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현존(現存)의 힘 ㅡ 신심명 16

장백산-1 2014. 10. 27. 22:24

 

 

 

 

 

현존(現存)의 힘 ㅡ 신심명 16           

 

 

 

글쓴이 김기태 

 

 

 

얼마 전에 아이들과 함께 ‘겨울 왕국’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영화관엘 찾았기에 참 기분이 좋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다지 가슴에 와닿지가 않았습니다. ‘Let it go'라는 노래가 참 좋았고, 숲 속의 장면 장면들이 정말 실물처럼 잘 그렸다는 생각은 했지만, 영화 안에 담긴 메시지는 뚜렷하게 다가오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이런저런 影畵의 場面들이 다시 떠오르는데, 特히 영화 속 언니인 엘사의 靈魂의 傷處와, 그 상처로 인해 스스로 얼음 城을 만들어 그 안에 갇혔던 일, 그리고 그 상처와 외로움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되는 過程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면서, 한 번 더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影畵를 감상합니다. 스크린에 온갖 影像과 場面들이 비치면 우리는 그것을 보며 때론 웃으면서 행복해하기도 하고, 때론 슬픔에 젖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또 때로는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벌벌 떨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 다시 불이 들어오고, 사람들이 各者의 상기된 표정으로 한마디씩 하며 영화관을 빠져나가고 나면, 스크린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처음의 말간 표정 그대로 舞臺 위에 하얗게 펼쳐져 있습니다. 스크린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事實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또 우리가 웃고 울고 소리 질렀던 그 모든 場面들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은 그 어느 것에도 조금도 오염되거나 물들지 않았습니다. 스크린은 그냥 스크린일 뿐이니까요.
 
우리의 삶 속에도 이와 같은 스크린이 하나 있습니다. 그 스크린 위에서 세상 모든 일이 일어나지만 事實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그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는 하얀 스크린 같은 것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이라는 瞬間입니다. 우리의 안팎의 모든 삶은 바로 ‘지금’이라는 이 瞬間 속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또 사라지기도 하지만 事實은 每瞬間의 ‘지금’ 은 언제나 처음처럼 새로우며, 우리가 웃고 울고 괴로움에 몸부림친 그 모든 삶의 내용과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지금’이라는 이 瞬間은 그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습니다. 단 한 瞬間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이 바로 每 瞬間의 ‘지금’이니까요.
 
우리의 마음이 만약 每 瞬間의 ‘지금’ 에 存在할 수 있다면, 삶의 모든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을 낱낱이 經驗하면서도 우리는 그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고 언제나 처음처럼, 自由롭게, 平和롭게, 幸福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은 언제나 새롭게 다가오니까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쉽게 過去나 未來로 달려가 스스로 거기에 매여 버리거나, 그 곳에 얼음 城을 짓고 홀로 외로워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누구나 ‘지금’ 속에 살고 있지만 眞正 ‘지금’에 存在함으로 말미암아 永遠한 自由를 누리는 사람은 지극히 드문 것입니다. 그 아이러니가 참 놀랍습니다. 
 
    

 

64.
    宗非促延 一念萬年
    종비촉연 일념만년
    근본은 빠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아 한 瞬間이 곧 萬年이다.
 

 

‘根本’이라는 이름을 달리 表現하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道, 진리, 깨달음, 佛法, 참나[眞我], 根源,

모든 것의 窮極, 永遠히 변치 않는 것, 不動등으로……. 그러나 이 모든 말은 단지 이름일 뿐 實相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根本’이란 다름 아닌 바로 ‘지금’을 가리킵니다. ‘지금’은 每 瞬間瞬間의 現在를 가리키는 것이니, 승찬 스님의 말씀처럼, 빠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지요. 빠르다, 늦다고 하는 것은 全的으로 人間의 느낌 감정

혹은 分別心인 生覺 마음 意識이 만들어내는 虛妄한 觀念 槪念일 뿐 固定된 實體로 實在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우리가 每 瞬間의 ‘지금’에 存在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그와 같은 모든 이원적(二元的)이고도

虛構的인 分別로부터 놓여나게 됨과 同時에 ‘時間’이라는 觀念으로부터도 벗어나게 되어 眞正 自由롭게,

'지금 이 瞬間' 속에서 永遠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 모두는 이미 每 瞬間의 ‘지금’ 속에서

말하고 침묵하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으니, 우리는 根本을 떠나 있지 않으며, 우리 自身이 곧 根本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感情, 느낌, 生覺마음意識들도 낱낱이 根本입니다. 우울도 根本이요 不安도 根本이며 雜生覺과 妄想도 根本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自身이 이미 지금 이대로 부처(佛/깨달음)요

眞理라는 말이지요.

