시생사업)이며
儞言六度萬行齊修(이언육도만행제수)라하나
我見皆是造業(아견개시조업)이니라.
求佛求法(구불구법)은 即是造地獄業(즉시조지옥업)이라
求菩薩亦是造業(구보살역시조업)이요看經看教(간경간교)도
亦是造業(역시조업)이니
佛與祖師(불여조사)는 是無事人(시무사인)이라
所以有漏有爲(소이유루유위)와
無漏無爲(무루무위)가 爲清淨業(위청정업)이니라.
有一般瞎禿子(유일반할독자)하야
飽喫飯了(포긱반요)하고
便坐禪觀行(변좌선관행)호대 把捉念漏(파착념누)하야 不令放起(불령방기)하며
厭喧求靜(염훤구정)하나니
是外道法(시외도법)이니라.
祖師云(조사운), 儞若住心看靜(이약주심간정)하며 擧心外照(거심외조)하고
攝心内澄(섭심내징)하며
凝心入定(응심입정)하면
如是之流(여시지류)는 皆是造作(개시조작)이라하니라.
是儞如今與麼聽法底人(시이여금여마청법저인)을
作麼生擬修他證他莊嚴他(자마생의수타증타장엄타)리오
渠且不是修底物(거차불시수저물)이며
不是莊嚴得底物(불시장엄득저물)이니라.
若教他莊嚴(약교타장엄)하면 一切物(일체물)을 即莊嚴得(즉장엄득)이니
儞且莫錯(이차막착)하라.
修行(수행)이란 業(업)을
짓는 일이다, 그랬습니다.
‘儞諸方言道(이제방언도)호대
有修有證(유수유증)이라하니’,
그대들
諸方에서 말하기를, 닦음도 있고 증득함도 있다, 수행도 있고 깨달음도 있다.
우리 일반 불교에서 다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냥 앉아서 쪼고 있고 용맹정진도 하고
뭐가 나올까 싶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거요. 제방에서 다 그렇게 알고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가르치고
答을 못 얻으면서
끊임없이 그쪽으로만 나가고 그렇게 되는 거야.
有修有證(유수유증), 그것이 修行이다 그러는 거요.
그런 걸 자꾸 하다보면 깨닫는 게 있다,
증득하는 게 있다 그렇게 하는데,
‘莫錯(막착)하라’, 錯覺하지 마라.
‘設有修得者(설유수득자)라도’,
설사 너희가 말하는 대로 그렇게
용맹정진하고
30년, 40년, 50년
세월을 그렇게 참선 수행을 해서 뭔가 얻은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皆是生死業(개시생사업)이며’, 그건 全部 生死業이다.
‘儞言六度萬行齊修(이언육도만행제수)라하나’,
그대들이 말하기를 六度萬行을 다 닦는다,
전부 다 닦아.
참선만 하는 게 아니라
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 이걸 全部 골고루 열심히 닦는다고 하지만,
‘我見皆是造業(아견개시조업)이니라’, 내가 보기에는 그게 全部 다 業을 짓는 짓이다 이거여.
業은 좋은 業이야 일단.
그래도 우리가 그런 業을 지어야 돼.
그런데 왜 여기서 業을 짓는 일이라고
비꼬아서 말하는가 하면 정말 내 眞實한 한
마음자리, 無位眞人 그 자리에 딱 安住해가지고
보시를 하든 지계를 하든 뭘 하든 그야말로 흐르는 물에 배 타고 아무 힘들이지 않고 지나가듯이
그렇게 참선을 하고 육도만행을 닦아야
옳은데 이건 그게 전부라고 生覺하고 거기에
목을 매다는 거요.
그러니까 그걸 業을
짓는다고 하는 거예요.
어떤 좋은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아! 이건 나의 삶이야, 그냥 놀면 뭐 할거야, 아무 것도 안하면
뭐 할거야 하고 봉사도 하고 어디 가서 어려운 일도 도와주기도 하고 이런 저런 일을 인연 따라서
자기 능력 따라서 보살행을 설렁설렁
하면 그거는 業 짓는 게 아니야.
왜냐?
主人이 主人 자리에 딱 있으니까.
주인으로서 내 자리에 딱 있는 거,
隨處作主하는 것.
