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흉내라도 내어라
輪廻하는 우리의 生覺,
輪廻하는 우리의 알음알이(意識/마음)으로는
眞理의 바다에 이르지 못합니다.
理論만 가지고는 眞理의 바다에 이를 수 없으므로
좀 힘이 들더라도 부지런히 노력을 하여 佛敎의 修行을 해야만 합니다.
念佛을 하든, 呪力을 하든, 祈禱를 하든, 마음이 안 흔들리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어디에도 拘束을 받지 않고 自由롭게
됩니다.
結局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마음, 흔들리는 마음을 단속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수행법 중 자신에게 맞는 한 가지를 擇하여 죽으나 사나 무섭게 마음을 몰아부쳐서
곁에서 폭탄이 터져도 까딱도 하지 않을만큼 不動心이 유지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모양을 가지고 모양을 구하면 全切가 다 헛것이라고 했습니다.(凡所有相 皆是虛妄)
結局
'나'라고 하는 生覺(我相)을 갖고 부처님을 자꾸 추측을 하고 더듬어 가려고하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모양을 만들어서 모양 없는 것을 추구하다보니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 수 없으니까 일부러 生覺을
흔들어서
觀世音菩薩이나 地藏菩薩 名號를 念佛하거나 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억지로라도 하다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고통스러움을 벗어나
自然스럽게 되고 習慣化되어 갑니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不動心)에 점점 익숙해져 갑니다.
몇 시간을 서서 목탁을 치거나, 소리를 내어 염불을 하거나, 앉아서 화두를 들어도, 피로하거나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便安해지면서 計劃的으로 다듬고 만들어가던 生覺이 조금씩 주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고비를 넘어서게 될 때 佛敎에서 말하는 三昧나 禪定에 들게 됩니다.
이
狀態는 意識 속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意識이 홀연히 툭 떨어지면서
第3의 世界가 體驗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祈禱를 할 때 祈禱의
靈驗을 바라고 이루고자 하는 慾心을 간절하게 내어,
'꼭 이루어지소서.
꼭 이루어지소서'하는 意識 狀態로는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 고비를 넘어서버려야 합니다. 한 고비를 넘어서야 祈禱의 영험이라고 하는 것이
내가 生覺지도 못하였던 쪽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내 속에 求하는 마음이 잔뜩 뭉쳐진 意識 狀態에서는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가끔 마음工夫를 지어나가는 것을 옛날 시골場에 돼지를 팔러 가는 비유를 들어 이야기합니다.
요새는 교통수단이 좋아서 아무리 덩치가 큰 소나 돼지들도 트럭에 실어 가면 됩니다만,
1970년 이전만 하여도 형편이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연히, 시골 사람들이 큰 돼지를 장에 팔러 나갈 때는
지게에 지고 갈 수도 없고 하여 회초리 하나를 들고 돼지를 몰면서 갔습니다.
이 돼지가 논이나 밭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회초리로 톡톡 쳐서 그리 못 가게 하고 또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만큼 길 가운데 쪽으로 가려고 하면 회초리로 톡톡 쳐서 길 가 쪽으로 몰고 가고...
회초리로 요리 조리 몰아 10리 20리
밖의 장터까지 몰고 갔습니다.
내가 불교공부를 해본 결과, 그 공부의 방법이 회초리로 톡톡 쳐가면서
돼지(마음)를 먼 장터까지 몰고 가는 것과 똑 같은 式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화두공부를 하든 염불공부를 하든, 잔뜩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 답답하니까
어른들의 말씀을 따라 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해라"고 하신 말씀에 執着이 생겨 버립니다.
또한 공부하는 방법이 잘못 되었다고 꾸지람을 들으면서 "그렇게 하지 말아라, 공부 방법을 조금 바꾸어
이렇게 해라" 하는 그 말씀에 또 執着이 생겨버립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애를 쓰다가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時間과 空間이 떨어져버리고 意識이 떨어져 나가는 第3의 世界가 體驗이 됩니다.
이 體驗에 이르기까지는 우리 人間이 만든 時間으로,
'언제쯤 그렇게 될 수 있다'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目的地인 場터까지 회초리로 돼지(마음)를 톡톡 치면서
끝까지 몰고 가는 수밖에는 딴 방법이 없습니다. 또한 여러 차례 이야기를 드렸지만,
불교工夫는 잃어버린 비단을 찾기 위해 돌장승을 곤장으로 치는 것과 같습니다.
따뜻한 봄날, 고갯마루에서 낮잠을 자다가 비단짐을 잃어버린 등짐장수는
원님에게 달려가 비단짐을 찾아 줄 것을 하소연하였고 賢明한 원님은 妙案을 짜내었습니다.
원님은 등짐장수가 낮잠을 자던 자리에 서 있었던 돌장승을 '도둑을 본 목격자'라 하면서 잡아들인 다음,
훔쳐간 놈이 누구인지를 이실직고 하라고 다그치며 곤장을 쳤습니다.
