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마음의 고향, 진여불성 자리

장백산-1 2014. 10. 11. 00:53

제1부 마음의 고향

    2. 마음이 편안해야지요

- 행복을 누리시기를-

우리는 根本的으로 生覺해야 됩니다. 왜 우리가 아까운 生命을 낭비해야 합니까?
우리가 할 일은 根本으로 가는 것이며, 그 外에는 모두가 다 헛짓입니다.

석가모니가 못나서 집을 나갔겠습니까?  그렇게 잘난 분이 집을 나오고
財産과 地位를 包含한 모든 것을 뿌리쳐 버렸단 말입니다.
석가모니는 自身이 王이 되고자 했으면 충분히 될 수 있었던 분입니다.
그러나 自己 生命을 낭비할 必要가 없었던 것입니다.
석가모니가 무슨 必要로 出家를 했겠습니까?
오직 한 길, 바르게 사는 길을 찾으려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다만 世俗에서 그런대로 닦을 것인가, 出家해서 온 힘을 다해 100퍼센트 修行할 것인가 하는
그 差異뿐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幸福을 추구합니다.
人間 存在 그 構造 自體가 幸福을 추구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왜인가 하면 人間 存在는 原來 이미 모든 幸福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人間에게 內在되어 있는 眞如佛性의 자리는 慈悲도 智慧도 혹은 能力도 幸福도
本來로 이미 다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人間 本性은 本來부터 이미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本來부터 이미 모든 것을 完全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자리에 가야만 비로소 안심입명(安心立命)합니다.
慈悲도 智慧도 幸福도 能力도 다 갖추고 있는 그 本性의 자리에 가기 前까지는
어떤 것도 우리한테 滿足을 못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幸福이라는 그 파랑새를 찾기 위해 山으로 들로 그토록 헤매었지만
안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보니까
집 안의 새장 속에 그 예쁜 파랑새가 있단 말입니다.



幸福은 다른 데 있는 것이 絶對로 아닙니다. 어느 누구나 自己에게 本來 이미 갖추어져 있습니다.
自己 自身의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物質이 아닌 마음,
그 마음이 바로 幸福을 本來로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아끼는 몸뚱이가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過去 生에 우리 마음 씀씀이에 따라서 父母와의 因緣 따라서
今生에 이런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몸을 얼마나 쓸 수 있습니까?
저 같은 사람이야 이제 十餘 年도 못 쓰면 흔적도 없어져 버리겠지요.
젊은 사람들의 몸이라 하더라도 더러는 비명횡사(非命橫死)에 간다고 생각하면
몇 년도 못 쓰고 가게 되고,  또 수(壽)를 다 누리고 간다고 해도
고작 몇 十 年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발 生覺을 바로 해야만 합니다.
어차피 없어질 이 몸뚱이에는 幸福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게 꾸며 놓아도 結局은 땀 한 번 흘러버리면 냄새가 나는 게 바로 그 몸입니다.

 

眞如佛性, 人間 本性 자리에 이르는 것만이 사람으로 태어난 根本 目的입니다.
孔子도 소크라테스도 모두 다 그 길로 갔던 것입니다.
니체나 칸트나 쇼펜하우어나 모두가 그 길로 갔단 말입니다.
다만 角度에 따라서 조금 差異가 있게 表現했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그 길을 指向했습니다.
自本主義나 무슨 主義나 모두가 그 길로 가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다만 바른 道理를 모르기 때문에 자꾸만 이렇게 저렇게 한 것이지
人間 自體가 本來 부처이기 때문에
'모두가 完全해야겠다'

'모두가 平等해야겠다'
'모두가 自由로워야겠다'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眞如佛性 자리, 人間 本性 자리로 가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내 마음도 虛妄하고,
내 앞에 선 對相도 虛妄하고,
모두가 다 虛妄하고 無常한 것입니다.
모두가 다 虛妄하고 無常하기 때문에《金剛經》에서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말하였으며,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라 말한 것입니다. 
卽, 모두가 다  꿈이요, 허깨비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풀끝에 이슬이요 또한 번갯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지랑이를 求해서는 안 됩니다.
저 멀리 아지랑이가 그렇게 좋게 보이고, 꿈같은 신기루가 좋게 보인다 하더라도,
고생고생해서 달려가 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하는

大統領 자리나 또는 富者나 모두가 다 求해 놓고 보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儉素하게 살아야 됩니다. 儉素하게 살면 그만큼 罪를 덜 짓고 빚을 덜 집니다.