그걸 그렇게 못하니까 이건
造業, 業을 짓는 일이다.
‘求佛求法(구불구법)도’,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은
‘即是造地獄業(즉시조지옥업)이라’,
부처되려고 하는 것은 地獄業 짓는 짓이다.
眞理를 구하는 것은 地獄業 짓는 짓이다.
진리가 뭐고 부처가 뭐기에 主人인 自身을 두고
밖에 나가서 業을 짓느냐고요.
무슨 엉뚱한 짓을
하느냐 이거요.
하, 이건 제가 하는
소리가 아니고 임제스님이 하는 소리입니다. 하도 겁이 나서 내가…
‘求菩薩亦是造業(구보살역시조업)이요’, 菩薩을 求하는 것도 또 造業이다, 業을 짓는 짓이다.
‘看經看教(간경간교)도’, 경을 보고 교를
보는 것도 ‘亦是造業(역시조업)이니’,
역시 業 짓는 짓이니
‘佛與祖師(불여조사)는’, 부처와 조사는, ‘是無事人(시무사인)이라’, 일 없는 사람이다 이거야.
그러니까 六度萬行을 해도 일 없는 立場에서
하는 거지. 정말 열심히 누구보다도 더 땀을
많이 흘리고
하더라도 自己 마음에는 한다고
하는 일이 하나도 없이 그냥 하는 거야. 그러면 그게 無事人이야.
이건 일을 해도 일이 없는 사람이고 만약에 그일에 매달리고 하면 그건 정말 有事人이 되는 거죠.
그래서 佛與祖師는 無事人이다.
‘所以有漏有爲(소이유루유위)와
無漏無爲(무루무위)가 爲清淨業(위청정업)이니라‘,
그렇게 되면 텅~ 빈 것이다 이런 말입니다.
여기서 有漏有爲 無漏無爲는 淸淨業이라고
하는 것은 다 텅~ 빈 것이다 空한 것이다,
空의 意味를 淸淨이라고 많이
이야기하니까요.
그런 業은 有爲業이 됐든지
無爲業이 됐든지 다 텅~ 빈 空 淸淨한 業이다.
‘有一般瞎禿子(유일반할독자)하야’, 어떤 눈 먼 머리 깎은 사람이 있어서
‘飽喫飯了(포긱반요)하고’, 배불리 밥을 먹고 나서
‘便坐禪觀行(변좌선관행)호대’, 곧
좌선관행, 좌선하면서 관행한다, 앉아서
수행하든지 비파사나를 하든지 하는 모든 전통 선법을 전부 ‘坐禪觀行’ 이 소리에 다 包含되는 거죠.
아니면 止觀타자를 하든지.
그냥 앉아 있는 것만 하든지.
아니면 뭐 呪力을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일반적으로 통틀어서 말할
땐 坐禪觀行이야. 좌선관행하는데 이제 이런
類가 있죠.
‘把捉念漏(파착념누)하야’, 生覺이 빠져나가는 것, 새어 나가는 것을 딱 잡는다 이거야.
그러니까 더 이상 生覺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거, 그래서
‘不令放起(불령방기)하며’, 놓아서 일어나지 않게 한다. 그러니까 생각이 빠져나간다는 것은 계속 생각이 흘러가고 새로운 생각이 들어와서 또 흘러가고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서 또 흘러가고… 이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망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거지.
그걸 不令放起여, 놓아서 일어나지 않게 한다.
대개 참선이란 그런 거 아닙니까.
雜念이 많이 일어나서… 이러잖아요.
그 다음에
‘厭喧求靜(염훤구정)하나니’,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구한다.
대개
시끄러운 거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좋아해. 그래서 한참 좌선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여름에 수련대회를 한다든지 하면 막 그냥 화를 머리끝까지 나가지고
공사도 못하게 하고 야단법석을 떠는 거지. 속은 더 시끄러우면서 밖에 조금 시끄러운 거 그냥 지나가면 가는 건데
하루 종일 하라고 해 봐야 하지도 않아요.
아이들 아무리 떠들어봐야 잠깐 떠들다
말지.
그 이튿날 새벽까지 못 떠들어.
그런데 그걸 못 참고 뛰어나와서 주지 어디
갔나,
敎務 어디 갔나 하고 막 그냥
떠들어대는 거요.