모여든 사람들은 원님의 行動을 어처구니 없어하며 비웃었고
원님은 이들에게 법정모독죄를 뒤집어 씌워 獄에 가두도록 명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가족에게 '放免을
바라거든 비단 한 필씩을 가져오도록' 하였습니다.
마침내 家族들이
가져온 비단 속에는 등짐장수가 잃어버린 비단이 여러 필 들어있었고,
원님은 그 비단을 購入한 經路를 逆으로 추적하여 진짜 도둑을 잡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生覺해도 돌장승을 잡아들여 매를 치며 재판을 하는 것은
미친 짓거리입니다.
그러나 이 미친 짓거리로 보이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추리를 하고
추리를 하여 결국은 비단 도둑을 잡아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공부는 화두를 들든 염불을 하든 주력을
하든,
비단을 찾기 위해 돌장승을 두드리는 것과 똑 같은 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동떨어진 짓이요 딴 짓입니다.
아무런 聯關도 없고 뜻도 없는 영 엉뚱한 짓이고,
아무 것도 안 될 듯한 짓이다 이겁니다. 그러나 이 엉뚱한 짓이 時間, 空間을 超越한 第3의 世界를
體驗하게 하는 唯一한 方法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렇게 해야 합니다.
모양을 가지고 모양을 찾아가는 것은 전부 헛짓입니다.
우리가 '내 마음, 내 마음' 이라고 자주 말하지만 實際의 '내 마음'은 모르고 있습니다.
'眞心, 眞心'하면서 한평생을 살아도, 혓바닥으로 '良心, 良心'소리를 수만 번 하면서도,
내 良心, 내 眞心은 도무지 體驗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럼 언제 잠깐이라도 良心 眞心을 체험할 수 있는가?
法會시 큰스님께서 갑자기 '악'하고 할(喝)을 하면,
그 '악'하는 고함 소리를 들으며 깜짝 놀라는 그 瞬間에는 아무런 妄想도 없습니다.
바로 그때가 내 眞心을 體驗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受戒를 받기 위해 연비를 할 때 '앗! 뜨거워'하는 그 生覺뿐이지,
앞 生覺도 뒤 生覺도 없게 되는 그때 잠시나마 내 眞心을 體驗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外에는 百年을 산다고 해도 大部分이 妄想 속이고 꾸밈 속이고 거짓 속일뿐,
眞心을 도무지 體驗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觀世音菩薩'을 念佛하든 話頭를 들든 절을 몇 천배를
하든, 전부가 거짓이고 꾸밈 속에 사는 것이지
우리의 眞心 한 번도 體驗을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 어떤 고비를
넘어가면서 第3의 世界를 體驗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할 수 없이 좋든 나쁘든 자꾸
흉내라도 내면서 가야 합니다. 그렇게 꾸준히 공부를 지어나가다보면 언젠가는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業을 짓고 果報 業報를 받으면서도 工夫하는 努力이 차곡차곡 쌓여
奇蹟이라는 것을 體驗할 수 있게 됩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나에게 1년에 한두 차례씩 꼭 찾아오는 어느 비구니스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비구니는 17세에 일엽스님의 [청춘을 불사르고]를 읽고 환희심을 일으켜
決心 했습니다.
'나는 일엽스님과 같은 길을 가겠다. 出家하여 大解脫을 누리리라.'
그러나 20歲가 가까워지자 아버지와 계모는 맞선을 보아 結婚할 것을 재촉했습니다.
한번도 아버지의 말씀을 거스르거나 말대꾸를 하지 않고 산
그녀였지만
이미 뚜렷한 決心이 서있었기에 이 말씀만은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나는 비구니가 되고 싶습니다.
17세 때부터 이 결심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저를 절로
보내주세요."
아버지의 許諾 없이 승려가 된다는 것은 생각도 해 보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어떻게 하든지 아버지를
설득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막무가내였고 부녀 간의 골은 더욱 깊어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방에서 아버지의 호통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빨리 부엌에 있는 식칼을 가져오너라.!" '아버지가
왜 저러실까?' 하며
그녀가 식칼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자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네 년이 말을 안들으니까 할 수 없다.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이고 나도 죽겠다!"
아버지는 그녀의 멱살을 잡고 목에 칼을 들이대었으며 瞬間 그녀의 머리에는
번개불처럼 한 生覺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아버지 말대로 결혼 흉내라도 내자. 그래야 아버지 곁을 벗어날 수 있다.'
그녀은 외쳤습니다. "아버지, 딸은 出家外人이지요?" "'그래, 출가외인이다."
"내가 시집가면 아버지가 내 일에 간섭 안
하지요?"
"그래, 안 한다." "그렇다면 시집
가겠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결혼을 하였고 3개월만에 집을 뛰쳐
나와 출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체 연락을 하지않다가 7년 만에 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아버지는 화병으로 누워계셨고 계모는 무슨 병 때문인지 자꾸 하혈을 하여 곧 죽을 형국이었습니다.
아버지를 간병해야 할 계모가 먼저 죽게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병명은 말하지 않고 '이상하다'며
7일 뒤에 수술을 해 보자고 하였습니다. 이에 비구니스님은 가족들에게 당부했습니다.
