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미 도달해 있다 ㅡ 신심명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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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樂與餌, 過客止.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악여이, 과객지. 도지출구, 담호기무미.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可旣. 시지부족견, 청지부족문, 용지불가기.
아름다운 음악과 맛있는 음식은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만, 道는 밋밋하여 아무런 맛이 없다. 보아도 족히 볼 만한 것이 없고, 들어도 족히 들을 만한 것이 없으나,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다. 저도 깨달음을 추구하며 영혼의 자유를 찾아 세상을 돌아다닐 때에는 도(道)를 무슨 도깨비 방망이쯤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것을 얻기만 하면 대번에 모든 것이 달라지면서, 인생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끝나고 영원한 자유를 얻게 됨과 동시에 모든 사람의 우러름을 받고……나는 그들 앞에 보란 듯이 나타나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그런데 그 마음은 진리와 진실을 추구하는 마음이 아니라 사실은 일종의 ‘權力欲’일 뿐이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따뜻한 환경 속에서 보살핌과 사랑을 받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오래 상처 받고 주눅 든 한 영혼이 자존감을 완전히 상실한 채 스스로를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존재로 여기며 살아오다가, 그 무거움과 한없는 영혼의 구속감을 견디지 못해 하며 어떻게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단 한 순간만이라도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고 싶었는데, 그 목마름이 自然스럽게 道나 깨달음이라는 ‘解放區’로 자신의 발걸음을 이끌어갔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마침내 道를 깨닫기만 하면 힘들었던 그동안의 모든 삶을 한꺼번에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를 알고 보니, 도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위대한 것도 아니고 큰 것도 아니며 눈여겨 볼만한 무엇도 아니었습니다.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자는 알리라.”라는 임제 선사의 말씀처럼, 도란 그냥 이대로, 이 일상 그대로,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심지어 꿈 속에서까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감정, 느낌, 생각 이대로가 도 아님이 없었습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켜고, 시계를 보고,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도록 하품을 하고, 화장실을 가고, 간밤에 모기에게 물린 것 때문에 약간 짜증을 내며 등을 긁고, 아침밥을 먹고, 기분 좋게 모닝커피를 한 잔 마시고, 길을 걷고, 잡생각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면 어색하거나 불편해 하기도 하고, 때로 우울하고 불안하며 슬퍼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몹시 사랑하거나 미워하기도 하고, 남모르는 강박에 시달리며 쩔쩔 매기도 하고, 가끔씩 악몽에 시달리기도 하고, 15호 태풍 콩레이가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고, 어둠이 내리고……이 모두가 도 아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노자도 “도는 밋밋하여 아무런 맛이 없다. 보아도 족히 볼 만한 것이 없고, 들어도 족히 들을 만한 것이 없다.”라고 했던 것이지요. 그냥 이 삶,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지금’이 곧 도이니까요. 깨달아야 할 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들끓는 번뇌 그대로가 보리(菩提)요, 중생 이대로가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도 본래 없습니다. 그냥 이대로일 뿐인 것을요. 우리는 지금 이대로 이미 깨달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며 그냥 살면 되어요. 이것이 바로 존재의 진실한 모습 즉 실상(實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살지도 않아요. 도무지 이런 말들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게 도냐고, 이렇게 초라하고 볼품없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투성이인 자신이 어떻게 부처일 수 있느냐고, 남들을 의식하며 쩔쩔 매고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허둥대는 이 모습이 너무 못나 보여서 그저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한데, 어떻게 이것이 자유일 수 있으며 깨달음일 수 있느냐고……. 그러면서 스스로 ‘그 자리’를 황급히 떠나버리지요. 조금 전까지 딛고 서 있던 그 진리의 자리를 말입니다. 한 순간만이라도 그 발걸음을 멈추어 보십시오. 진리는 진리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며, 자유는 자유의 모양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으며 다만 받아들여 그 속에 있어 보십시오. 지금이 아닌 다른 어떤 순간 속에서 자유를 찾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하지 말고, 그렇게 늘 피하고 달아나고 도망 다니지만 말고, 다만 지금 여기에 존재해 보십시오. 그 초라함 속에, 그 못남 속에, 그 강박 속에, 그 부족 속에, 그 허둥댐 속에, 그 번뇌 속에 말입니다. 