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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의 천수경 강의 제17강(끝) - 自性 四弘誓願, 三歸依

장백산-1 2014. 11. 18. 16:33

 

 

 

법상스님의 천수경 강의 제17강(끝) - 自性 四弘誓願, 三歸依|영상법문 녹취록

 

 

네 천수경 강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자성중생서원도(自性衆生誓願度)

자성번뇌서원단(自性煩惱誓願斷)

자성법문서원학(自性法門誓願學)

자성불도서원성(自性佛道誓願成)하는 부분을 할 차례인데요.

 

사홍서원을 지난번 시간에 공부를 했는데,

이번에는 보니까 어떻게 되냐하면 앞에 自性이라는 말이 붙었어요.

쉽게 말해서 自己 性稟 가운데에 自己안에 自己의 本來的인 性稟가운데에 이미

衆生도 들어 있고, 煩惱도 있고, 法門도 자기 안에 있고, 佛道를 이루는 것도 이미 자기 안에 있다.

 

自性衆生誓願度,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어리석은 중생이 우리가 건져야 될 중생도 내 안에 있고

내 한 생각 어리석으면 중생인거죠. 내가 한 생각 번뇌에 싸여 있으면 중생인 것이고

또 그럼 중생이라는 것이 내가 바로 중생인데, 그 중생이 되는 것은 바로 번뇌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自性煩惱誓願斷, 이 번뇌 또한 번뇌를 끊는 것도 또한 내 안에 있는 번뇌를 끊는 것이고

 

또한 自性法門誓願學, 법문을 배운다 하는 것도 바깥에 있는 어떤 법문을 배우는 것은 하나의 方便이고

本來는 내 안에 있는 법문, 내안에 있는 모든 법문, 내 안에 이미 모든 법이 이미 구족되어 있다. 라는 말이죠.

그래서 내안에 있는 법문을 다 배우겠다.

 

그리고 自性佛道誓願成, 이미 자성속에 내 마음 가운데 이미 불도가 다 이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다 이루어진 불도을 그저 되찾는 것 밖에 없는 거거든요.

그래서 중생도 내안에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구요. 내 바깥에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내안에 있는 중생이 구제가 되면 내 바깥에 있는 일체 중생이 모두 함께 구제가 되는 겁니다.

이미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라서 그렇다는 말이죠.

어차피 지금 바깥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실체적인 중생이라는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어서 중생인 것이 아니라,

實際로는 부처인데 중생인 걸로 스스로 잠시 눈꺼풀에 뭔가 씌운거예요. 그냥 잠시 妄想을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가만히 저 앞에 있는 아름다운 단풍을 이렇게 보고 있지만

눈은 단풍을 보고 있지만 잠시 딴 生覺  妄想을 하게 되면 단풍이 안보이잖아요!

 

여러분 저 전에 그 어디죠? 그 TV 프로에 그 뭐더라. 그 하여간 뭐 무슨 궁금한 재미난 프로가 하나 있었는데요.

거기에 나온게 뭐나면요? 저도 깜짝 놀랬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렇게 공을 가지고 여러명이 공을 가지고 이사람

저사람 동그랗게 서가지고 공을 내가 저 사람한테 던지고 이 사람한테 던지고 해서 쉽게 말하면 호루라기를 딱

불기 시작하면 공이 몇번 왔다 갔다 했는지를 우리가 알아 맞추는 거예요. TV를 보고,

 

그래서 호루라기를 딱 불자마자 사람들이 전부다 TV를 보면서 그 공간안에 있는 한 열명 정도가

공을 왔다 갔다 하는 거를 속으로 하나하나 세는 겁니다. 하나 던질 때마다 하나 둘 셋 넷 하면서 세겠죠. 그죠?

그렇게 이제 열번 정도를 서로에게 서로서로 던졌어요. 그러고 나서 딱 끝나고 나서 몇개냐 하고 사람들에게

물어봤더니 전부다 열번이다. 공이 열번 왔다 갔다 했다고 거의 대개분 알아 맞췄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열번 그 공이 왔다 갔다 하는 동안에 뭔일이 생겼는데

뭔일이 생겼었다라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공을 던지는 거에 딱 집중을 하고 있는 나머지

그 사이에 뭔일이 생겼는지 아무도 못 본겁니다. 아무도 못 봤어요. 그래서 누가 중간에 왔다 갔는데 못봤느냐?

그랬더니 아무도 못본거예요. 아무도 상상조차 못했다는 거예요. 누가 왔다 갔다는 거는 ,

 

여기에 고릴라 분장을 한 덩치가 산만한 고릴라로 변장을 한 사람이 와가지고 춤을 추고 들어갔는데

공이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주변에 왔다 갔다 하면서 고릴라가 와가지고 춤을 추고 들어갔어요.

그런데 공에만 정신이 집중해 있느라고 사람들이 고릴라가 와서 춤추고 간 사실을 아무도 기억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봤던 것을 그대로 다시 틀어줬어요. 그리고 고릴라가 있나 진짜 있나 볼려고 고릴라를 봤더니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전부다 그걸 보고 전부다 깜짝 놀랐어요. 왜 놀랐느냐하면?

 

고릴라가 산만한 고릴라가 그냥 귀퉁이에 살짝 왔다 간 줄 알았는데 정중앙에 와가지고 공이 왔다 갔다한 정중앙에 와서 춤을 추고 그리고 들어 갔는데도 그 누구도 한명 그 고릴라를 발견을 못한 겁니다.

 

이게 우리가 우리 認識의 限界입니다. 눈으로 보고는 있지만 다른 데 集中하고 있으면 그건 전혀 보지 못하는 겁니다.

눈을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는데도 우리는 못 보는 것들이 많단 말이예요.

눈을 멀쩡하게 뜨고 있는데도 못 보는 이유가 뭐냐하면?  바로 煩惱 때문에 그렇다. 妄想 때문에 그렇다.

뭔가 다른 데 마음을 集中하고 있거나 다른 데 하나에 딱 쉽게말해 꽂혀 있거나,

집중을 하고 있거나, 이럴때는 다른 것을 못 본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의 眞實이 내 눈앞에 있어도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지 못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法의 性稟이, 智慧의 性稟이, 眞理의 性稟이 고스란히 있지만,

우리는 진리의 성품을 보지 못하고 그냥 번뇌 망상만을 따라가면서 본다는 말이죠.