"내가 오늘부터 7일동안 기도를 하고 오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절대로 수술을 하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그리고는 法堂이 寶物로 指定되어 있는 어느 절을 찾아갔는데
法堂 안에는 두 채의 빨간 좌복을 깔고 앉아계신 불상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비구니스님은 밤낮 없이 목탁을 치며 지독하게 정근을 했습니다.
피곤도 잊고 잠 자는 것도 잊고 열심히 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여 마지막 날 새벽 2시 경이 되었을
때 비구니스님은 잠깐 목탁채를 놓고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와보니 부처님 밑에 받쳐 놓았던 빨간색 좌복이 뽀얗게 變해 있는 것이
었습니다.
'이상하다? 저 붉은색 좌복이 어찌 희게
보일까?' 가까이 다가가 만져 보았더니 이미 타버린 좌복은
소로록
내려앉았고, 불상도 화끈거려 손을 댈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황급히 그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고 있던 두 청년을 깨워 불상을
옮겼는데
놀랍게도 타들어가던 불탁자도 손상됨이 없었고 불상의 개금도 변질된
곳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날이 밝자 스님은 回向을 한 다음 계모를 찾아갔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계모의 병은 기적처럼 나아 있었습니다. 그 뒤 계모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시중을 들었고
지금도 스님이 있는 토굴을 1년에 한 두 차례씩 다녀 가신다고
합니다.
알 수 없는 계모의 病, 그리고 스님의 祈禱와 계모의 病 完治!
붉은 좌복이 뽀얗게 타버린 것과 겉잡을 수 없는 下血이 멈춘 것이
어떠한 聯關이 있는지는
뚜렷이 알 수 없으나, 이것이 眞心의 힘이요
眞心의 奇蹟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眞心을 體驗하지는 못하였어도 거짓이든 꾸밈이든 억지로든
觀世音菩薩을 부르거나 地藏菩薩을 부르거나 呪力을 하는 등 어떤 祈禱라도 있는 힘을 다해 몰아치면
비록 눈앞의 慾心이라 할지라도 그 所望이 이루어지는 靈驗이나 奇蹟을 體驗하게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약삭빠르게 꾀만 피우면서 열매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뿐 實際 祈禱는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열매는 언제쯤 되면 떨어지려는가? 이만큼 하면 되지 않을까?' 하면서 따지고만 있지 實際 祈禱는
안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자취나 흔적을 남기는 유위심(有爲心)으로
모양을 가지고 모양을 찾아가지만, 끝까지 그렇게 몰아 붙이고 나면
우리의 눈앞에 분명히 이루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좀 힘이 들더라도 부지런히 하셔야 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달라져야 합니다. 自己中心的인 生覺에서 벗어나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고마움을 알아야 하고 그분들에게 '고맙습니다' 하는 마음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언제나 '가족이 고맙고, 주위분들이 고맙고, 大宇宙가 고맙다'는 마음이 가득차서,
푸근한 고마워하는 마음 속에 잠길 때가 되면 내 곁의 모든 모순은 저절로 없어집니다.
反對로 내 가슴 속에 不滿心이 가득하고 무언가를 구하는 마음이 샘솟고 욕심이 있는 동안에는
절대 내 곁이 편안하지 못하고 내가 구하는 것이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立春이 지났지만, 옛 어른들은 立春이 다가오면 보리 뿌리 한 가닥을 캐어
작은 쟁반에 올려놓고 立春 時間을 재었습니다. 그런데 立春 時刻이 되면 틀림없이
보리 뿌리의 새 촉이 탁 틉니다. 이렇듯
大宇宙는 참으로 奇妙합니다.
冬至에는 갈대를 태운 재를 상자에 담아
방안에 놓아 두는데 정확하게도
동지 시각이 되면 갈대를 태운 재가 날립니다. 이 날리리는 재가 바로
大宇宙의 廻轉으로 새해의 氣運이 열리는
첫 시각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大宇宙의 變化에 맞추어 우리 주변에도 變化의 바람이 일어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 집안에 웃음꽃이 피고 복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럼 과연
어떻게 變化해야 되는가?
무엇보다도 가족에 대한 내 마음/생각이 달라져야 되고, 말이 달라져야 되고 行動이 달라져야 됩니다.
지금과 같은 용심(用心)이나
말이나 행동으로는 變化가 안 됩니다.
힘이 들더라도 '나'부터 생각/마음, 말, 행동이 바뀌어야 합니다.
부디 銘心하십시오. 내가
달라지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내가 흔들지 말고 그대로 밀고 나아가면
됩니다.
내 生覺/마음, 말, 行動이라는 業 때문에 내 家族이 힘들고 내 業 때문에 내 家族이
애를 먹는다는 事實을
잊지 말고, 언제나 새로운 氣運을 불러일으켜 흔들리는 내 마음을 잘 단속하며 자꾸 흉내라도 내어
부지런히 마음공부를 지어가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리고 축원드립니다.
- 우룡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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