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본질은 끊어진 자리에 있습니다 / 대행스님영원한 나를 찾아서
存在의 本質은 끊어진 자리에 있습니다 / 대행스님
存在의 本質은 끊어진 자리에 있습니다
이 자리를 佛敎에서는 金剛座 또는 구경(究竟)이라고도 합니다.
唯識學에선 第8識 阿賴耶識을 넘어선 아뢰야식의 根本자리라고도 하고요.
基督敎에선 모든 것의 터전이 되며 永遠한 하나님 자리인 萬世盤石이라고도 합니다.
여러분!
이 世上이 이 宇宙가 지금 무엇 위에 있습니까?
이 무거운 地球가 온 銀河界가 왜 虛空性의 宇宙空間 위에 둥둥
떠있나요?
科學者들 말처럼 萬有引力 때문에? 아닙니다.
그럼 하늘에서 두 사람이 서로 잡아당기면 안떨어지나요? 아니잖아요.
이 宇宙는 이 세상은 바로 끊어진 자리 속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一切의 因果와 原則을 超越해 있는 그 자리 위에 이처럼 宇宙萬物이 떡 벌어진 것이지요.
근데 끊어진 자리 그 속에 이 처럼 世上 萬物과 우리들이 들어있는데
또한 同時에 宇宙萬物인 우리들 속에 그 끊어진 자리가 들어있습니다.
왜냐?
끊어진 자리 그것을 認識하고 찾을 수 있는 意識을 가진 者 안에
그 끊어진 자리가 들어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實際로 그 끊어진 자리는 아무 것도 아니고,
어떤 것으로도(空으로도 안된다) 描寫되거나 形容될 수 없지만
그러나 끊어진 자리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기에
비로소 宇宙萬物 모든 것이 그 끊어진 자리 거기서 다 나오고 거기로 다 돌아가는 겁니다.
비유컨대 여러분, 여기 항아리가 하나 있다고 합시다.
그
항아리는 분명 그 안에 뭘 담기 위해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항아리는 늘 自己 안에 空間(虛空)을 채우고 있지요.
그래서 그 항아리 안에 뭘(물이라든지) 가득 담았다고 합시다.
그러나 여전히 그 항아리의 本來性稟은 虛空性稟이지요.
虛空性稟은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런데 그 항아리 밖에 있는 虛空과 안에 있는 虛空이 다른 虛空일까요?
아니지요.
이제 여기에 意識을 하나 添加합시다. 意識은 事實 永遠히 出沒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意識이 가진 活動 能力의 痕跡인 마음이 마음의 몸인 항아리 안에 갇혀서
그 항아리 몸만이 自己 마음의 몸이라고 錯覺을 합니다.
이게 우리들의 一般的인 意識이요, 個體化된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항아리 안의 內容物 卽, 마음은 언제든지 버려지고 또 새 것으로 交替될 수 있지요.
그래서 이 몸과 마음을 스스로 벗어버린 者는 바깥 虛空과 안에 虛空이 '하나'가 됩니다.
그 虛空이 意識에 依持하여 虛空 스스로 自覺될 때 이것을 法身佛이라 합니다.
그렇지만 이게 말이 虛空이지 實際는 虛空도
넘어선 眞空입니다.
이것을 하나도 어렵게 生覺할 게 없어요.
아이디어나 生覺에 무슨 모습이나 形像이 있습니까?
그것에 무슨 공(空)한 形像이 있습니까? 아이디어나 생각에는
아무런 모습이나 形像이 없지만 그게 그렇게 나타났다가 사라지지 않습니까?
그게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갑니까? 아이디어나 생각은 오고 가고함이 없습니다.
그냥 제자리에서 그렇게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눈에 속고 感覺에 속아와서 空이라고 해도
物質의 相對 餘白에 있는 空이나 想像하지만
진짜 空(眞空)은 그런 空이 아니에요.
그런 空은 物質의 相對 形像이지 진짜 空이 아니라.
딱 끊어진 자리, 一切 想像으로 接近을 不許하지만
딱 끊어진 자리 그 안에 아무리 어마 어마하게 큰 것도 다 들어가는
宇宙萬物의 그 背境 자리가 바로 진짜 空(眞空)자리 입니다.
그래서 딱 끊어진 자리는 無限이라.
그래서 이 世上 宇宙 모든 有形 無形의 것들이
딱 끊어진 자리 그 위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며 한 판 잘 노는 것입니다.
이 世上 宇宙가 이미 그런 것이죠.
그러니 딱 끊어진 자리를 自覺하라고해서 자꾸 이것저것 想像하고 밖으로 찾아서 되겠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이미 딱 끊어진 자리인 自己自身이 이 몸과 마음 조차 일어나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그 無限의 關門임을 알아야하고 또한 同時에 一切가 딱 끊어진 자리 超越의 背境 그 自體임을 自覺해야
하는 겁니다. 이게 참 究竟(마지막 窮極의 자리)이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눈을 감으면 거기 뭐가 있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世上 萬物의 形相에 끌려다닌
어두운 눈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고 實際로는 눈을 감은 거기에
이 딱 끊어진 자리가 떡 벌어져 있는 겁니다.
