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부처는 형상이 없다 |임제록 - 작은 임제록
참 부처(眞佛)는 形象이 없다
大德아 儞波波地往諸方하야 覓什麽物하야 踏儞脚板闊고
外求有相佛하면 與汝不相似니 欲識汝本心인댄 非合亦非離로다. 《해석》 “큰스님들이여! 그대들은 바쁘게 諸方을 쏘다니며 무엇을 求하느라고 그대들의 발바닥이 넓적하도록 밖으로 걸어 다녔는가? 부처는 求할 수 없고, 道는 이룰 수 없으며, 法은 얻을 것이 없느니라. 밖으로 形相이 있는 부처를 求한다면 그대들의 본래마음과는 닮지 않은 것이다.
그대들의 本來마음(本心)을 알고자 하는가? 그것은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道를 배우는 벗들이여! 참된 佛(眞佛)은 形相이 없고, 참된 道(眞道)는 形體가 없으며, 참된 法(眞法)/眞理는 모양이 없다.
佛 道 法 이 세 가지 法이 섞이고 融通하여 한 곳에 和合한 것이 본래마음(本心)이나, 이러한 理致를 알지 못하는 茫茫한 業識衆生이 단지 본래마음이라고 이름 지어 부를 수 밖에 없다.”
《강설》 불교를 알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時間을 消費하였는가? 佛法을 깨닫기 위해서 천하의 禪知識을 찾아 얼마나 많이 헤매었던가? 당시에 계셨던 모든 선지식들을 다 찾아다니지 않았던가? 읽어보고 찾아본 聖人들의 말씀과 經典 語錄들은 또 얼마나 되는가?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다 포기한 채 잠을 참아가며 먹을 것을 참아가며 살아 온 날들이 그 얼마던가? 인간으로서의 모든 미련들을 끊기 위하여 ‘한 번 청산에 들어가면 다시는 세상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一入靑山更不還].’는 구절을念佛 외듯 외우며 보낸 세월이 또 얼마던가? ‘부처는 求할 수 없고, 道는 이룰 수 없으며, 法은 얻을 것이 없는데. ’ 참으로 아득하고 茫茫한 업식중생(業識衆生) 그대로였다. 모양 없는 모양도 없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양도 없고 눈으로 볼 수 없는 모양도 없다. 모양이 없다고 하는 그 모양도 없다.그래서 金剛經의 가르침에서도 ‘만약 形相이나 모습으로써 如來를 보려하거나 音聲으로써 如來를 求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道를 行하는 것이다. 결코 如來를 볼 수 없으리라.’ ‘무릇 形相이 있는 것은 모두 다 虛妄한 것이니 만약 모든 形相이 形相이 아님을 보면 곧 如來를 보리라.’ “諸行이 無相하여 一切가 空함이 곧 如來의 크고 圓滿한 깨달음이다.”라고 하였다. 본래마음(本心/法性)이 부처고 부처는 그런 形相이나 體相이 없기 때문이다. 佛이니 道니 法이니 해봐야 다만 이름일 뿐이고 이름이 다르고 말이 다를 뿐이지이 이 世上 모든 것(存在)가 다 마음 뿐(一切唯心) 아닌가.
《문수경전연구회 강좌》
14-32 眞佛無形(진불무형)
大徳(대덕)아 儞波波地往諸方(이파파지왕제방)하며
覓什麼物(멱십마물)하야 踏儞脚板闊(답이각판활)고 無佛可求(무불가구)며 無道可成(무도가성)이며 無法可得(무법가득)이니라. 外求有相佛(외구유상불)하면 與汝不相似(여여불상사)니 欲識汝本心(욕식여본심)인댄 非合亦非離(비합역비리)로다. 旣辨不得(기변부득)을 喚作忙忙業識衆生(환작망망업식중생)이니라.
眞佛無形(진불무형)이라, 참다운 부처(佛)는 形相이 없다.
‘大徳(대덕)아 波波地往諸方(파파지왕제방)하야’, 그대가 아주 바쁘고 바쁘게 他方으로 諸方으로 쏘다니면서
‘覓什麼物(멱십마물)하야’, 무슨 物件을 찾아서 ‘踏儞脚板闊(답이각판활)고’, 그대의 발바닥이 넓적하도록 밟으면서 밖으로 돌아다녔는가.
‘無佛可求(무불가구)며’, 부처 가히 구할 것이 없으며 ‘無道可成(무도가성)이며’, 道 가히 이룰 것이 없으며 ‘無法可得(무법가득)이니라’, 法 가히 얻을 것이 없느니라. ‘外求有相佛(외구유상불)하면’, 밖으로 形相이 있는 부처를 구할 것 같으면 ‘與汝不相似(여여불상사)니’, 그대와 더불어 그 본래마음은 결코 맞는 것이 아니다. ‘欲識汝本心(욕식여본심)인댄’, 그대의 本心을 알고자 할진댄 ‘非合亦非離(비합역비리)로다’, 本心은 이 肉身과 合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肉身과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眞法無相(진법무상)이라’, 眞法은 모양 모습이 없고. ‘三法混融(삼법혼융)하야’, 眞佛 眞道 眞法 이 三法이 '하나'로 融合해 가지고서 ‘和合一處(화합일처)니’, 한 곳에 合해 있다. 그러니까 佛, 道, 法 그 이름의 뜻이 모두 하나라 하는 뜻이죠.
‘旣辨不得(기변부득)을’, 佛 法 道 이것들은 이미 이것 저것으로 가리려고 해도 변별할 수 없는 것을 ‘喚作茫茫業識衆生(환작망망업식중생)이니라’, 망망한 業識 衆生이 단지 이름 지어 부를 수 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