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스크랩] 금강경/이치와 같이 사실대로 보다 1

장백산-1 2014. 8. 24. 21:21

 

 

 

如理實見分 第五
                 (이치와 같이 사실대로 보다) 1

 

한윤기 아름다운 땅展- 꿈속에서 

        
                                                  曲 : 프랭크 스타이너 주니어 / Ajala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身相으로 見如來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不可以身相으로 得見如來니
何以故오 如來所設身相은 卽非身相일새니이다

佛告須菩提하사되 凡所有相이 皆是虛妄이니 若見諸相非相이면 卽見如來니라


우리는 스스로 우리를 보고 상대(相對)도 보고 부처님도 봅니다.
또한 나름대로 세상사는 이치도 보고 인생도 보고 진리도 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보고 또 보지만 과연 '진리대로', '진여의 이치대로', 실답게 보고 있는지요.
진실은 진실로 보고 거짓은 거짓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진실을 비롯하여 부처와 모든 형상 있는 것들의 참모습을
지혜의 눈으로 바르게 이해하여야 합니다.
무엇이든 본래의 모습대로 바르게 바라볼 때 문제의 해결은 아주 쉽습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현상을 바라보는 가장 기본적인 시각이며
또한 가장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결코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허무하게 보는 태도가 아닙니다.
깨어있는 눈으로 보는 것이며 이치대로 보는 것입니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可以身相(가이신상)으로 見如來不(견여래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不可以身相(불가이신상)으로 得見如來(득견여래)니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의 형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모양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부처를 때로는 여래(如來)라고 합니다.
'진리(여:如)에서 오신(래:來)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그 자체', '우주와 삼라만상의 진실 생명 그 자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의미의 여래를 몸의 모양으로 볼 수 있겠는가 라고 묻는 것입니다.

사실 부처님 생존 당시 살아계신 부처님을 보고
'저 분은 부처가 아니야.'라고 생각하였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었겠습니까.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서 숨을 쉬고 피가 흐르며
더욱이 거룩한 32상 80종호(三十二相 八十種好)를 지니신 부처님을 보고
"부처로 여기지 말아라." 하면 쉽게 납득이 되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도 수보리는 부처님의 진실한 뜻을 얼른 알아차리고
몸의 모양으로 여래를 볼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의 육신이나 우리들 육체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진실하다면 언제 어디서나 늘 같아야만 할 것인데
시시각각 명멸해갈 뿐입니다.
부처님도 굶으면 뼈만 남기도 하고, 때로는 등창이 나기도 하였습니다.
결코 금강불괴신(金剛不壞身)이 아닌 것입니다.
그야말로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그러하니 어찌 허망하게 명멸해가는 부처님의 몸의 형상이나
우리들이 신상(身相)을 보고 여래(如來)라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도 당시 제자들에게
"육신을 보고 부처라 여기지 말라."는 가르침을 수없이 퍼셨습니다.
아함부의 『바카리 비구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카리'라는 비구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바카리 비구는 사람을 보내 부처님을 청하였습니다.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부처님께서는 이곳에 오셔서
저의 마지막 예배를 받아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오셔서 병자인 바카리 비구를 위로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카리 비구가 몸을 일으켜 세워 예배를 드리려 하였습니다.
그 순간 지금까지 인자하게 바카리 비구를 위로하던 부처님께서는 냉정하게 꾸짖었습니다.
"너의 병들어 썩어가고 있는 몸뚱이를 일으켜 세워서
너와 별다를 바 없이 늙어 무너져 내리는 나의 이 몸뚱이에 예배를 드린다고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여래라는 존재를 그 동안 이 육신이라고 여겼더냐.
그러고도 나의 제자라고 하겠느냐."
부처님은 이어서 그 유명한 법구(法句)를 남깁니다.
"법(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法)을 본다."

이처럼 여래를 보는 참된 지혜가 있어야
자신의 진실한 얼굴을 보게 되고 만물(萬物)의 실상도 바로 보게 됩니다.
경전에서는 언제나 부처님을 일컬어 말하고 있으나
사실상 내용에 있어서는 사람 사람들의 참모습을 깨우치고자 하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자신을 사회적인 신분으로 한정하고,
교육이나 생활의 정도를 가지고 규정(規定)해 버립니다.
아니면 남녀, 노소를 가지고 한정해버리고 맙니다.
이와 같은 외적 조건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까지도
참 인간성, 진실한 생명체, 본래 면목의 실상이라고 한정해 버리고
가지고 있는 보물을 조금도 활용하지 못하고 넣어두고 썩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비유컨대 순금덩어리를 잘못 알고 쓸모없는 돌이나 흙덩이로 취급한다면
그 손실은 너무나도 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래를 사실대로 바르게 알라,
자기 자신을 본래의 모습대로 바르게 보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쫓아서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부처님을 왜곡되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何以故(하이고)오 如來所說身相(여래소설신상)은 卽非身相(즉비신상)이니이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모양은 곧 몸의 모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몸의 모양을 물은 것은
진리의 몸인 여래의 참모습을 밝히고자 한 것입니다.
그 뜻을 잘 간파한 수보리는 몸의 모양으로 여래라고 할 수가 없다는 대답뿐만 아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몸'이라는 말의 진실까지도 밝히고 있습니다.
즉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몸은
참다운 진리의 몸, 마음의 몸, 영원한 법신(法身)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법신(法身)은 형상이 아니므로 형상에 떨어진다면 여래의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 사람들의 참다운 인간성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모양이 없는 것, 무상(無相)이 곧 절대적인 존재이고 여래이며
참생명의 실상이며 우리들의 참마음자리이다 하는 관념도 떠나보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형상이 아닌 것 여래, 참마음, 법신은
실은 형상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형상이야말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영원한 생명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영가(永嘉 665-713)대사는 육조 혜능(六祖 慧能)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뒤
조계산(曹溪山)을 내려오면서 그 유명한 '증도가(證道歌)'를 불렀습니다.
증도가란 영가 스님이 깨달으신 내용을 읊은 것으로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무명실성즉불성 환화공신즉법신)

우리가 혐오하고 떠나 버려야 한다고 여기는 번뇌 무명의 성품이
곧 우리가 찾고자 하는 부처의 성품이며,
헛것이고 환상이어서 허망하다고 생각한 이 내 몸이 바로 법신이구나.’

 

 


 

출처 : 무진장 - 행운의 집
글쓴이 : 해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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