 

저 앞에 이렇게 단풍이 아름답게 눈에 딱 들어와 있지만, 제가 妄想을 피우고 있는 동안은

저 단풍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제가 가만히 생각 해보면 이 自然에 눈을 뜨기 前에는

가을이 지나 갔는지, 안 지나 갔는지 조차 關心이 없었구요.

 

남들이 단풍 놀이 간다는 거를 좀 어릴 적에, 어릴 적에는 단풍 놀이를 간다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되는 거예요.

제 槪念속에는 단풍 놀이라는 觀念이 아예 없었으니까요,

물론 저가 어릴 때는 아예 뭐 부모님이 요즘 사람들처럼 부모님이 여름에 뭐 놀려 간다거나,

밖에 나가 회식을 한다거나, 뭐 나들이 간다거나 이런 것 자체가 아예 없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그런거는 아예 생각 안하고 있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단풍이 왔는지 갔는지 전혀 모르고 그 아름다움을 못느끼고 살았단 말이죠. 그런데 어느날 야 자연이라는 것이 이렇게 경이로운 것이구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까,

단풍이라는 것 하나하나가 정말 요즘 있잖습니까? 요즘 요 며칠 요즘 가을...

여름에는 전혀 느끼지 못한 경치도 너무 아름다울 뿐더러, 하늘이 너무나도 화창하죠.

서울 하늘이 이렇게 화창하고 맑을 수나 있나 싶을 정도이고

너무나도 깨끗하고 그런데다 날씨가 너무 적당하게 좋으니까 어디 산책하기 얼마나 좋습니까?

 

지난주 월요일날도 저 산을 천천히 터벅터벅 오후 나절에 올라갔다가 내려왔었는데,

그야말로 평일날 올라갔다가 내려가니까 월요일에 갔다 오니까 아무도 없고 사람들도 없고

그것도 오후에 천천히 올라갔다가 내려오니까 아무도 없고

그야말로 이 아름다운 그 풍경이 지금이 딱 정확히 밑에는 여름이구요.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가을이, 한발 한발 올라갈수록

한두시간만에 가을을 탁 만나는 정상에 딱 가면 가을이 확 와있습니다.

 

이런 아름다움들을 볼 수가 있는데도 우리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산단 말이죠.

이것이 없어서 못보는 게 아니라, 내가 다른걸 보고 있으니까 못보는 겁니다.

우리는 뭔 다른 걸 보고 있는냐면? 바로 이 煩惱 妄想을 보고 있는 겁니다.  妄想 煩惱를...

내 머리속의 妄想 번뇌를 보고 人生을 사는 거예요. 그런 사람을 중생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번뇌 망상속에서 사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우리가 해야 될

自性衆生誓願度, 自性煩惱誓願斷의 의미란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해오던 이 習慣, 習慣 덩어리, 이 무지막지한 習慣,

우리가 習慣이라는 것 조차 알지 못하는 習慣,

여러분 自己 生覺을 이렇게 지켜다 보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지,정말 어이가 없어가지고

나라는 놈한테 참 처음에는 실망스럽고, 나중에는 야 너는 진짜 어쩜 이렇게 어이없는 짓을 하고 있느냐?

어찌 이렇게 말도 안되는 妄想 煩惱를 피우고 이렇게 사는냐 제가 제 자신이 제 생각이 너무 어이없을 때가 많습니다.

 

하다못해 조금 전에 관세음보살 염불을 하는데도 시작하면서 끝날때까지 염불을 하면서

늘 염불하는 이 염불하는 이 소리가 나의 그냥 목소리가 아니고, 목탁치는 이 소리가 염불하는 이 소리가 그대로 

지금 이 자리에서 여지없이 本性의 소리인데, 自性의 소리인데 이 소리의 본바탕이 되는 그야말로

本性의 性稟이 있는데, 그 性稟을 보지를 못하는 나는 염불 소리만 듣고 목탁소리로만 듣는가?

그렇게 듣지 않고 이 소리를 통해서 내가 그 자리를 확인해야된다.

그런 마음으로 이렇게 봐야되겠다라는 아주 굳은 각오로 탁 염불을 시작한다 말이죠.

시작하는데 중간쯤가면 여지없이, 여지없이 전혀 뜬금없는

그러니까 제가 조금전에도 염불 하다 말고 제가 너무나 어이없고 당황스러웠습니다.

 

어떤 생각에 순간 탁 집중이 되다말고 순간에 雜念이 싸악 들어왔는데 어이없고 말도 안되는 잡념이 들어온거를 보고 제가 정말 당황스러웠습니다. 뭔생각이 들어온줄 아십니까?

 

제가 이제 오늘 초하루 기도가 끝나면 빨리 점심을 먹고 저 가평 백련사에  수련회를 진행을 하러 가야되는데

아침 이 여기 오늘이 뭐 큰 행사가 있습니다. 큰 행사가 있어서 행사를 하느라고 아침부터 쾅쾅거리면서 연습하고

준비하고 해요. 그런데 그 친구들이 행사를 할 때 이 친구들이 중간에서 큰 행사를 할 때는 길을 통제하지 않습니까?

나가는 길을 통제를 해요. 차를 못가게 한다 말이예요.

 

그런데 제가 갑자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야! 내가 그 시간에 바로 가가지고 내가 두시까지 도착을 해야되는데

여기 통제를 한번 해버리면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통제를 할 수 있는데 통제하면 아 어떻게 나가야되나?

이거 뭐 뒤로 가면 길도 없는데 저 후문은 열어 주지도 않는데 후문을 열 수 있는 어떻게 찾으면은 있을려나?

온갖 생각이 뜬금없이 일어나는 것이 탁 보이는 겁니다.

 

그걸 보고서 관세음보살 염불하다 말고서 이렇게 가만히 생각해보세요.이게 얼마나 어이없는 생각입니까?

