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나는 없다 (17)

장백산-1 2014. 7. 30. 00:20

 

 

나는 없다(17)-욕망 자체가 고통의 원인입니다 나는 없다 / 바로보기

2013/08/28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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欲望하기라 불리는 이런 意識의 縮小가 일어날 때, 우리가 意識하는 것은 欲望의 "對相"입니다.

欲望하기라는 그 瞬間의 "經驗 自體"을 意識하는 것이 아닙니다. 欲望하기의 "經驗"속에는 거짓의

온갖 特性들이 亂舞하지만, 우리의 注意는 거기에 가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注意는 우리가 願하는

것에만 온통 쏠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苦痛을 끝내주리라 確信합니다. 

 

 하지만 欲望하기의 經驗을 意識하는 瞬間, 즉각 우리는 그 경험의 악취로 가득 차 있음을, 전혀 유쾌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欲望하는 對相의 否在가 우리를 苦痛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欲望 自體가

苦痛의 原因이라는 사실이 明白해집니다....

 

欲望으로 불타고 있을 때 그 불타오름을 意識하게 되면, 불타오름은 제풀에 타서 없어져 버립니다.

願하는 것을 願하지 말라고 자신을 설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그러한 바람 자체를 경험하십시오.

그러면 그 欲望에서 自由로워질 것입니다.

 

-71~72쪽-

 

 

 

아주 微細하고 微微한 일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아주 重要한 部分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欲望이 일어나고,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스스로를 위로하려 듭니다. 이런 속삭임이 울리지요.

"야, 저것은 말이야 가짜야. 幻像이라고. 저것을 얻어봐야 거짓을 얻는 것이어서 그것을 얻으면 나중에

도리어 짐이 돼. 그래서 차라리 뜻대로 되지 않은 게 잘된 일이야."

 

이솝우화의 '신포도와 여우'에 나오는 여우 心理와 똑같습니다. 에고가 에고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欲望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얻지 못한 物件은 가짜라고 중얼거리며 지나가지요. 얻어봐야 損害만 볼 것이라고 위로하면서요. 이런 패턴이라면 工夫가 교묘한 난관에 봉착한 것입니다. 에고에 놀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에고는 위로와 이야기와

설득을 듣고 싶어하는 性質이 있습니다. 자꾸 에고 自身에게 關心을 써달라고 注意를 모으지요. 보채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언제까지 이 있지도 않은 아기를 보살필 것입니까? 

 

欲望하는 對相의 不在가 우리를 苦痛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欲望 自體가 苦痛의 原因이라는 事實이 明白해집니다.

 

欲望이 채워지지 않은 것은 아무 問題가 되지 않습니다. 欲望에 놀아난 것이 문제이지요. 이러한 狀況에서 欲望의

實體를 보지 못하고 欲望이 채워지지 않는 에고를 위로한다면 당신은 平生 欲望하는 일을 그만두지 못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평생 에고인 자신 스스로를 위로할 것이고, 平生 欲望의 失敗를 經驗할 것입니다. 欲望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欲望의 生理를 看把해야 합니다. 이 欲望은  甚하게 汚染된 分別心이기 때문입니다. 

 

欲望을 어떻게 간파할까요?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나 簡單합니다. 있지도 않은 實體는 그것에 현혹되지 않고 바로 보기만 하면 허깨비의 正體가

드러나면서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합니다. 체험을 하고도 편안하지 않다고 한다면 便安함을 欲望하는 것입니다. 

편안함을 보려하지 말고 그 欲望하는 스스로를 보십시오. 편안함은 추구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欲望함이

사라질 때 스스로에게서 完全한 平和가 샘솟습니다.

 

깨달음을 찾는 마음, 편안함을 찾는 마음, 공부의 완성을 바라는 마음.....

지금 여기 이대로에서 반발자국만이라도 다른 곳에 마음이 가 있다면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결코 얻을 수가 없답니다. 이미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는데 못볼 뿐이지요. 이미 갖추어져 있는데 추구하는 마음이 그것을 가리고 있을 뿐이지요. 찾는 마음, 세운 마음만 사라진다면 당신은 끝없이 펼쳐진 光明 속에 이미 完全하고, 이미 아무 問題 없음을 볼 것입니다. 

 

欲望으로 불타고 있을 때 觀察者 立場에서 그 불타오르는 欲望을 注視하게 되면,

불타오르는 欲望은 제풀에 타서 없어져 버립니다.

 

欲望은 固定된 實體가 없습니다.  欲望하는 對相도 固定된 實體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우리 마음이 세운 마음에

속아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며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欲望의 길을 따라가지 말고 欲望을 바로 볼 것이며,

불타오르는 欲望에 괴로워 이리저리 避하지 말고, 불타오르는 欲望 속으로 들어갈 것이며, 비가 오면 우산 쓰지 말고 온몸으로 맞을 것이며, 바람이 불면 옷깃을 여미지 말고 가슴속에서 부터 맞이해 보십시오. 그것을 避한다면 그것이 實際하는 것처럼 되어 당신을 拘束할 것이지만, 그것을 바로 보고 그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위력을 잃고 스스로 사라질 것입니다.

 

煩惱 즉 菩提라고 했습니다.

'道는 歡喜입니다' 라는 말에는 손뼉을 치면서 '道는 苦痛입니다'라는 말에는 왜 달아나려 하십니까?

歡喜와 苦痛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分別하여 보면 다르게 보일 것이지만 實體가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條件化된 狀況에서 投映된 그림자를 보고 그렇게 이름 붙일 뿐이지요.

스스로의 性稟은 因緣이 다가오면 있는 그대로 비춥니다.

비친 그게 苦痛의 빛깔로 歡喜의 빛깔로 보일지라도 實際로 그러한 게 없지요. 

 

歡喜가 道가 아니요, 苦痛이 道가 아니지만 그래도 歡喜가 道를 떠나지 않았고 苦痛이 道를 떠난 일이 없습니다. 

모양에 속는다면 모든 것이 그것인 채로 諸各各 다를 뿐이지만, 모양에 속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道일 뿐이지요.

 

'온갖 말을 해도 그 말을 찾을 길이 없고, 온갖 일을 해도 그 일을 보지 못합니다.'

 

모양에 속지말고 문득 스스로를 본다면 모든 것이 스스로임을 나날이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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