그래서 안이나
밖이나 고요하기만을 구하는 거야.
求靜,
고요한 것만 자꾸 구하나니, 이런 것은
‘是外道法(시외도법)이니라’,
그거
외도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이거 전통
불교의 최고의 스승인 임제스님이
이게 全部
外道法이라고 가르쳤어. 把捉念漏하여
不令放起, 외도법이라고 했어요.
厭喧求靜,
生覺이 일어나게 돼 있어. 왜 멈추려고
해? 그 生覺을 왜 잡으려고 해?
왜 안 일어나게 하려고 해?
그냥 生覺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가보다
해야지.
시끄러우면 妄想이 일어나서
시끄러운가보다 해야지.
‘祖師云(조사운), 儞若住心看靜(이약주심간정)하며’,
구체적으로 네 가지를 들었어요.
보통 전통 불교에서 修行하는 方法을 네
가지를 들었는데,
住心看靜(주심간정),
擧心外照(거심외조), 攝心内澄(섭심내징),
凝心入定(응심입정) 그랬습니다.
住心看靜은
그대들이 만약에 住心, 마음을 머물러 가지고,
看靜, 고요한 것을 看한다 이 말이여.
마음이 흘러가는 것을 자꾸 잡아서 놓고,
놓고 하는 거요.
우리가 화두를 한번 들고
앉아 있으면 화두는 금방 어디로 놓쳐버리고
또 妄想이 들어오죠.
住心 이라고 하는
것은 實際로 話頭라 해도 좋아요.
화두를
딱 멈춰 둬, 住, 화두를 딱 멈춰 둬 가지고 恒常 그 자리에 있기를 바라는 거죠.
그런 방법이 있고,
擧心外照(거심외조)라, 마음을 들어서
밖을 觀照하는 거야. 이게 止觀.
앞에는 止고 요거는 觀이야.
비파사나가 여기에 다 해당되는 거야.
擧心外照 하잖아요.
내가 숨을 쉬면 숨 쉬는 것을 예의
관찰하고 밥을 먹으면 밥 먹는 것을 예의
관찰하고
누구하고 싸워도 싸우는 것을 예의
관찰하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서
역시 걸어가고 있는 自身을 銳意 觀察하는
이런 觀察法이 있는 거야.
이건 이것대로 하나의 수행이라고 생각을
해요. 擧心外照.
南方에서 工夫해가지고 비파사나 하는
게 全部 擧心外照야. 마음을 들어서 밖을
비춰 보는 거지.
그래 첫째 숨 쉬는
거부터 살피잖아요. 숨은 한 순간도 안
쉬곤 못 배기니까.
살아있는 동안엔 숨을
쉬니까 살피기가 제일 좋은 거야.
또 어딜
가면 걸어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내 마음이
그 걸어가는 것을 따라 가는 거야 계속.
밥을 먹으면 밥 먹는 거 따라가고. 그러면 사람이 상당히 침착해지고 조용해져.
왜냐, 하나의 내가 있어서 밖에서 드러난 나를 살피니까.
그래서 이런 수행을 한 사람은
아주 조용하고 침착하고
그리고 함부로 덜렁대지도 않고 그런 점은
있어요.
그 中의 代表者,
釋一行스님 석일행. 釋一行 하니 모르겠죠?
틱낫한.
그 분이 擧心外照 世界에서 지금 第一 高手야. 출가한 스님들은 전부 釋자 써야 돼요.
그런데 스님들이 만약에 속가 성을 쓰면 큰 잘못입니다.
반드시 釋 자 써야 돼요.
그런데 서류상에 꼭 필요하고 법적으로
필요할 때는 당연히 俗名 속성 써야지.
그러나 불명 쓸 때는 무조건 釋 字 써야
돼요, 釋 누구누구.
그런데 釋一行 스님처럼 그렇게 아주
몸에 배어 버리면 그런 사람들은 조용하고
침착하고 실수가 없지.
그렇게 되면 실수를
안 해요. 왜냐, 실수를 하기 前에
또 하나의 내가 失手하는 나를 살피고
있으니까. 그게 익숙해진 사람은
또 하나의 나 그게 나를 살피고 있으니까 살피고 있는데
실수할 리가 없죠.