이거 내가 그 자리에서 생각해야 될 일입니까? 생각 한다고 해서 답이 나올 것도 아니고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그런데다가 저는 시작하기 전에 이 소리를 통해서 관세음보살 소리를 통해서 그 性稟자리를 확인한다는 것이

소리를 통해서 내가 이 소리에 집중하고 있을려고 굳은 결심을 하고 염불을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뭐 심각한 고민이 됐다면 내가 이해를 하겠어요. 심각한 고민도 아닌, 이런 이 어이없는 이런 生覺 妄想이

부지불식간에 올라와서 생각이 나를 지배하게 된다 말이죠.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정말 쓰잘때기 없는 생각들,

하등 도움 안되는 생각들, 이 생각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생각들, 전혀 할 필요도 없는 생각들,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들이 어느 순간 와가지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단 말이죠.

 

이런 일들이 누구나, 누구나, 누구나 그렇습니다. 누구나 그렇고 이런 생각을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해 그렇지,

쉽게 말해서 마음공부가 어느 정도 되는 사람들은, 마음을 관하는 것이 좀 되는 사람들은 더 행복해져야 되는데,

한편으로 더 뭐랄까?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파진다고 그래요.

 

왜냐하면? 나의 그 모든 그 生覺 煩惱 妄想들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활짝 보이기 시작하니까,

더욱 어이가 없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야 이런 말도 안되는 生覺 妄想을 가지고 내가 휘둘리면서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왔는가! 하는 게 너무나도 어이가 없고 당황스러워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내 안에 있는 작은 어떤 이기심도 환히 드려다 보이기 시작하고

 

그런데 이제 거기서 공부를 좀 더 하면 그런 妄想 生覺이 보이면 그냥 보일 뿐이지. 보이면 그냥 보일 뿐.

이기적인 마음이 보이면 보일 뿐이지. 그 이기적인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닙니다.

 

제가 이러한 생각이 일어날 때 또는 내가 자비스럽지 못한 마음이 일어날 때, 제 자신을 엄청 막 이렇게

너는 저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라고 마음먹고 출가했다는 수행자가 어찌 그렇게 자비심이 부족하냐?

내가 자비심이 부족한 내 생각을 보고나서는 대개 충격을 받으면서 제 자신을 대개 헐뜯으며

제가 처음 출가할 때 그게 좀 심했던것 같아요.

 

그러니까 微細한 自己 我執같은 거 누구나 있잖습니까? 我相 같은 거, 그걸 보고서는 미세한 게 아니죠. 

큰 아집이겠죠. 그걸 보면서 제자신이 너무 한스러운거예요. 너무 이중인격자 같은 겁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수행자로써 출가를 해서 정말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 뭐 이런 거대한 마음을 내면서

한편으로는 나 잘되자고 내가 잘되기 위한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산다는 게 너무 내 자신이 대개 이렇게

못난 놈같고 아주 이중인격자같고  내가 대개 아주 나쁜 놈같은 그런 느낌 있잖습니까?

 

이렇게 나쁜 놈이 무슨 공부를 한다고 이렇게 하느냐 하는 이런 죄의식같은 거에 사로잡혀 있었던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공부를 하다보니까 아~  그것 또한 잘못된 생각이였구나.

그것은 내가 그렇게 아집과 아상이 일어나는 生覺을 나와 同一視 한겁니다.

그게 나다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괴로웠던 것이고, 내가 나쁜 놈이라고 나를 자꾸 죄의식가지고 막 했던 것이죠.

 

그런데 딱 알고봤더니 그것 또한 내가 아니란 말이죠. 그 생각이 내가 아닙니다.

그 생각은 그냥 우리가 저기서 그냥 일어나는 거예요. 한발 떨어져서 우리는 그 생각을 지켜봐야 되는 겁니다.

지켜볼 대상이지 내 생각이 하는 게 아닙니다. 그 생각은 그냥 일어나는 겁니다. 그 我相의 屬性이.

 

第7識은 意識의 밑바닥에 있잖아요? 제7식이라는 我執덩어리는 그냥 지 혼자 일어나는 겁니다.

내가 일어나고 싶은 마음을 안가져도 完全히 깨닫기 前에는 그냥 일어나는 意識입니다. 그냥 누구나

그러니까 일어나는 생각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내가 그 생각을 지켜보게 되면 그 生覺 妄想에 휘둘리지 않게 되고

그냥 그 망상 생각을 지켜보지 못하는 순간 그 생각 망상 거기에 휩쓸리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마음가운데 아주 못됐고, 이기적이고 이런 마음을 볼지라도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실을 알고 나니까 제가 얼마나 自由로와지는지 모르겠어요. 제 자신을 단죄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내가 나를 나쁜 놈이라고 이렇게 죄의식을 갖지 않아도 되고 자유로와져도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자신을 사랑해줘도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자신을 인정해줘도 되고,

내가 그런 이기적인 마음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괜찮아, 괜찮아 하고 그걸 알아차릴지언정 알아볼지언정

내가 재 자신을 단죄할 필요는 없더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까, 제 자신이 너무나도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쉽게 말해서 출가를 해서 수행을 하고 아니면 이렇게 뭐 相이 많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 죄의식이

심해질 수가 있거든요. 그랬으니까 제가 그게 대개 심했던 거였어요. 대개 자유롭지가 못 한겁니다. 그러니까

참 대개 무겁게 살았던 것 같아요. 한동안. 그런데 정말 거기에 대해서 탁 자유로와지고 나니까,

삶에 대해서 대개 가벼워지는 거예요. 내가 쉽게 말해서 이런 게 있습니다.

 

아난 존자는 꽃향기만 맡아도 신중들이 너는 꽃향기를 도둑질 하는 놈이구나하고 이렇게 혼낸다 말이예요. 크게,

그런데 일반 중생들은 남의 것 도둑질해도 별로 안 혼난다 말이죠. 왜 그러냐 했더니? 일반 중생들은 워낙 業障이

두터워서 안 혼나지만 아난 존자는 워낙 업이 가벼워서 작은 것도 크게 보인다.

 

이를테면 내가 수행자라고 마음을 내고 사는 사람이니까, 내가 남들이 이기심을 가지면 그럴 수도 있는데,

내가 이기심을 가지면 더 나쁜놈이라서 더 지옥에 갈 것 같은 겁니다. 더 지옥에 갈 것 같은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야 내가 이렇게 수행자라고 해놓고 죽고나서 지옥에 가면 어쩌나.