근데 이 딱 끊어진 자리 이게 눈 뜬 者에게만 보이니 그게 問題지만요.
여러분에게 끊어진 자리를 찾으라 하니까 엉뚱하게
자꾸 生覺이나 마음으로 밖에서 이리저리 찾을 궁리를 한다 이말입니다.
그래서 딱 끊어진 자리가 찾아집니까?
生覺이나 마음 그건 다 끊어진 자리 立場에서 보면 그림자(幻影)요, 妄想일 뿐인데....
그럼 어떻게
해야 그 끊어진 자리를 찾게 될까요?
찾으려는 생각 마음 그런 모든 行爲를
다 그만두라 이말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個體的 마음의 殘影이 남아서 이 世上萬物을 實際로 있다고 錯覺하는 힘도 넘어서서
個體的 마음이나 生覺 그것들을 幻想으로 보기 始作하면 서서히 딱 끊어진 자리
그 자리가 열리어 超感覺的으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우리라는 存在의 本質, 본바탕, 참 모습, 眞正한 形相이라면 形相입니다.
聖經에 사람을 하나님의 形相에 따라 지었다 하는 말은
本質的인 것을 表現하는 말이라서 바로 이 딱 끊어진 자리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 자리에
自己가 들어가야(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합니다.
그 자리에 自己가 들어가 하나가 되어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現象이 일어나는가?
이 世上 宇宙森羅萬象이 모두 無限한 自己 안에 떠있고
이 世上萬物이 모두 다 여러가지 多樣한 마음이 벌이는 幻想쑈임을 보게되며
一切가 다 自己 품안에 한바탕 펼쳐져 있음을 自覺하게 됩니다.
마음수련에서는 자꾸 自己自身을 죽이고 버리다보면 一切 自己 몸과 마음이 다 사라지고
다만 맑은 두 눈만 이 世上 속에 둥둥 虛空에 떠있는 것 같은 때가 옵니다.
이때 거기서 그 바라보는 者 두 눈을 또 한번 죽이고 버리고 넘어서서
이 世上을 뚫고 世上 裏面으로 확 들어가야 하는 것이라.
(이때부턴 이 세상을 죽이고 버린다고 할 수 있지요.)
그래야 온 宇宙가 온 世上이 自己 안에 삼켜지는 겁니다.
이것이 凡我一如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根本宇宙와 하나된 宇我一如가 되는 겁니다.
이리되면
끊어진자리에 드는 것이죠.
달리 말해서 끊어진 자리란 내가 完全히 없는 자리요,
그래야 비로소 이 世上이 自己가 되어버리는 자리입니다.
여기까지가 무정도(無情道)의 完成,, 法身佛의 完成이라.
그 다음은 報身佛 工夫 卽, 유정도(有情道) 工夫의 始作이고요.
그러니 끊어진 자리를 自覺한다함은
곧 自己가 一切를 다 쉬고 이 世上에 태어나오기 以前 자리,
그 根本意識자리로 돌아가 그 根源意識자리에서
고요히 一切를 觀察하는 觀察者 意識 그 自體로만 存在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工夫는 그 根源意識자리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個體的 마음도
쓰기 따라서는 하나의 眞理(여기서 煩惱無明이 곧 菩提란 말이 成立된다)
즉,
報身佛자리임을 알고 스스로 또 體驗해보는 겁니다.
이것이 유정도(有情道)의 始作이요, 個體的 마음인 報身佛자리는
死後 世界에 永生 속에서 菩薩 活動을 하기 위한 마음演習의 場이기도 합니다.
이 끊어진 자리, 根源意識자리가 이 世上에 이미 환하게 드러나 있음에도
森羅萬象의 形相에 속아 눈이 錯覺 속에 빠져 닫힌 사람들의 마음만이
이 몸만이 全部인 줄 알고 여러가지 煩惱妄想을 짓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나타난 것이 바로 <지금 여기>의 느낌입니다.
<지금 여기>를 고요히 한 번 觀察해보세요.
<지금 여기> 그 裏面에 바로 끊어진 자리가 떡 벌어지며
그 안에 三世가 한권의 책처럼 들어있으며 多樣한 意識界와 物質界가
온통 <지금 여기> 처럼 다채롭게 한판 잘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다 누구 안에 들어있습니까?
이것이 있어야 저것도 認識되고 意味 지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個體마음인
그대가 全切마음인 이 根本宇宙意識자리
위에 出現한 겁니다.
딱 끊어진 자리는
하나님의 能力인 創造의 자리라서 모든 것을 다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마륵果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能力인 創造의 자리
그 자리가 나타나는 關門이 바로 그대 당신인 겁니다.
그래서 당신 그대가 곧 創造主이며 (이 말이 부담스러우면 손 발이라거나 자녀라도 괜찮다),
그대가 그대 안에서 自身(小我)을 否定하여 죽이고 消滅했다가
오히려 큰 나(大我)로서 復活하여 되살아나는 奧妙한 眞理가
바로 그대의 <내>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 대행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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