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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거울에 비친 그림자들~~~

장백산-1 2014. 7. 10. 13:23

 

 

 

 

 

마음거울에 비친 그림자들 |바로보기-正見         

 

 

 

 

 

佛法을 한 마디로 表現하라면  '本來性稟을 밝히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本來性稟  本性은 단 한 번도 어두웠던 적이 없었고, 사라진 적도  없었으며,

우리의 삶, 이 世上은 언제나 本來性稟  本性 위에서  피어나고 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의식이 일으키는 妄想 是非 分別 比較 判斷등 온갖 生覺들로 因해

우리 의식/마음이 온갖 生覺들로 가려진 本性을 보지는 못한 채,

겉모습(相)의 이름과 모양(名色)만을 집착하고 따르기 때문에

늘 영원히 그 텅~빈 본바탕 자리에 있는 自然性稟을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예로부터 선에서는 이 本性의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곤 한다.

거울은 모든 것을 差別하거나 分別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낸다.

거울 앞에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든지 다 수용해서

그것이 좋거나 나쁘거나,  추하거나 아름답거나

가리고 차별하거나 상관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그것을 비추어 낼 뿐이다.

 

그 때 사람들의 의식/마음은

그 거울 속에 있는 온갖 좋고 나쁜 對相들이

固定된 實體가 있는 진짜인 것으로 錯覺해서

가짜인 그 對相을 좋으면 애착해 가지려고 하고,

싫으면 미워하고 밀쳐내고 멀리하려고 하면서,

온갖 是非 分別 比較 判斷 解釋과 괴로움을

의식/마음 속에 생각으로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

 

사람들의 의식/마음은

거울 속에 비친 모습(相)이

진짜 自己自身인 줄로 알고, 거울 속에 비친 그림자 같은 이 세상/삶이

진짜 世上인 줄로 진짜 삶인 줄로 錯覺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本來性稟  本性을 본다고 함은

거울 속에 비친 그림자들을 보면서

그것이 진짜인 줄로 잘못알아 집착하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거울 자체 즉, 이 세상 모든 것을 비춰내는 그 근본 바탕을 바로 보는 것이다.

 

아무리 좋고 나쁜 것들이 거울 속에 비치더라도

거울 그 自體, 텅~빈 근본 바탕은 거울 속에 비친 것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상관도 없다.

거울 그 自體는 그저 이 세상 모든 것을 단지 비추어 낼 뿐

어떤 判斷 分別도 하지 않고, 좋아하거나 싫어하지도 않으며,

거울 그 자체 속에 비친 對相들을 相對해서

그 어떤 괴로움이나 고통도 일으키지 않는다.

 

바로 이와 같다.

우리의 본래 마음 또한 바로 이 거울 自體와 같다

또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지금 이 모습 그대로 完全한 性稟이다.

 

부처를, 깨달음을 별도로 따로 얻으려고 애쓸 일도 없고,

찾아 나설 필요도 없이, 지금 이대로 한 시도 빠짐 없이

우리의 본래 마음을 우리 의식/마음이 늘 쓰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의식이

눈을 통해서 보이는 모든 것을 判斷하지 않는다면,

귀를 통해서 들리는 모든 소리를 分別하지 않는다면,

코와 혀를 통해서 느껴지는 모든 맛과 향을 差別하지 않는다면,

몸을 통해서 느껴지는 모든 감촉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다면

일어나는 온갖 生覺들을  따라가지만 않는다면,

이상 그 모든 것들이 다만 마음 거울에 비친 그림자일 뿐

固定되고 不變하는 實體가 아님을 안다면,

지금 이대로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모든 對相이

있는 그대로 本性 아님이 없고 眞理 아님이 없다.

 

우리들의 의식/마음이

겉모습이나 이름, 모양을 따라가지 말고

그 모든 것을 可能하게 하는

그 마음거울이라는 본바탕 자체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마음거울이라는 본바탕 자체를 똑바로 보려면

生覺이나 分別심으로는 不可能하다.

그것은 우리 의식/마음 생각으로 因識되는 對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직 모를 뿐'이다.

안다고 입 뻥끗하면 바로 어긋난다.

法은 眞理는 알려지는 어떤 對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선사 스님들께서는

머리로 생각/마음/의식으로 헤아릴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다양한 方便을 쓰셨다.

 

道가 무엇입니까 라는 물음에,

마른 똥막대기라거나, 뜰 앞의 잣나무라거나,

손가락을 들어 보이거나,

알 수 없는 禪問答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 方便이 바로

머리로 헤아리고 判斷 分別해서 알려고 하는

그 모든 習慣的인 思考方式을  탁 그치고,

도무지 어찌할 수 없어서 앞뒤로 꽉 막히는,

은산철벽과도 같은,

'오직 모를 뿐'인,

도저히 答이 나오지 않는

그런 工夫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看話禪의 話頭란 바로 여기 '오직 모를 뿐'에서 나오는 疑心이다.

도무지 무슨 암호같은 화두를 풀 방법은 없고,

生覺이나 마음 意識을 造作해서도 안 풀린다면,

그러나 答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면,

당신은 어찌할 것인가?

 

그저  생각 마음 의식이 꽉 막힐 뿐이고,

답답하고 갑갑할 뿐이며, '오직 모를 뿐'이다.

 

이러한 답답한 마음 상황이 지속되고,

답을 알고자 하는 마음  그러나 그 무엇도 할 수 없어서

꼼짝달싹 못하고 門 없는 門을 계속해서 두드리다 보면

門이 활짝 열린다는 것이 바로 간화선의 方便인 것이다.

 

내 눈 앞에 등장하는

그 모든 삶/세상의 스토리며, 등장인물들이며,

그 모든 成取와 失敗등 그 모든 것들은

단지 거울 속에 비친 허망하고 헛된 고정되고 불변하는 실체가 아닌 

다만 꿈 같고 신기루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은 것일 뿐이다.

 

당신이 관심을 가질 부분은

그 거울 속에 비친 가짜 모습들이 아니라,

그 모든 가짜 모습들이 비추어지고 일어난 본바탕인

거울 그 자체를 되돌아 비추어(廻光反照)

마음거울 그 自體를 보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