야 죽고나서 내가 이 수행을 다 못하고 또 다음에 지옥에 가던가 이렇게 된다면

이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이런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시절이 있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제가 아마 근래 쓰던, 최근에 썼던 글들 아마 예전에 썼던 글들 보면

한 때 이를테면 누구나 이중인격자다 이런 글들도 썼었고

또 그러한 죄의식에서 놓여 놔야 된다라는 그런 어떤 깨달음에 대해서도 썼었고

이렇게 했던 내용들이 그러한 것들이였단 말이죠.

그것이 바로 내가 내안의 生覺과 나 자신을 同一視 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生覺은 생각일 뿐이고, 느낌은 느낌일 뿐이고, 感情은 감정일 뿐이고 그것들이 내가 아닙니다.

意識도 의식일 뿐이지 내가 아니고, 見解도 견해일 뿐이지 내가 아닙니다.

그 견해와 나를 同一視하면 안된다. 이 몸도 몸일 뿐이지 내가 아닙니다. 몸과 나를 同一視하면 안된다.

그러고 나면 자유로워질 수가 있단 말이죠. 그건 실제 내가 아니니까,

 

그래서 하여간 우리가 우리안에 켜켜이 내가 붙잡아 놨던 것

아까 나는 이기적이면 안되 뭐 이런 생각,들 내가 죽고 나서 지옥가지 않을까하는 생각, 죄의식에 사로잡힌 생각,

이런 모든 生覺들이 바로 煩惱 妄想입니다. 망상 번뇌 우리가 부여잡고 있는, 기를 쓰고 부여잡고 있는 번뇌죠.

이 번뇌를 붙잡고 있는 限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참 신기한 점들이 제가 이런 얘기를 항상하고 여러분들도 항상 듣잖습니까?  여러분들은 아 뭐 다 아는 얘긴데

뭐 맨날 또 하십니까, 또 하십니까. 이렇게 하시잖아요.근데 참 제가 놀라웠던 거는 충분히 이햬하신 분들.

이것을 충분히 이해하신 분들이 이거 理解한 것과 實生活은 전혀 다릅니다.

실생활이 체험이 안되는 거는 괜찮은데, 체험이 안되는 거는 괜찮은데,

똑같은 얘기를 일반 생활속에서는 적용을 못시키더라 말이죠 적용을, 대개 단순하게 적용해야 되는 부분인데,

쉽게 말해서 그겁니다. 제가 요즘 보니까, 법륜스님이 즉문즉설을 왜하는지 참 진짜 알겠다 싶은 게 뭐냐하면

이런 原論的인 法門을 하는 것은 理解를 다 해요.이해를 다 하는데, 그건 그거데로 이해를 하는 거고,

내 삶은 전혀 별개가 돼버립니다.

 

집착을 놔야된다는 거는 다 이해를 하고 아 그거 제가 압니다.무집착 집착 놓으면 다 끝난다는 거 제가 잘 압니다.

이렇게 생각해요.그런데 본인이 상담을 해요. 상담을 이제 하는데 상담 내용을 보면은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 때문에 괴로운 내용을 상담을 한다 말이죠.

그래서 거기서 거사님은 요 부분에 집착하고 있네요. 그거만 놓은면 괜찮은데

그거를 집착하니까 괴로운 거네요. 처음에는 저는 집착하지 않습니다. 집착 아닙니다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 아 집착이였군요 알고 나서는 아 이거구나. 이렇게 안단 말이죠.

 

그러니까 집착을 놔야 된다는 걸 아는데 내가 생활속에서 실제 뭘 붙잡고 있는지를 까맣게 모르고 있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살아야 된다. 이런거는 아는데, 실생활에서는 이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를 모른다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공부하고 계속해서 다양한 어떤 것들을 듣고 이래야 되는구나.

이게 참 쉽지 않은 일이구나. 그런 생각들이 들더란 말이죠.

 

그러고 다음이 自性法門誓願學, 자성속에 이미 법문이 다 들어 있단 말이예요.

自己의 本來 自性속에 이미 모든 법문이 다 구족되어 있다. 이건 정~말 정말 眞實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삶의 고민들이 있을 때 그 어떤 삶의 의문이 있을 때

제가 이십대까지 중고등학교 대학교 요때까지 가장 많이 궁금했던 게 그겁니다.

제가 가장 많이 질문을 던졌던 것 같애요. 가장 많이 궁금했던 게 뭐냐면? 이겁니다.

항상 그 고민이 있었어요. 이 狀況에서 큰스님이나 道人들은 어떻게 決定할까?

이 狀況이라면 부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 狀況에서 어떤 答을 내야 이게 진짜 眞理와 合一 되는 決定일까?

아 이 狀況에서는 내가 뭘 決定해야지 이것이 眞理다운 決定일까?

궁금한 게 있을 때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은 도대체 뭘까?

아 부처님이라면 어떤 답을 냈을까? 이거 너무 궁금한거예요.

어느 瞬間부턴가 그 궁금한 거는 싹 사라져버렸어요. 그런데 그게 대개 궁금했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다시말해서 우리는 언제나 궁금한 것이 있단 말이예요. 여러분들 예를 들어 하다못해

작게는 내 자식을 이 대학에 보내야 하나? 저 대학에 보내야 하나? 사실 그 고민 자체가 어리석은 거죠.

 

왜냐하면? 그거는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지가 하는 거지. 자식이 하는 거예요. 자식이.

엄마는 옆에서 서포트만 잠깐잠깐 해줄 뿐, 그 결정은 자식이 하는 건데 우리는 대개분 엄마가 할려고 그러잖아요. 

대학교 어디 갈지를 왜 엄마가 결정하는지 모르겠어요.내가 어떤 여자와 결혼 할 건지, 조언을 해줄 수 있죠.

당연히 적극적으로 조언은 해줘야죠. 그러나 집착없이 조언을 해줘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結論은 結局  決定은 自息이 스스로 내리는 겁니다. 본인이.

 

아 이런 얘기를 자꾸해서 죄송하지만 얼굴에 점 이거 빼줄까 말까 지가 결정하는 거죠. 자식이 본인이

본인이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말고 싶으면 마는 거지 부모님이 결정하는 거 아닙니다.