몸뚱이 하나 잘 먹이고 잘 입히기 위해서 사치하고 過消費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만큼 더 많은 罪를 짓고 빚을 많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世上 모든 것이 因果이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因果를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몸뚱이 하나 保存하기 위해서 너무나 過多한 物質을 消耗한다고 生覺할 때에는
꼭 그에 따르는 補償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몸뚱이로 今生에 와서 먹고 입지만,
우리가 부처님 길, 眞如佛性의 길을 가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것이 必要치 않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모조리 포위됐을 때,
잔 다르크는 16세의 어린 소녀로 先頭에 서서 그 포위망을 뚫고 오를레앙 城을 奪還했습니다.
그런 힘이 잔 다르크한테만 있는 힘이 아니라 人間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석가모니에게 있는 힘, 예수에게 있는 힘 그 힘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있습니다.
다만 어둠에 가려서 그 힘을 제대로 發輝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自己 스스로의 本質을 分明히 알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힘이 있는데 하물며 대학입시 하나 合格하지 못 하겠습니까?
그 程度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 힘,人間 本性의 힘은  無限大의 힘입니다.
다만 우리는 無限大의 힘을 자아내서 쓰지 못하고, 자꾸만 이것을 生覺하고 저것을 生覺합니다.



입시 준비하는 수험생이든 누구든 우선 마음을 가라앉혀서 맑게 해야 됩니다.
自己가 좋아하는 것도 텅~텅 비어서 자취가 없고, 自己 집안 식구 가운데 동생이 밉다고 하는 것도
텅~텅 비어서 자취가 없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아무것도 흔적이 없는 것입니다.
自己 어머님 아버님이 섭섭하게 해도 그 섭섭한 것도 텅~텅 비어서 흔적이 없고 말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 다 모두가 텅~텅 비어서 虛妄한 것이니까
生覺 自體를 그렇게 바꾸고, 오직 부처님만 眞如佛性만 生覺하면서 工夫한다면,
記憶力이라든지 그런 모든 것이 다 完璧하게 됩니다.
따라서 入試든 다른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습니다.
天才的인 能力, 無限大의 能力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다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우리 學生들이 工夫할 때 머리가 아프거나 한 것은 머리에 必要 없는 知識들이 많이 차 있기 때문입니다.
다 버려야 합니다. 모두가 다 原來 텅~텅 비어서 虛妄한 것인데,

우리가 괜히 그런 것들을 머리에 꽉채워 놓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텅~텅 비어서 자취 없는 것이고, 事實은 꿈이나 그림자일 뿐인데,
꿈의 자취가 어디에 있다고 머리 속에 꽉채워 놓습니까?



우리 凡夫衆生은 자꾸만 必要없는 生覺을 떠올립니다.
그러므로 이러저러한 필요없는 生覺을 내려놓기 위해서
念佛도 하고 話頭도 드는 겁니다.
"염도념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하니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라."
生覺生覺을 하다 보면 結局은 그야말로 無念處인 無念智에 이르게 되고,
無念處에 이르면 六門, 卽 自己 눈, 귀, 코, 입, 몸, 마음 全切에서
그야말로 훤히 廣闊하게 확 트여 있는, 빛나는 宇宙와 둘이 아닌

자마금색(紫磨金色), 五色燦爛한 光明이 恒時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 한 길,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참다운 般若의 智慧를 떠나서는
도저히 우리에게 幸福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꼭 幸福해야 합니다.
또 幸福은 本來부터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大無量의 寶杯가 原來 갖추어져 있습니다.
대무량의 보배란 物質的인, 卽 世間的인 보배가 아닙니다.
物質은 本來 텅~텅 비어서  자취가 없는 것이라서 因緣이 다하면 흩어지고 맙니다.
참다운 보배인 우리 眞如佛性 보배만이 永生不滅하는 大無量 보배라 할 수 있습니다.



自己가 念誦하는 '地藏菩薩!'이나 '觀世音菩薩!'이나 또는 '南無阿彌陀佛!' 혹은 話頭를 잡으셔서,
앞서 제가 말씀드린대로 마음이 하나로 딱 모아지는 일념무심(一念無心) 工夫를 해야 합니다.
一念無心은 宇宙를 움직입니다.
그와 같이 一念無心으로 工夫를 해야만 眞如佛性인 宇宙의 根本核心을 움직이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의 一念無心이 眞如佛性까지 움직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꼭 그와 같이 하셔서
마음이 便安해지고 다시없는, 위없는 幸福을 누리시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불기 2535년 6월, 태안사 정기법회>

 
출처 : 본정 김영동 법사,


가져온 곳 : 
카페 >무진장 - 행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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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해솔|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