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나는 없다 (15)

장백산-1 2014. 7. 29. 23:19

 

 

 

 

나는 없다 (15)-진실이 늘 좋은 기분만 안겨주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없다 / 바로보기

2013/08/24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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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眞實이 늘 좋은 기분만 안겨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處한 어떤 狀況의 眞實은, 眞實의 特性이 우리의 生覺이나 느낌, 欲望과는 아무런 相關도 없다는 事實을 깨우침으로써 發見할 수 있습니다.....

 

眞實이 가진 한 가지 特性 또는 指標는, 그것이 우리의 存在를

擴大시킨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生覺과 느낌과 欲望은 뒤쪽으로 물러나서 점점 더 덜 重要해지고, 우리의 個人 領役도 점점 덜 끼어들게 됩니다...

 

眞實이 가진 또 하나의 指標는, 우리 存在를 고요하게하고 休息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일은 몸과 생각 느낌과 마음을 포함한 모든 차원에서 일어납니다. 眞實을 말할 때, 우리의 全 存在는 便安합니다. 이와 더불어 生覺과 느낌과 欲望도 相對的으로 고요해집니다....

 

眞實한 經驗은 또한 經驗에 대한 堅固함과 實在性을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그런 經驗은 지금 現在 瞬間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오직 지금 이 瞬間만이 滿足할 만한 實在性을 갖습니다....그러므로 眞實한 經驗이 가진 또 다른 特性은

깊은 滿足感을 안겨준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眞正한

자양분을 얻습니다.

 

하지만 眞實이 늘 좋은 기분만 안겨주는 것은 아닙니다. 不便하고 苦痛스러울 수도 있고 우리의 바람과 一致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眞實은 우리 自身과 우리의 知覺을 擴大시키므로 그것 自體가 도전이 될 수 있습니다....

 

 眞實은 우리 存在를 便安하게 하고 擴大시키고 가슴을 열어주는 反面, 眞實하지 않는 것은 우리를 움츠러들게 합니다...

 

欲望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認識은 우리가 願하는 것에만 좁게 焦点 맞추어져서 우리는 긴장과 갈등, 불안과 초조, 불만족 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지 알아내려고 분주해져서 이리저리 날뛰고, 우리 느낌은 과연 그것을 얻을 수 있을지 안절부절 못합니다. 欲望에 휘둘리면 우리의 內面은 갈수록 시끄러워지고, 원하는 것에만 좁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全切 眞實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 67~69쪽-

 

 

 

 

이 길은 우리가 願하는 것을 이루어내는 과정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가 願하는 것을 부수어 내는 過程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願하는 것이 實在하지 않음을 바로 볼 수 있게 하는 길입니다. 무언가를 願한다는 것, 未知의 것을 追求한다는 것은 우리를 實在에 있지 못하게 합니다. 眞實에 눈을 멀게 합니다.

 

이 길의 窮極的인 目標가 便安함이 될 수 없습니다. 便安함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결과물일 수는 있습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를 명확히 보아야 합니다. 始作은 煩惱에서 벗어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고 하지만, 이것을 내려놓을 때만이 眞正한 平和가 찾아온다는 事實을 銘心하십시오.

 

우리가 마주한 實相을 보는 일입니다. 우리의 生覺으로 보아왔던 世上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입니다.

여기에 便安함이나, 平和나, 自由나, 平等이나, 至足感이나, 일없음이나 人間이 生覺할 수 있는 모든

價値는 그림자(幻影)일 뿐입니다. 實相을 보고나서 이런 저런 表現들은 可能하겠지요. 그러나 實相에는 이런 저런 모습이 따로 없답니다.

 

이것을 看過하고 마음工夫 길로 나아간다면 體驗을 하고도 길을 잃거나 공부가 나아가지 않을 겁니다.

 "本性을 體驗을 하고 한 동안은 如如했는데, 지금은 늘 如如하지 않아."

"좀 工夫가 되어 便安해지는가 싶으면 또다시 마장이 낀단말이야."