 

학원을 갈까 말까 부모님이 결정해 주면 안되요. 본인이 결정하는 거죠. 이게 중요하고,

본인이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 애매한 겁니다. 이걸 할까 저걸 할까,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내가 이걸 해야 좋을까 저걸 해야 좋을까, 답답해 할 때 그 때 부모님은 조언은 해 줄 수 있죠. 조언은

그리나 최종결정은 너가 해라 그러면 본인이 갑갑하고 막막한 삶을 어떤 사람은 이년 삼년씩 삶니다.

대학생들 이십대 친구들을 보면요. 내가 어떤 일이 맞는지 적성을 몰라가지고 그걸 일년 이년씩

고민 하는 친구가 있어요.

 

그런데 그런 친구들은 일년 이년 동안에 막막한 시기가 그 친구에게  반드시 필요한 시기예요.

그 시기를 겪지 않고 빨리 넘어가 버리면 오히려 나중에 잘못 된다고

그 시기가 그 아이한테는 꼭 필요했던 시기 였던거예요. 그러니까 혼돈의 시기도 필요해요.

답이 안나와가지고 막막한 시기가 우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게 화두 아니예요. 화두...

 

깨달음속에서도 화두, 화두라는 막막한 시기 알수 없는, 오직 모를 뿐인 이런 시기를 거쳐야지만

답이 딱 나오는 게 화두거든요. 깨달음이거든요.

우리 삶도 마찬가지예요. 인스터트처럼 빨리 답을 추구하려고 하고

빨리 스님께 물어봐서 빨리 답을 내려주세요.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단 말이죠.

 

중요한 거는 내안에 이미 答이 있는데, 내안에 있는 答은 나오는데 時間이 必要해요. 時間이,

그런데 그 時間은 반드시 必須的으로 必要한 時間입니다. 그런데 간절히 궁금해 할 수록 그 답은 빨리 나와요.

간절히 궁금해 할수록 이미 내안에 답이 있기 때문에 이 법문이 이미 내안에 다 있단 말이죠.

이미 법문이 내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할 거는 그것 밖에 없어요. 간절히 궁금해 하는 겁니다. 그게 話頭예요.

 

삶속에서 내가 궁금해 하는 거에 대해서 내가 궁금해 하기만 하면

우주법계는 내가 필요한 만큼의 궁금한 데 필요한 시간, 그 시간을 지나보내도록 해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궁금한 것을 내 안에 질문을 딱 던져 놓되,

거기에 대한 답은 빨리 나오기를 조바심 내고 초조해 하면 안됩니다.

아~ 언젠가 답이 나오겠지! 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되요. 기다리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말이죠.

기다리는 시간은 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성숙하는 시간이고 성장하는 시간입니다.

놀라운 공부의 시간이예요. 오직 모를 뿐인 시간이야말로 아주 좋은 시간입니다.

 

그러니 불교에서는 그래요. 스님들이 큰스님들이 하는 얘기가 막막하고 갑갑하고 모르겠을 때,

그 때가 좋은 시절이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 때가 좋은 시절이다.

내가 뭐해야 될지 모르겠고, 뭔가 막막하고, 야 따로 좋은 것도 없는 같고 재미난 것도 없는 것 같고

인생이 갑자기 공허하고 그런 시간을 지나보내줘야 됩니다. 마땅히 堪當해 줘야하고 許諾해 줘야해요.

이게 뭔가 뭐 虛하고 이런 시간도 그 시간이 왔을 때 그걸 감당해 줘야 된다 말이죠.

그걸 빨리 없애고 빨리 다른 거 뭔가를 해야지 이런 생각을 가지면 성숙할 수 있는 시간을 놓쳐 버리는 겁니다.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그래서 모든 答은 나에게 있습니다. 저는 이걸 정말 제 삶속에서 터득한, 터득한 지혜입니다. 삶속에서

정말 저는 제 안에서 언제나 질문을 던져놓으면. 제가 어찌보면 저도 하나의 깨달았다라는 얘기가 아니라,

저도 하나의 獨覺 비슷한데, 부처님의 법을 스스로 일지언정 한분의 뭐 딱 이분만이 스승이다. 해가지고

그분에게 가서 뭔가 疑問이 있을 때마다 그분에게 묻고 이러지 않았단 말이죠.

언제나 저는 제안에, 제안에 분명히 부처님이 있고 진리가 있고

바깥에 쫓아 다녀서 정말 확연한 그런 스승이 있다 할지라도, 있다 할지라도

찾았던 순간에도 그분에게 찾아가지 않았단 말이죠. 찾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찾아 가봐야 우리는 어떤 妄想에 빠져 있냐면 부처가 있으면 부처에게 찾아가면

내 問題가 解決될거야. 이런 錯覺에 빠져 있어요.

 

부처는 나를 깨닫게 해줄거야.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열여야 될 문제이기 때문에 그래요.

 

많은 분이 질문을 하세요. 법상스님이 훌륭하다고해서 제가 법문을 들으러 오는데 법문 들을 때 좋긴 좋은데

인생이 확 뒤바뀌지 않는데, 아니니까 별로 안 유명한 거 아닙니까? 내지는 법문 들어봐야 별 소용없는 거 아닙니까?

부처님 법문도 별 도움 되지 않는 거 아닙니까? 아니면 호국사에서 이년동안 내가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내 인생이 확 뒤바뀌지 않았습니다. 불교 이거 뭐 시시한 거 아닙니까? 이렇게 얘기 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죠.

 

시간이 필요한 겁니다. 法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우리가 억겁동안, 억겁동안 業을 쌓아 놓고 2년만에

그냥 탁 끝내 버리겠다하는 것은 欲心 아니겠습니까? 欲心이죠.

어떻게 그 法을 우리가 한번에 확 習得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부터도 이 알량한 그 쬐금의 공부를 하는데 數十年이 걸렸는데,

 

일,이년 법문 듣고 강의 듣고 나서 확 바뀌겠다. 이건 욕심입니다.

마음속에 세세생생 공부하겠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여유있게 공부를 해야지 오히려 더 잘되고

그렇게 공부 안되는데 조금씩 되어가는 시간들, 되어가지만 그래도 아직 부족한 시간들 그런 시간들이

우리에게는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그러세요. 지금부터 뭔가 고민이 있을 때, 내안에 탁 맡겨 놓고,

자식에게 있으면 자식에게 탁 맡겨놔 주세요.왜냐하면? 불교공부 안 하는 자식도 그 자식안엔 부처가 있습니다.