그 다음에
‘攝心内澄(섭심내징)하며’, 内澄, 밖으로
흘러가는 마음을 거둬들여 가지고
안으로
고요하게 맑게 하는 거야. 보통 眞如를
觀한다든지 하나의 무엇을 觀해가지고
일어나는 마음을 자꾸 밖으로 나가는 것을 전부 거둬들여 가지고 안에서 녹여.
녹이고 녹여서 나중에는 그런 妄想이 깨끗해져가지고
안으로 아주 맑은 물같이 깨끗해져버려.
밖으로 일어나던 마음들을 전부 그렇게
하니까.
그 다음에
‘凝心入定(응심입정)하면’, 看話禪이
여기에 해당 될 수가 있어요.
마음을
凝固시켜, 뭉쳐, 화두에 뭉쳐가지고 선정에 들어간다 이거지. 凝 字가 그 말입니다.
마음을 화두에다 엉기게 만들어, 엉길 凝 자 아닙니까.
그러니까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그 마음이
화두라고 하는 하나의 어떤 문제에다가 자꾸
집중시키는 거야. 그러면 마음이 화두에
엉기는 거죠.
이것을 火鏡(화경)을
가지고 比維를 많이 하지요. 太陽 빛이
아무리 뜨거워봐야 불이 안나요.
그런데 그
화경, 돋보기를 가지고 초점만 딱 맞춰서 종이에 갖다 대면 2-3분만 있어도 불이 확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게 凝心入定이야.
흩어져 있는 태양빛을 하나로 엉기게 만든
거지. 집결시킨 거지.
마음을 모아서 선정에 들어간다.
하나의 어떤 안정된, 定은 뭐죠,
定은 안정되고 고정된 그런 데 들어가는
거요.
주력이든 기도든 무슨
비파사나든 화두참선이든 아니면 묵조선이든 이 모든 선정 수행이
전부 이 네 가지에 다 해당됩니다.
住心看靜(주심간정), 擧心外照(거심외조),
攝心内澄(섭심내징), 凝心入定(응심입정)
여기 다 들어가요.
‘如是之流(여시지류)는
皆是造作(개시조작)이라하니라’,그런데 이와같은 修行流는 全部
造作이야.
自然스러운 게 아니라고.
그래서 육조스님은 그동안 출가하기 전에는
세속의 어떤 관례,
그 당시 세속의 관례가
뭡니까, 충효거든요. 나라에 충성할 수
있는 기회만 되면 무조건 충성해야 돼.
그
다음에 효도하는 거야. 忠, 孝 둘
뿐이야. 부모에게 효도하고 선조들에게
효도하고
그것이 그냥 머릿속에 콱 박혀
있는 거야. 그 울타리에서 요지부동이라.
그런데 뭐라고?
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 머물지 말고 네 마음
내키는 대로 써버려라.
忠과 孝,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而生其心, 네 마음 내키는
대로 써버려라 그거야.
그게 우리 人間
마음의 本來 생긴 모습이다.
어떤
法을 미리 設定해 놓고 그것을 하나의 固定觀念化
해 가지고 거기에 목을 매고
이것이라야만
된다 하고 꼭 그렇게 生覺하지 마라 그 말 아녀?
그 말 딱 듣고는 그만 하~ 정말 거기서 해탈해버린 거야.
忠孝라고 하는 거기에 解脫해버리고
자유로와져서 바로 홀어머니도 버려버리잖아.
그리고 그냥 제 마음 갈 데로 가는 거
아닙니까.
대단하잖아요.
본래 우리 人間의 마음이 생기기를 그렇게 생겼고
마음이 모든 일의 根本이고 그 根本 따라서 우리는
살게 돼 있는 거야.
그런데! 그런
마음을 뭐 거둬 들인다, 붙들어 맨다, 여러분들 아무리 해 봐요.
하루 24시간 참선한다고 앉아 있어 봐. 10분도 안 돼서 微細流注(미세유주)라고 해 가지고
아주 微細한 마음의 흐름이 있는가 하면 큰 마음의 흐름이
있어 큰 妄想,
이 生覺이 났다가 저
生覺이 났다가, 그거는 우리가 生覺하면서도
意識해.
그런데 意識하지 못하는 微細流注가
있어요. 아주 微細한 生覺의 흐름(流注)은 意識하지
못합니다.