"깨달았으면 고통받는 사람들의 불편한 마음을 치유해줘야해."

 

참으로 미묘하고도 어찌해볼 수 없으며, 심지어 매정해보일 수도 있지만, 實相을 보면

이런 式의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첫번째, 두번째 말은 그렇다치고 세번째 말은 當然히 나와야 하는 거 아니야?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 문장의 共通点은 모두 便安함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편안함이 공부의 가장 큰 가치기준입니다.

이 공부에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노자의 『道德經』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지불인(天地不仁) 이만물위추구(以萬物爲芻狗) 

천지는 어질지 아니하여 萬物을 추구로 본다.

  

송나라의 소철주(蘇轍註)에 추구(芻狗)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습니다. 추구는 “건초를 묶어 개의 모양을 만든 다음 이것을 제사 때 장식물로 사용하고 제사가 끝나면 버려 사람들이 밟는다.”는 것입니다. 즉,

天地自然은 世上萬事를 必要에 따라 쓰고나서는 가차없이 보내버린다는 말이겠죠. '건초로 만든 개'라는 것 自體가 가짜를 뜻합니다. 幻影처럼 일어나 因緣따라 쓰여지고는 보내는데, 그것에 어떠한 미련도,

愛着도, 意味도 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乾草로 만들었으니, 믿을 이유가 없겠지요. 世上萬事가 乾草로 만든 개라면 그것에 어질 理由도 없고, 人情이 남겨질 수도 없겠지요.

 

 그러니 편안함도 세상만물로서 건초로 만든 개나 다름없습니다. 편안함에 대한 가치부여가  사라져야 天地의 智慧에 닿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유니, 평등이니, 평화니, 지족감이니, 일없음이니 이

모든 것을 손에 쥐고는  天地의 智慧가 밝아질 수 없습니다.  그동안 쌓아온 깨달음 공부에 대한 知識은 물론 그 以外의 一切 知識도 내려놓아야 비로소 千個의 太陽이 하늘에 뜬 듯하겠지요.

 

事實 내려놓는다 하지만 내려놓을  게 따로 없습니다. 모든 게 宇宙法界의 因緣따라 일어나는 일이어서 '건초로 만든 개'입니다. 人間의 人情이나 人間이 賦與한 價値도 '허상(虛相)'입니다.

 

그러니 工夫에 어떠한 基準을 세워 놓아서는, 虛相의 틀/基準을 세워놓아서는 確實히 밝아질 수

없습니다.오직 잠에서 깨어나기를 바란다면 視野를 가로막고 있는 基準들이 實在하지 않음을 바로 보고 내려놓아버릴 뿐입니다. 그러고 나서 확 밝아지고 보면 便安해도 便安함이 아니요, 自由로와도 自由로움이 따로 없으며, 지족감으로 충만하다고 하나, 실로 그러한 일이 없음을 알 뿐입니다. 무사인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러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일없음이 일없음만도 아닙니다.  

 

自身의 工夫에

레벨을 붙이지 말 것이며,

目標를 세우지 말 것이며,

比較를 하지 말 것이며,

分析을 하지 말 것이며, 

다른 것을 두지 마십시오. 

 

이 자리를 체험하지 못했다면 늘 스스로를 보아 모든 것에서 疑問을 가질 뿐이며,

체험을 했다면 역시 늘 스스로만 보아 어떠한 基準/틀도 세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익고 익는 동안 世上萬事가 차가와지기도 하고 따사로와지기도 하지만,

어느 瞬間 모든 것이 남김없이 如如해져서 차가운 일이 와도 다른 일이 아니요,

따사로운 햇살이 비쳐도 역시 다른 일이 아님을 절감하고 절감할 것입니다.  

 

밝아지고 난 뒤에 편안하다고 하든, 지족감이 든다고 하든, 즐거움이라고 하든, 무사인이라고 하든 

무슨 말을 하면서도 그것에 머물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믿지도 않고, 붙잡지도 않으면서

自由自在로 낮도깨비처럼 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