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행복의 경지 ‘無我證得’ 믿음이란 집짓기 위한 주춧돌 실천 담보될 때 깨달음 얻어
모든 종교, 고통 탈출법 제시
육지에서 뛰어다니는 당나귀와 바다에서 헤엄치는 물고기하고 같은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둘 다 나무에 기어오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모든 生命體는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좋아하는 것도 같습니다. 새나 물고기나 온갖 衆生들은 苦痛을 싫어합니다.
人間 역시 마찬가지죠. 政治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하는 목적에서 출발됐습니다. 經濟 역시 국민소득을 증가시켜 질 높은 삶을 추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社會, 文化 모든 것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宗敎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 어떻게 하면 고통 받는 인간세계에서 구원을 받아서 천국으로 갈 수 있을지를 이야기합니다. 불교도 우리가 사는 중생세계를 고통이라 보고 있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고통을 받고 태어납니다. 어머니는 産苦를 느끼고 아이도 苦痛을 느끼기에 고함을 지릅니다. 이후에도 점차 늙어가다 병들어서 죽어야 합니다. 나고 병들고 죽는 것이 전부 고통입니다. 이처럼 세상 살아가는데는 여러 가지 괴로움이 있습니다. 사랑이 좋다하지만 영원하지 않고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또 살다보면 미운 사람도 생기는데 이들과 서로 만나야 되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명예도, 돈 버는 것도 뜻대로 안돼요.
우리는 精神的, 肉體的으로 이 生覺 저 生覺 苦惱 속에서 어렵게 살아가죠. 전부 괴로워요. 생사의 고통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제일이라 하지만 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으면 돈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래서 부처님이 왕자자리를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를 합니다. 설산에서 4년간 고행하고 보리수 아래서 宇宙와 人生의 根本眞理를 깨달아서 부처님이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라는 말은 나고 죽는 이치를 깨달은 이를 말합니다. 宇宙도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무너지는 시기가 오고 自然界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흐름이 있습니다. 生老病死나 春夏秋冬의 理致는 같습니다. 부처님은 그 이치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며 가르침입니다. 해탈의 자리, 그것이 최고행복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돈을 벌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이성간의 행복을 찾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과 명예, 異性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가 없어요. 누가 과연 행복한 사람이죠?
행복한 사람을 찾아 길을 떠난 이의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먼저 찾아간 이는 돈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도 조금도 행복하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갖은 어려움을 이겨냈는데, 다시 이 돈을 지키기 위해서 여간 신경쓰이는게 아니라고 했어요. 까딱 잘못하면 회사가 부도가 날테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이야기한다며 너무 힘이 든다는 거였죠. 그러더니 자신보다는 벼슬 높은 이에게 가보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명예를 얻은 이도 자신이 결코 행복하지 않다고 답합니다. 많은 경쟁자를 물리쳤으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하면서요. 그러면서 자기보다는 예쁜 부인을 데리고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하지 않겠냐고 합니다. 미인과 함께 사는 이도 함께 사는 즐거움은 며칠 뿐, 자신은 부인을 지키는 종에 불과하다며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저는 10대에 출가해서 지금까지 중노릇을 해왔지만 아마 제가 가장 행복한 것 같습니다. 명예가 없으니 떨어질 일도 없죠.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해도 이는 정기적으로 교체되는 것일 뿐이니까요. 자식이 없으니 학비 걱정도 없으며 패션도 안 바뀌니 옷도 10년씩 입어도 됩니다. 천만다행입니다. 오직 불도에만 전념할 수 있어요.
저는 감히 말씀드리건대, 人間으로서 가장 幸福한 境地는 無我證得이라고 生覺합니다. 우리는 생사 고통없이 해탈에 이르는 행복을 찾아야합니다. 해탈의 자리, 그것이 최고 행복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이치를 나도 알아 행복해지는 거죠. 불교를 공부함에 있어 중요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죠. 불교는 윤리·도덕 부각된 율장 존재 우선 믿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華嚴經에 보면 믿음을 두고 진리의 근원이자 공덕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공덕을 이루는 모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모든 일체가 믿음으로부터 일어납니다. 믿지 않으면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믿으면 생사의 애착에서 벗어나서 깨달음의 위없는 진리를 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집 짓는데 주춧돌을 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 다음에는 불교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아이를 미아라고 하듯 신앙을 갖되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믿기만 하는 것은 미신이라 합니다. 팔만대장경의 이치를 알아야 해요.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는 만큼 生覺하고 行動하며 말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가르침인 진리를 알았을 때 속지 않을 수 있어요. 여러 물건이 있는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골라봐야만 이 물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있듯, 불교를 알려면 기독교 천주교 유교도 알아야 합니다.