내가 生覺을 하고도 내가 意識을 못하는
生覺이 있어요.
그게 마음의 본령이라, 마음이
본래 그렇게 생겨 먹은 거요. 왜! 이 마음은 죽은
物件이 아니니까.
죽은 物件은 가만히
있지만 이놈의 이 마음은 이거는 정말 팔팔하게 살아 있는
物件이기 때문에
이게 한 瞬間도 그냥 있지
않고 活動하는 거야.
그래서 價値觀도 그렇게
設定해 놓고 이거다 저거다 할 일이
아닙니다.
충성과 효도가 지상에서 제일가는
일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이거야.
그 육조 그 사람은 사람 마음의 本來 생긴 모습 그것을
把握하게 된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精誠스럽게 모시던 어머니를 버려 버리고 떠나가잖아요.
지금 우리가 출가한 거 하고 천지차이입니다.
중국에 그 당시 사회 통념상,
홀어머니를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모시다가
그 어머니를 버려두고 간다고 하는 사실이 보통
革命이 아닌 거요 이거는.
그러니까 천하의
육조 혜능이 됐죠. 나무 장사나 하는
총각이었는데 속에는 그런 아주 당찬 게 있었어.
‘是儞如今與麼聽法底人(시이여금여마청법저인)을’,
이것은 그대들 지금,
與麼, 이렇게
聽法하고 있는 그 사람, 지금 여러분들
이렇게 聽法하고 있는 이놈이 與麼야, 이렇게.
이처럼 法門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그놈 聽法底人,
‘作麼生擬修他證他莊嚴他(자마생의수타증타장엄타)리오’,
그 사람을 作麼生(자마생), 어떻게 그 사람 그놈을 닦고자 하며(修他)
어떻게 그것을 證得하고자 하며(證他)
어떻게 그놈을 莊嚴하려고 하느냐(莊嚴他)
아 그놈이 그것이 聽法底人이 도대체 무슨 物件이기에
그놈을 닦으려고 하고 증득하려고 하고
꾸미려고 하고 장엄하려고 하고 하느냐...
생겨먹은 대로 살면 될 걸 왜 그걸 그렇게 일부러 애를 쓰며 하려고 하는가.
‘渠且不是修底物(거차불시수저물)이며’, 그것은 그 사람, 聽法底人,
지금 말을 하고 듣고 있는 이것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비구도 비구니도 아니고,
승도 속도 아니고, 노도 소도 아니야
이놈은 아무 것도 아니면서 그 모든 것을
다 아우를 수 있는
그 無位眞人이야. 差別
없는 대평등의 참사람이야. 그것은
不是修底物이라, 닦을 物件이 아니에요 이놈은. 人間의 마음 이놈은 닦아서 되는 物件이 아니야. 本來부터 그대로라 그대로. 그런데도 닦는다고 그런다니까. 이 참 불교가 웃기는 일이에요. 不是修底物이다, 그것은 저 渠 字, 그것은 또한 닦는 物件이 아니다.
‘不是莊嚴得底物(불시장엄득저물)이니라’,
인간의 마음 그놈은 莊嚴해서 치장하고 꾸미고 다듬고 수행을 한다고 해서 얻어질 物件이 아니다.
‘若教他莊嚴(약교타장엄)하면’,
만약에 그것으로 하여금 莊嚴한다고
한다면,
‘一切物(일체물)을
即莊嚴得(즉장엄득)이니’, 一切 事物,
이게 뭐냐 하면,
사람이 곧 一切고 一切가
곧 사람이야. 사람이 바로 宇宙萬物이고 宇宙萬有가 곧 사람이지
그래서 따지고 보면 결국 마음은 主와 客이
서로 둘로 나눠지지 않은 그런 境地거든요.
‘儞且莫錯(이차막착)하라’, 그대들은 또한 錯覺하지 마라 말야.
마음 그건 그렇게 생긴 게 아냐.
그냥 本來인, 本來인 그 모습은 부처고
중생이고 그냥 한결같은 것이다,
그저
이름(名相)을 부처다 보살이다 괜히 그렇게 붙여 본 것일 뿐이지
마음 그건 결코 그렇게 이름 붙여질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 해솔님이 올린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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