 

 
다만 한 가지, 승찬 스님이 이 信心銘의 맨 처음에 말씀하신 “지극한 道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가려서 揀擇하는 일만 그쳐라. 단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感情, 느낌, 生覺들 가운데 어떤 것은) 싫어하고 (어떤 것은) 좋아하지만 않으면 막힘없이 밝고 分明하리라.”는 말씀처럼, 우리 안의 것들(衆生들)을 우리 스스로가 가려서 擇하거나 버리는 일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스크린이 自身 위에서 펼쳐지는 온갖 場面들을 다만 있는 그대로 비추기만 할 뿐이듯이 말입니다. 즉, 우리도 每 瞬間 있는 그대로 存在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지요. 단지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단 한 瞬間도 떠나본 적이 없는 ‘根本’으로 돌아와 그 根本이 가지는 永遠한 힘을 完全히 回復할 수 있습니다.
 
    

 

65.
    無在不在 十方目前
    무재부재 시방목전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 온 세상 우주가 바로 눈앞이다.
 
眞理 혹은 實相은 있다, 없다는 分別 속에 있지 않습니다. ‘있다’도 實相이요 ‘없다’도 實相입니다. 生滅法이 그대로 佛法이라는 말처럼, 일어남도 眞理요 사라짐도 眞理입니다. 강박과 긴장과 경직과 수치심과 불안과 잡생각 등등이 어느 瞬間 예고 없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 우리를 사로잡음도 眞理요 佛法이니, 그것에 抵抗하며 없애려고 하거나 극복하려고 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일체의 몸짓을 停止하고, 다만 그 瞬間에 存在하며 그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經驗하라는 말입니다. 또 어느 瞬間 우리를 가득 채우는 便安함과 기쁨과 즐거움과 이완과 더할 나위 없는 幸福도 다만 感謝하며 누릴 뿐 그것을 잡아두려고 하거나 쌓아두려고 하거나 오랫동안 持續시키려고 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단지 그 瞬間에 存在하며 그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經驗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듯 每 瞬間 있는 그대로 存在할 때, 모든 것을 經驗하면서도 그 어떤 것도 所有하지 않으니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처음처럼, 자유롭게, 평화롭게, 진정 행복하게 ‘지금’ 속에서 永遠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대로 온 世上이 바로 눈앞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66.
    極小同大 忘絶境界
    극소동대 망절경계
    지극히 작은 것이 곧 큰 것과 같으니, 상대적인 경계를 모두 잊고 끊는다.
 
   그런 마음 안에서는 작다, 크다는 分別도, 아니 모든 相對的인 境界가 無意味해집니다. 작다 하든 크다 하든 그것은 단지 말 觀念에 불과할 뿐이고, 이 世上 모든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임을 너무나 分明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每 瞬間 속에서 一切 모든 分別을 잊고서 살아가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또한 모든 것을 分別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分別의 안과 밖의 境界마저 끊어져, 一切를 分別하되 그 어떤 것도 分別하지 않는 完全한 自由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萬緣俱絶(만연구절, 만 가지 因緣이 다 끊어졌다.)”이라는 말이 있듯이, 안과 밖의 온갖 因緣 속에 뒤범벅이 되어 살아가면서도 그 어떤 因緣에도 얽매이지 않는 大自由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67.
    極大同小 不見邊表
    극대동소 불견변표
    지극히 큰 것이 작은 것과 같으니, 그 끝과 겉을 보지 못한다.
 
   또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습니다. ‘지극히 큰 것’은 道, 眞理, 깨달음, 佛法, 眞我, 窮極, 根本, 根源, 無限 등을 뜻하고, ‘작은 것’은 지금 이 瞬間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소소한 感情, 느낌, 生覺들을 가리킨다고. 그런데 그 둘은 正確히 같은 것이어서 그 境界線이 없다는 말입니다.
 
    68.
    有卽是無 無卽是有
    유즉시무 무즉시유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다.
 

 

지금 이 瞬間 우리 안에서 올라와 우리를 사로잡아버리는 强迫과 不安과 긴장과 수치심은 分明히 ‘있는’ 것이지만, 그것에 抵抗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온전히 그것에 自身을 내맡겨버리면, 그것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 채 곧 사라져버립니다. 그것들은 事實은 固定된 實體가 ‘없는’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저런 모양으로 힘들고 괴로운 우리의 안팎의 삶 속에서 이런 瞬間을 단 한 번만이라도 經驗할 수

있다면, 그 瞬間 우리 마음 안에서는 어떤 說明할 수 없는 飛躍이 일어나, 있음과 없음에도 매이지 않고, 얻음과 잃음에도 拘束되지 않으며, 삶과 죽음으로부터도 自由롭게 됩니다. 단 한 瞬間 온전히 ‘지금’ 속에 存在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生覺마음意識이 만들어내는 모든 虛構的인 分別로부터 永遠히 놓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瞬間에 存在하는 것, 곧 현존(現存)은 그토록 强力한 힘을 갖고 있답니다.

 

 
    69.
    若不如此 必不須守
    약불여차 필불수수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반드시 지키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지금’으로 돌아와 보면, 모든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取하고 버릴 것(捨)이 本來 없었고, 새롭게 얻거나 알아야 할 것도 없었으며, 그렇게 발버둥 치며 到着해야

할 곳도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는 事實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한바탕 꿈을 꾼 것 뿐입니다.

오직 우리 마음 안에서 二元性의 分別心 하나가 내려지는 것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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