불교 가르침은 經律論 삼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경은 신앙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됩니다. 나무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참선, 염불, 절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불교는 윤리, 도덕적 측면이 부각된 율장이 존재합니다. 불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계율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오계 중 첫번째인 살생금지도 모든 생명체가 더불어 잘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어느 성인도 모든 생명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구제하라고 말한 분은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불교는 포교를 위해 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어요. 타종교는 자신의 믿음을 남에게 강요하며 전쟁을 일으키죠. 이어 오계에서는 내가 내 몸과 재물을 소중히 여기듯이 훔치지 말고 베풀어 보시하라고 이야기하고 사음하지 말며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술을 마시지 말라고도 합니다. 2천 5백년전부터 부처님은 음주단속을 하신 것입니다. 술이 죄가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술로 인해 내 마음의 지혜종자가 없어지고 술로 인해 많은 범죄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율장 다음으로 논장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 세상 모든 法은 因緣 따라 일어나고 없어지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絶對者가 개인의 길흉화복을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부처님은 절대자가 아니라 단지 原因과 條件에 의해 모든 일이 生成消滅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因緣論이죠. <華嚴經>의 근본이치는 일체가 전부 내 마음에서 만들어졌다는 一切唯心造입니다. 몸과 우주는 둘이 아니라 하나 말은 무엇으로 듣습니까. 귀로 듣나요? 만약 그렇다면 시체도 귀가 있으니 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듣는다고 말하는 것은 전부 마음을 通해서입니다. 마음이 귀를 通해서 듣고 입으로 말합니다. 덥다, 춥다 느끼는 것 모두 전부 마음이 하는 것입니다. 몸뚱이가 어디로부터 나왔습니까. 내 마음이 없으면 이 몸뚱이는 그날부터 송장입니다. 이처럼 세계도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물을 마셨기 때문에 피, 물, 침이 땀이 생기는 것이고 음식을 먹었기에 육체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숨을 쉬는 것도 宇宙虛空에 있기 때문에 숨을 쉴 수 있는 것입니다. 몸과 우주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육체는 가짜 나이지만 마음자리는 몸이 없어져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은 늙지도 젊지도 아니합니다. 不生不滅이라 하죠.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크거나 작은 것도 아닙니다. 소녀시절 마음이나 할머니 마음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生死없는 이 자리가 바로 마음자리입니다. 마음은 나의 주인입니다. 마음자리 찾는 공부를 꾸준히 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찾으면 부처님이요 깨치지 못하면 중생이라는 것을 알고 실천수행을 해야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든, 주력, 사경을 하든 근본목표는 마음자리 찾는 것입니다.
중국에 조과선사는 불법을 묻는 백거이에게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이라고 답했습니다. 백거이는 실망했죠. 조과선사는 다시 말합니다. “열 살 먹은 아이가 말은 할 수 있을지언정 백살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는 어렵다”고요. 실천이 담보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宇宙一家…인류 행복 담긴 단어 부처님 가르침보다 위대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衆生의 生覺은 온갖 生命이 따로 분리돼 있다는데서 머물지만 부처님(佛)은 一切 生命은 하나라고 말하십니다. 동해는 하나지만 그 속에는 파도가 수없이 일어났다 가라앉았다합니다. 만약 파도가 다 떠나버리면 바다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이 파도와 저 파도가 따로 있다 생각하면 거기서 차별, 분열, 갈등, 시비, 논쟁, 전쟁이 생깁니다. 바다가 파도요 파도가 바다입니다. 마찬가지로 宇宙는 일가(一家), 한 집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내 宇宙, 네 宇宙
따로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자기 집이 어디입니까. 宇宙가 내 집입니다. 여러분이 空氣를 아무리 호흡한다해도 누구도 왜 空氣를 마시느냐 타박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들은 어디든 마음 내키는 대로 갈 수 있습니다. 宇宙가 내 집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宇宙 空間에 살고 있는 生命體가 主人이라는 生覺을요. 길 위에 꽁초가 떨어져 있으면 보기 싫은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나와 우주는 둘이 아닌 하나.’ 이러한 생각 가운데 世界平和와 人類幸福이 있습니다. 萬物의 根本이 같고 나와 한 몸이라는 부처님 가르침을 지니고 세상을 살아갈 때, 갈등은 물론 전쟁, 다툼이 없는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