그 부처를 언제나 쓰고 살아요. 언제나 쓰고 살아요.

 

여러분도 지금까지 인생에서 언제나 부처를 쓰고 살았지, 부처를 쓰고 살았습니다.

결정적인 결정을 딱 내렸잖아요? 예를들어 여러분이 지금 선택한 남편, 여러분이 선택한 자식,

부처가 결정한 거예요. 내가 알음알이 知識으로 결정한 남편이 아닙니다.그 남편은 내 인연이예요. 인연,

그 인연이기 때문에 그 남편이 나에게 온겁니다.

그런데 그 때는 막막한 생각밖에 없었지 부처가 결정했겠습니까 그순간에,

결정하는 그순간에 결정하겠다 하는 그 순간에는 부처가 한 줄을 몰랐단 말이예요.

우리는 생각이 하는 줄 알았겠죠. 그러나 딱 인연처를 결국에는 딱 선정한다니까요.

그 말이 뭐냐하면? 지나고 나면 이미 부처가 모든 일을 이끌고 왔슴을 알게됩니다.

 

그런데 다만 그때 그때 우리가 妄想 피우느라 더 많이 괴로웠고 더 많이 더 즐거웠고 온갖 즐거움과 괴로움의

妄想들이 있었을 뿐이지. 이 괴로움과 즐거움의 망상만 싹 걷어내면 언제나 있어야 될 일이 있습니다.그러니까

우리가 망상을 피워서 즐거워 하든 괴로워 하든 상관없이 언제나 如如한 일이 우리 人生에 일어날 뿐이예요.

 

그러니까 자식도 다섯살 여섯살 중학생 고등학생 자식을 그 자식이 부처다 생각하고 그 자식에게 맡겨야 됩니다.

부모가 자식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본인이 본인의 삶을 결정하게 만들어 주면, 부처가 결정한다니까요.

단 그걸 결정하는데 본인이 고민 고민 되겠죠. 본인 스스로 자신의 삶을 고민 고민 해서 결정할 수 있는 결정권을

줘야 되요. 主人意識을 줘야 됩니다. 그런 아이들은요. 초 중등학교 때 주인의식을 연습한 아이들은요.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본인 스스로 공부합니다. 부모가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그런데 어릴 때 부터 다 공부시켜주고 선생님 옆에 붙여주고 막 주입해주고 이렇게 되면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공부에 대해서 기분이 확 마음이 확 멀어져요.그러니까 공부 안하는 친구들 얼마나 많습니까? 고등학교 돼가지고, 공부에 대해서 확 떨어진 친구들이 많아요.

 

신기하게 고2 고3 때 되가지고 뒤늦게 발동걸려 공부하는 친구들 많습니다.

심지어 대학교 때 발동이 걸려가지고 지방대에서 미리미리 공부하다가 대학교 3,4학년때 갑자기 공부에 재미

붙어가지고 대학원을 서울에 와서 석사, 박사 따고 교수가 되는 친구도 봤다니까요. 그런 친구도 있습니다.

 

그래서 본인 안에 있는 부처를 본인 스스로 일깨울 수 있도록 우리 부모님들이 스스로에게 결정권을 줘야됩니다.

그 결정을 존중해주고 그것은 그 아이 生覺의 次元에서 그 아이가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 根源의 次元에서

그 아이가 결정합니다. 언제나 근원의 차원에서 결정한다니까요. 그걸 가지고 좋은지 나쁜지 막 分別을 하겠죠?

分別은 衆生의 次元이니까 決定은 부처가 한다니까요. 좋든 나쁜든 決定 그건 부처가 하는 겁니다. 이게 核心이예요.

 

그러니까 제가 많은 분들이 질문을 할 때 옛날에는 대개 심각했어요.대개 심각하게 이걸 풀어 드려야 되겠구나.

막 사명감을 가지고 막 풀어 드려야지 생각을 했는데 그 생각이 드는 겁니다. 야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

法을 說하지 않으려고 한 理由가 이런 비슷한 거 아니겠나, 이미 自己 안에 答이 있고 本人은 내가 뭔 얘기를 해줘도

自己 안에 分明한 答으로 選擇을 할겁니다. 분명히

 

다만 막막한 시간을 보내기 싫은거예요 본인은, 그러니까 速戰速決로 스님에게 가서 答을 빨리 냈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 하는 겁니다. 결국은 자기 안에 답이 다 있는데, 물론 스님의 그것도 필요로 하죠. 필요로 하죠.

그러나 그거에 너무 목맬 필요는 없다 말이죠.

 

그러니까 답을 해 줄 때는 요즘에는 가볍게 가볍게 해줍니다. 심각하게 얘기 안해주고

어차피 결국에는 자기안에서 답을 찾을 거니까, 제가 심각하게 막 내 일인 것처럼 너무 열심히 해줬는데

이분이 결국에는 내가 얘기 한대로 안하고 딴 거를 해가지고 딴 거를 하고 계시더라구요.

그러가지고 그다음에 또? 그러시더라구요. 제가 분명히 그거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다시말해서 이상한 삿된 도에 빠져가지고 자꾸 그 쪽으로 가는 거예요.

하지마라 하지마라 그랬는데 계속 하시길래 마지막에 그 얘기를 했어요.

저하고의 친소관계 상관없이 제가 이제 제가 말씀드린대로 안하면 저는 그 다음부터 보살님

제가, 뭐 어차피 책임될 수는 없지만 결정을 본인이 하면 본인이 책임을 지세요.

저한테 와서 어쩌고 뭐라고 하지 마세요. 매정하게 까지 얘기를 했다니까요.

 

그런데 결국에 가서 아무리 걱정이 돼서 열변을 토하면서 얘기를 해줘도 갈 사람은 가더라구요.

가가지고 거기서 돌고 돌고 돌아서 뒤늦게 한 십년 지나가지고 다시 이길로 오더라니까요.

제가 그때 깨달았습니다. 내가 아무리 열변을 토하고 얘기를 해준들 아니 가볍게 얘기 해준들

어차피 本人의 因緣따라 가게 되어 있구나. 本人의 부처의 길을 가구나.