그러면 오래지 않아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구속되어 있지 않으며, 내가 곧 자유라는 것을. 자유를 찾는 그 마음 때문에 도리어 한없이 구속되었고, 평화를 구하는 그 마음으로 인해 오히려 무한히 힘들었다는 것을. 내가 그토록 애타게 찾아 다녔던 모든 것은 본래 내 안에 있었고, 단 한 순간도 나를 떠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승찬 스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 小見狐疑 轉急轉遲 소견호의 전급전지 좁은 견해로 여우같이 의심하면 서둘수록 더욱 늦어진다. 좁은 견해란 모양과 모습으로써 분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유부단하고 쩔쩔 매고 어쩔 줄 몰라 하고 무기력하고 강박에 시달리는 것은 못난 것이고 초라한 것이고 부족한 것이어서 그 속에는 한 톨의 진정한 자유도 평화도 있을 수가 없는 반면에, 분명하고 당당하고 누구를 만나더라도 편안한 모습은 바람직하고 본받을 만하며 완전한 것이어서 오직 그 속에서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둘러 ‘지금’을 떠나고 ‘있는 그대로’를 버리지요.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가 찾고 구하는 것과는 더욱 더 멀어질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토록 외면하는 지금 이것이 바로 우리가 찾고 구하는 ‘그것’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떠나려고 하는 이 자리가 바로 우리가 도달하려는 ‘그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도달해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우리가 어떤 모습이나 상태로 변화하거나 어떤 영적인 자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렇게 분별하는 우리 마음 하나가 사라지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디를 가거나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다만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십시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시점은 바로 ‘지금’입니다. 33. 執之失度 必入邪路 집지실도 필입사로 집착하면 법도(法度)를 잃고서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간다. 삿된 길이 삿된 길의 모양을 하고 있다면 누가 그 길로 가겠습니까. 삿된 길은 삿된 모양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눈에는 그 길이 ‘바른 길’로만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서둘러 그 길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삿된 길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지금’을 떠나는 것입니다. 중생을 버리고 부처가 되려고 하고, 번뇌를 떠나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며,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는 모든 몸짓들이 바로 ‘삿된 길’입니다. 그것은 마치 진리를 버리고 진리를 구하며 자유를 떠나 자유를 찾는 것과 같은 것이니, 삿된 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왜 그렇게 헛된 노력과 애씀들을 그만두지 못하느냐 하면, 바로 집착 때문입니다. 어떤 것은 붙잡고서 놓지 않으려고 하고 어떤 것은 멀리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바로 집착인데, 그런 몸부림을 통하여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34. 放之自然 體無去住 방지자연 체무거주 놓아버리면 본래 그러하니, 본바탕에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다. 영혼의 자유는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 이 칼럼을 쓰느라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서 다시 책상 앞에 앉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놓아버리면 본래 그러할 뿐입니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이것이 바로 자유인데, 우리는 지금 이대로 이미 자유한데, 다시 무엇을 더하겠다는 말입니까. 오히려 더럽힐 뿐입니다. 35. 任性合道 逍遙絶惱 임성합도 소요절뇌 本性에 合하면 道에 合하니, 한가하고 번뇌가 끊어진다. ‘본성에 합한다’는 말은 곧 每 瞬間 있는 그대로 存在한다는 말입니다. 합해야 할 ‘본성’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울할 땐 우울과 하나가 되고, 불안할 땐 그냥 불안과 하나 될 뿐 그 느낌 감정에 抵抗하거나 拒否하지 않으며, 강박이 올 땐 강박과 하나가 되고, 무너질 땐 무너지고, 쩔쩔 매며 어쩔 줄 모르게 되는 瞬間이 오면 오히려 그 속에 깊이 있어 보는 것이지요. 진실로 그렇게 해보면 그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이완이, 평화가, 쉼이, 저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기쁨 같은 것이, 이제 문제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가 우리의 영혼을 가득히 적셔올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지요. 사실은 본래부터 이루어져 있었으니까요. 36. 繫念乖眞 昏沈不好 계념괴진 혼침불호 생각에 매달리면 참됨과 어긋나 어두움에 빠져 좋지 않다. 생각/마음/의식은 곧 분별심입니다. 우리는 그 생각과 분별을 따라 무언가를 이루거나 어디에 도달하려고 하지만, 사실은 바로 그것 때문에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實相을 놓치고 있는 꼴이랍니다. 37. 不好勞神 何用疏親 불호노신 하용소친 정신을 피로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찌 멀리하거나 가까이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지요? 달리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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