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참나는 작용하는 곳에 있다

장백산-1 2014. 8. 26. 16:18

 

 

 

 

 

佛性은 作用하는 곳에 있다 |영원한 나를 찾아서

 

 

 

佛性은  作用하는 곳에 있다

 

 

[본문]

 

이견왕이 바라제 존자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佛)입니까?”

 

존자가 답했다.

“性稟을 보는 것[見性]이 바로 부처입니다.” 

 

“그렇다면 스님은 性稟을 보셨습니까?”

“예, 나는 佛性을 보았습니다.”

 

“佛性은 어디에 있습니까?”

“佛性은  作用하는 곳에 있습니다.”

 

“도대체 이것(佛性)은 어떻게 作用하는 것입니까?

 저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도  作用하고 있는데 왕께서 보지 못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에게도 그러한 佛性의 作用이 있습니까?”

“왕께서 만약 作用한다면 그것(佛性) 아닌 것이 없을 것이나,

 왕께서 作用하지 않는다면 그 本體 조차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것이  作用할 때에는 몇 가지로 나타납니까?”

“그것이  作用하여 나타날 때에는 여덟 가지로 나타나게 됩니다.”

 

“여덟 가지로 나타나는 것을 나에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태(胎)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世上에 머물면 사람이라 하고,

 눈에 있으면 본다고 하고, 귀에 있을 때는 듣는다고 하고,

 코에 있으면 향기를 區別하고, 혀에 있으면 맛을 分別하고 對話를 나누고,

 손에 있으면 사물을 집거나 붙잡고, 발에 있으면 돌아다니거나 달립니다.

 널리 드러내면 恒河沙와 같은 世界에 두루 차지만,

 거두어들이면 티끌 하나 속에 들어갑니다.

 智慧로운 이는 이것이 佛性인 줄 알지만

 모르는 이는 이것을 정혼(精魂)이라고 말합니다.”

 

이견왕은 게송을 듣고 마음이 곧 열려 깨달음을 얻었다.

 

 

[사족]

 

이견왕은 남인도 향지왕의 아들로 월정다라의 장자로서 처음에는 불교를 탄압했지만,

나중에는 달마 스님에게 교화를 받아서 불교를 외호하게 됩니다.

달마 대사가 중국에 오시기 전에 벌써 왕은 깨달음을 이룬 제자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이견왕이 바라제 존자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일반 불자님들께 “부처가 무엇입니까?” 하고 質問을 하면

역사적으로 출현했던 석가모니 부처님을 生覺하실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부처는 이미 形相을 超越한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우리  本來마음을 깨달으면 부처라고 했습니다.

본래마음은 있지만 形相이나 이름을 떠난 자리입니다.

理論的으로 ‘마음이 부처’라는 事實을 理解한다고 해도 우리가 수행을 통해서 체험이 되지 않으면

어려운 부분입니다. 바라제 존자나 달마 스님께서는

宇宙의 根本 實相을 깨달아 一切를 '하나'로 보며 行을 하셨던 분입니다.

 

바라제 존자가 답했습니다.

“性품을 보는 것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性稟은 본래마음[本心]을 말합니다. 본래자리에서 마음을 깨닫게 되는  瞬間, 이 宇宙가 '하나'로 열리게 됩니다.

宇宙의 根本 實相인 '하나의 道理'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나 自身이나 相對를 分別하는  生覺이고,

宇宙의 根本 實相인 '하나의 자리'는 ‘우주마음(性稟)’이라고 해야 됩니다.

하나의 마음자리를 닦고 끊임없는 정진을 통해서 業이 맑아지면

本來性稟을 깨닫게 되는데, 이것을 견성(見性)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스님은 性稟을 보셨습니까?”

“예, 나는 佛性을 보았습니다.”

 

佛성은 모양이 아니니까 事實은 볼 수가 없는데, 대화에서는 조카인 이견왕의

根機에 맞게 바라제 존자께서 佛性을 보았다고 하시는 겁니다.

 

“佛性은 어디에 있습니까?”

 본래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佛性과 마음은 듣는 사람의 立場에서 다르게  生覺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라고 하면 일체가 마음인데, 불성이라는 것도 어디에 있고, 어디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佛性은 作用하는 곳에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의 마음차원이 아닌, 자기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스님들께서 선문답을 하실 때는 宇宙를 하나로 보는 次元에서 선문답이 오고 갑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견왕을 교화하기 위해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 차원에서 불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佛性)은 어떻게 作用하는 것입니까?

 마음의 작용을 묻고 계십니다.

 “저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작용한다고 하지만 마음은 볼 수 없습니다.

 

“지금도 作用하고 있는데 왕께서 보지 못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것도 마음의 作用입니다. 마음이 生覺하는대로

손발도 움직이게 되는데, 이 마음의 작용을 신통(神通)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作用할 때에는 몇 가지로 나타납니까?”

 

“그것이 作用하여 나타날 때에는 여덟 가지로 나타나게 됩니다.”

 

마음이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는 ‘태’라고 하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을 뿐입니다.

‘본다’는 것은 마음이 눈을 통해서 對相을 보는 것이고, 마음이 빠져 나가면 눈이 있어도 볼 수 없습니다.

눈은  機能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있기 때문에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말을 하며, 손과 발을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불자님들이 정진을 통해서 濁한 氣運인 業이 淨化가 된다면

마음은 肉身의 눈이 아니라도 볼 수 있는 能力을 갖추게 됩니다.

 

우리 마음은 宇宙와 같은 큰 마음이기 때문에 제대로 마음을 쓴다면 항하사와 같이 큰 마음이지만,

작다고 하면 겨자씨보다도 작은 마음밖에 쓰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이 위대한 마음임에도 불구하고 物質에 대해서 執着을 한다면

바늘구멍보다도 작은 마음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정진을 통해 一切가 하나라는 思想次元에서 마음을 쓸 때

위대한 마음을 쓸 수 있게 됩니다.

 

바라제 존자가 말합니다.

 

“지혜로운 이는 이것이 佛性인 줄 알지만, 모르는 이는 이것을 精魂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위대한 마음이고, 모든 것이 마음으로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이것을 모르고 마음을 정신이나 혼백이라고 말한답니다.

혼백(魂魄)은 儒敎에서 쓰는 말인데,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육신과 더불어 땅에 묻힌다고 하며 둘로 보았는데, 절대 둘이 아닙니다.

 

이견왕은 바라제 존자의 ‘마음의 작용’에 대한 法門을 듣고는 그 瞬間  눈이 열렸답니다.

 

 

- <자유인의 길 직지심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