그런데 그게 나쁜거냐? 옛날에는 나쁜 줄 알았는데 나쁜 줄 아니까 미친듯이 집착해서 가르쳐 주려고 하죠 法을,

그런데 이제 그게 그 것 또한 法이구나 라는 거를 안다 말이예요.

그 사람은 돌고 돌아가지고 와야 될 필요성이 있었던 겁니다. 그 사람의 인생 스케줄서에는...

 

外道도 미친듯이 나쁜 거다 하는 생각은 안들어요. 그것 또한 하나의 佛法이지.

외도로 통해서 이 길로 다시 들어 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면 그것도 뭐 어쩔 수 없는 게 아니겠나.

물론 직바로 오면 더 좋지만, 그러니까 이 佛法은 어찌보면 지름길로 오는 겁니다. 지름길로...

어차피 돌고 돌아서 오긴 오는데 돌고 돌아서 돈 버리고 마음 버리고 황폐해지고 이러고 올 필요가 없잖습니까?

 

그래서 自己 안에 있는 自性法門을 깨달을 수 있는 自性法門을 어떻게 내가 이 法을 내안에서 내 삶에서 구현하면서 살지. 이미 具現하고 살고 있어요. 우리는... 그것을 공부하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그 다음 自性佛道誓願成,  내안에 불도가 이미 이루어져 있어요. 불도 이거 닦는 게 아닙니다.

불도는 닦는 게 아니예요. 닦을 필요가 없어요. 이미 부처인데...

여러분 사자새끼라는 표현을 써요 이제 사자새끼, 衆生을 사자새끼라고 그래요.

부처는 사자라고 그러고, 사자새끼가 사자가 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0秒죠. 시간이 안 걸리잖아요? 사자새끼는 이미 사자이니까...

그런데 사자새끼가 사자가 되려고 미친듯이 노력하는 거예요.

중생이 이미 부처인데 부처가 되려고 수행하는 거는, 사자새끼가 이미 사자인데 사자가 되려고 미친듯이 노력하는

거와 똑같단 말이예요. 이미 사자인데, 다만 새끼들은 큰 사자가 되기 전에는 뭔가 조금 어설픈 거는 있겠죠.

그러나 사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자리에서 이미 부처이고 이미 法은 佛道는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도를 따로 이루어야 되는 게 불교의 목적이 아니고, 삿된 망상만 제거하는 게 목적입니다.

이게 破邪顯正이란 말입니다. 바른 것을 드러내려면 顯正, 바른 것을 드러내려면 眞理를 드러내려면,

眞理를 찾아 가는 게 아니고 破邪 삿된 것를 破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불교 공부는 삿된 거를 파하는 공부, 즉 妄想과 煩惱를 破하는 工夫지,

좋은 거를 찾아 가는 工夫가 아닙니다. 깨달음을 찾아 가는 공부가 아니란 말이죠.

깨달음은 이미 내 안에 있으니까, 망상 때문에 깨달음을 가리고 있는 거니까,

깨달음은 안 보고 있고 妄想을 보고 있는 거니까 아까 제가 말하듯이 고릴라를 안보고 그 공만 보고 있는 거예요.

고릴라를 봐야 되는데, 그 공만 보는 사람은 고릴라가 분명히 왔다 갔다 하는데도 못보는 겁니다.

우리가 그것과 똑같습니다.

 

이게(죽비를 드시며) 부처예요 부처, 그런데 여러분은 죽비로 보지 않습니까?

죽비, 볼펜, 컵, 나, 부처님, 연등, 나무 전부다 똑같은 부처다.

 

비유를 들면 이와 같습니다. 제가 옛날에 중학교 땐가 어떤 철학 관련된 책을 하나 읽었는데,

그 책에 그런게 나와 있던 기억이 있어요. 색깔이라는 거는 본래 없다. 모양이라는 것도 본래 없다.

색깔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착각이다. 그러면서 거기서 뭐라고 나왔느냐면?

 

완전히 깜깜한 어둠속에 빛이 하나도 없는 깜깜한 어둠속에 들어가서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다 펼쳐봐라. 그게 빨간색이라고 알 수 있는냐?

파란색이라고 알 수 있느냐? 눈을 갖다 바로 앞에 드려다 봐도 그건 빨간색인지 파란색인지 알 수가 없고

그냥 검을 뿐이다. 그거는 색깔이라는 거는 없다는 거지요

색깔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빛이 필요하다. 빛이 있어야지만 색깔이 있는거다.

그러니까 이건 색깔이 진짜 있는 게 아니라, 빛을 因緣으로 색깔이라는 幻像이 보일 뿐이다.

빛을 인연으로 색깔이라는 환상이 보일 뿐이다.

 

우리도 색깔을 빨간색으로 보기도 하지만 색맹인 사람은 다른 색으로도 보기도 하고,

짐승들은 또 다른 색으로 보기도 하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같은 색인데도 다르게 보일 수 있단 말이죠. 색안경을 낀 것처럼

 

여러분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모든 것은요 나무가 아니고 풀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고 컵이 아닙니다.

빛을 보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뭔가를 보고 있을 때는 빛을 보고 있는 거지

이 죽비를 보고 있는 게 아닙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볼 수 없으니까.

색깔도 모양도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잖아요? 빛이 없으면

그러니까 우리는 죽비를 보면서도 빛을 確認하는 거고, 볼펜을 보면서도 빛을 확인하는 거고,

이 가사장삼을 보면서 빛을 확인하는 거지, 이 가사장삼을 보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빛을 봐라하고 딱 짚어주는 게 直指人心인데, 그러니까 道가 무엇입니까?

뜰앞에 잣나무라고도 하고 볼펜이라고도 할 수 있고 마삼근이라고도 할 수 있고 뭐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눈에 보이는 바로바로 짚어 주면 그게 바로 直指人心하는 거예요.

人心을 짚어 준다는 게 마음을 짚어준다는 말이고. 마음이라는 게 道입니다. 깨달음입니다.

 

道를 바로 짚어주죠. 빛이 무엇입니까? 하면 이게 빛이지, 이게 빛이지 이렇게 보여준다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빛을 안보고 볼펜을 본다 말이예요. 모든 것은 모습이 다 다르지만 빛이라는 거는

한바탕으로 같단 말이죠. 변함없는 하나잖아요? 변함없는 한바탕 그게 바로 道란 말이죠.

그걸 우리는 妄想 때문에 道를 보지를 못하고, 깨달음을 보지를 못하고, 불도를 보지를 못하고,

虛妄한  妄想 煩惱를 보고 있다. 이미 道는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自己 안에 自性의 佛道를 이루는 것, 自性의 佛道를 確認하는 것, 그것이 自性佛道誓願成이다.

그래서 이 사홍서원 자성안에 있는 사홍서원을 이루는 것, 이게 부처님 가르침의 核心입니다.

 

이건 뭐 가벼운거니까, 원이발원이(願已發願已) 귀명례삼보(歸命禮三寶)

願已 하면 已가 이미 이자입니다. 원이하면 원을 마치고 발원이 발원을 마치고

귀명례삼보 돌아가서 목숨 바쳐 삼보님께 예를 올립니다.

 

나무상주시방불(南無常住十方佛)

나무상주시방법(南無常住十方法)

나무상주시방승(南無常住十方僧)

 

나무는 귀의합니다라고 그랬죠. 귀의합니다.

상주 항상 머물러 계시는 시방 세계의 모든 부처님께 시방은 뭐 모든 방위를 얘기하죠.

이 우주 전체에 부처님이 가득 계시는 겁니다. 항상 상주하고 계신다 말이예요.

상주 어느 곳에도 안 계시는 곳이 없단 말이죠. 그럼 부처님께 귀의하겠다. 돌아가 의지하겠다. 돌아가겠다.

본래 내가 부처이니까, 거기로 다시 돌아가겠다. 그겁니다.

 

나무상주시방법

상주, 항상 없는 곳이 없어요. 시방에, 어떤 곳에도, 누구 마음속에도, 법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나무상주시방법에 돌아가 의지하겠다.

 

나무상주시방승

승이라는 어떤 이 수행, 공부, 마음공부, 이 본래의 어떤 체험,

본래의 깨달음을 그리워하는 뭔가가 우리안에 있습니다.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관성이 있다 말이예요. 관성이, 되돌아 가고자 하는 관성이

누구나 여러분 고향에 사는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 합니까? 안 그리워 하는데,

 

타향살이를 오래 한 사람은 왠지 모르게, 나도 모를 왠지 고향에 돌아가야 되겠다라는

막막한 어떤 그 심성이 있어요. 나중에 늙으면 고향가 살아야지 한다 말이죠.

그것과 비슷하게 사람 마음은 누구나 본래의 고향, 부처라고 하는 본래의 고향으로

왠지 모르게 되돌아 가고자 하는 그러한 어떤 심성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 마음이 승이예요. 승...

 

즉 우리가 스님만 스님이 아니라, 스님만 깨달음을 얻겠다라고 그리로 가겠다라고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나 마음속에는 본래 완전한 깨달음, 본래 완전한 행복,

본래 완전한 그 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알 수 없는 이걸 행복이라는 표현을 쓰든,

평화라고 하든, 깨달음이라고 하든, 하느님이라고 하든, 그 알 수 없는 뭔가 말로 표현되지 않는

그 근원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들이 누구에게나 있단 말이죠. 그게 自性佛 僧입니다. 僧,

그래서 시방세계 어디에나 상주하고 있는 상주시방승에게 돌아가 의지하겠다 하는 이런 삼보에

귀의하겠다하는 마음,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가 시작과 끝에 보면 항상 삼귀의를 하는 이유가,

내가 본래 부처로 가겠다. 본래 법을 내가 체득하겠고, 본래 승을 드러내서 부처로 하나 되게 하겠다.

본래 불법승 삼보는 하나잖습니까? 동체 삼보라 하는데,

 

本來 내 根源의 特性인 이 三寶자리로 내가 가겠다. 이것을 내가 確認해보겠다.

내 인생의 목적은 다른 게 아니다. 이 자리로 가겠다. 이 자리를 확인하는 것만이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는

굳건한 이런 발심이 있어야 된다 말이예요. 이걸 歸依라고 그럽니다. 歸依...

 

歸依 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는데, 이 歸依 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 어떤 두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고

초기불교 경전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야기예요.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고

우리는 언제나 그 길을 향해 가게 됩니다.

 

다시말해서 우리가 여기가 귀의의 종점이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면

계속해서 거기로 가는 원동력이 되는 게 삼귀의입니다. 삼귀의

다시말해서 여러분 저 높이뛰기 선수가 장대가 있으면 거기 목표가 있으니까 거기 넘어가려고 높이 뛰는데

장대가 없이 그냥 한번 힘껏 뛰어봐 그러면 아무래도 적게 뛰거든요.

 

그런데 귀의삼보라고 하는 목적지가 딱 設定되어 있으면, 그 길을 향해서 우리도 나도 모르게 가게 되고

우주법계가 우리를 그 길로 끌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귀의삼보하는 사람은 퇴전하지 않아요.

우리법계가 나를 끌어주니까,

 

얼마전에 누가 물어보던데, 인간이 짐승으로 윤회합니까? 어지간해서 인간이 짐승으로 윤회하기는 힘들다.

특히나 發心하거나 歸依三寶한 사람들 佛法에 因緣 맺은 사람은 거의 뭐 백퍼센트 가까이 짐승으로 퇴전하는 거는

힘듭니다. 힘들어, 더 나아질 수가 있을 뿐이지.

 

우리의 어떤 歸依 旅程은 盛熟하고 進化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旅程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지금보다 더 나아지니까, 지금보다 나아지니까,

물론 잠깐 주춤할 수는 있겠죠. 왜? 그 정체를 통해서 깨닫게 하기 위해서 겉으로 봐서는 주춤하는 것 같지만

진실에 봐서는 그게 나아지는 거니까,  그런 경우는 있을 수 있단 말이죠.

 

이렇게 해서 우리가 삼귀의 삼보님께 귀의하겠다라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언제나 부처님의 그 자리로 본래자리로 되돌아가서 회귀하고 있는 중에 있다.

이런 사실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랜시간 동안 천수경 강의를 마치도록 이렇게 하겠습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