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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습의 자동반응과 새로운 삶

장백산-1 2014. 11. 19. 01:46

 

 

 

 

14. 05. 20 - 업습의 자동반응과 새로운 삶 |불교방송 다시듣기

 

업습의 자동반응과 새로운 삶

 

우리가 말 生覺 行動으로 한 번 行爲에 옮긴 것은 한 번의 經驗이 되어 잠재의식에 기억되고, 그런 行爲가 반복되면 習慣이 되어 우리 잠재의식에 업습(業習)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 다음에 그 경험과 비슷한 상황이 오면 그 때는

自動反射的으로 無意識的으로 저절로 業習에 따라서, 習慣에 따라서 그 상황에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즉 과거에 경험하고 행위한 방식대로 습관적으로, 자동반사적으로 반응하는 일들이 우리

삶의 대부분을 이룬다. 항상 의식이 깨어있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저절로 과거 경험의

影響을 받는 것이다.

 

집에서 시간이 날 때 TV를 자주 보던 사람은 나중에는 意圖하지 않았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TV를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習慣的으로 리모컨을 손에 쥐고 사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책을 보던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習慣的으로 책을 보고 있는 자신을 자주 발견한다.

 

밤에 야식을 먹는 것도 하나의 習慣이고, 담배를 피우는 것도, 밥 먹을 때 술을 한 잔씩 마시는 것도 習慣이다.

나중에는 정말 먹고 싶지 않더라도, 특별히 술을 마실 이유가 없더라도, 그냥 저절로 자동반사적으로 밤만 되면

먹을 거리를 찾거나, 담배나 술을 찾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언제 담배에 불을 붙였는지도 잊은 채,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담배가 입에 물려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過去의 낡은 習慣은 지나간 과거 경험 정보에 대한 記憶의 잔재이며, 과거의 낡은 행위의 패턴으로

전혀 새로운 '지금 여기'라는 생생한 현재를 진부한 것으로 뒤바꿔 놓는다. 지금 이 瞬間 우리는 과거의 패턴과

동일하게 행위할 필요가 전혀 없다. 똑같이 집에서 쉬는 시간이 주어질 때 왜 늘 하던대로 TV를 켜야만 하는가.

왜 음식을 보면 자동반사적으로 술을 마셔야 하는가. 오늘의 현재에는 과거의 패턴과눈 전혀 다른 패턴으로

지금 이 瞬間을  經驗하고 전혀 새로운 체험으로 바꿀 수도 있다.

 

지금 이 習慣은, 過去에, 그 때의 生覺과 意圖를 가지고 있을 때 만들어 진 과거의 경험 패턴일 뿐이다.

지금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현재이고, 그 때와는 다른 生覺과 다른 삶의 目標와 전혀 다른 삶이 새롭게

우리 앞에 놓여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연히 대응방식도 새롭게 달라져야 한다.

 

業習대로 自動反射的으로 對應하게 되어, 매일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움으로써 肝癌이 왔다고 生覺해 보라.

그 사람은 간암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過去의 낡은 思考패턴에 사로잡혀 도저히 담배와 술을 끊을 수 없다.

지금 이제는 過去의 健康했던 狀況이 아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도 되는 상황은 지나가고, 이제 전혀

다른 現在가 내 앞에 놓여있다. 그렇다면 마땅히 思考方式을 바꾸어야 하지만, 業習에 얽매이고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좀처럼 그 業習을 떨쳐내기가 어렵다.

 

아인슈타인은 '문제를 만들어낸 思考水準에 머물러서는 그 문제를 풀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業習이란 問題를 만들어낸 때의 思考水準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새로운 삶이라는 無限한 可能性의 現在를

생생하게 살아가고자 願한다면 過去의 業習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내 안에서 잠재의식에서 이러한 상황에서는

이렇게 반응해야하는 나의 業習이 있음을 먼저 直視해야 한다.

 

같은 狀況 속에서 우리는 늘 같은 決定을 하고, 같은 反應을 함으로써, 전혀 다른 새로운 現在의 經驗을

過去에 이미 經驗해서 다 안다고 여기는 마음으로 過去의 經驗 情報의 記憶속에 가두어 둔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깨달음의 가능성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학교에서 늘 뒷자리에만 앉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콘서트 장에서도, 강연장에서도, 늘 뒷자리 신세를 면치 못한다. 자동 반사적으로 뒷자리를 찾는 것이다.

 

業習이라는 自動反射的 反應에서 벗어나 놓여나려면, 먼저 每 瞬間이라는 現實에 내가 어떻게 習慣的으로 反應하는지를 지켜보고 觀察하며 알아차려야 한다. 알아차린 뒤에는 또 다른 選擇의 可能性, 反應의 可能性이 있음을 살펴

보고, 그 무한한 가능성에 마음을 활짝 열어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習慣的인 것인지를 알게 되면, 꼭 그렇게 자동반응만 할 필요가 없으며, 그러한 자동반응은 단지 過去의

意識水準에서 만들어진 것일 뿐, 지금은 전혀 다른 可能性과 다른 反應을 선택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冥想을 시작할 때, 基礎作業으로, 習慣 바꾸기 작업을 해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되곤 한다.

평소 절대 안 하던 것을 한번쯤 도전해 보고, 안 보던 책들도 살펴 보고, 내성적인 사람이 외향적인 행동도 해 보고, 늘상 가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도 다녀 보고, 매일 만나는 사람만이 아닌 전혀 새로운 사람과도 만나 보는 것이다.

이렇게 業習을 깨다보면, 過去의 意識水準에 얽매이고 사로잡혀 있던 마음이 활짝 열리면서 또 다른 새로운 삶의

無限한 可能性에 눈을 뜨게 된다.

 

학창시절 싫어하던 친구를 절대 안 만나려고 하던 習慣的 反應을 내려놓고, 학창시절 모임에 나갔다가 몰라보게

變한 친구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도 있고, 그 자리에서 만난 친구에게 놀라운 사업 아이템을 제안받을 수도 있다.

늘상 하던 일만 하고, 해오던 習慣 대로만 했을 때는 절대 만날 수 없었던, 절대 깨달을 수 없었던 수많은 새로운

삶의 가능성들이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

 

실제 연세드신 어르신들이 새로운 삶의 變化가 잘 찾아오지 않는 이유는, 늙어서 그런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삶에

대해 業習에 얽매여 자동반응만을 보일 뿐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해 보지 않고, 마음을 열지 못하기 때문이다. 業習을 뛰어넘어 새로운 삶에 마음을 활짝 열게 되면 나이가 들어서도 전혀 새로운 가능성의 삶을 눈부시게 살아갈 수 있다.

 

내가 히말라야에서 만난 70대 어르신의 도전이나, 얼마 전 책을 읽다가 갑자기 홀로 배낭여행을 떠난 정년퇴임 후

10년도 넘은 70이 넘은 할아버지의 도전을 보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의 매 순간의 삶을 가만히 관찰해 보라. 내가 얼마나 業習에 매여 있는가, 얼마나 자동반사적 반응에 익숙해져 있는가. 얼마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꺼려하고 머뭇거리는가. 늘 하던대로 할 뿐 變化를 두려워하지는 않는가를.

 

諸行無常이라는 理致대로 變化야 말로 이 宇宙의 理致이기 때문에, 變化하는 世上에서 나 혼자 變化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깨달음과 성장을 향해 마음을 걸어 닫는 것과 같다. 變化하는 力動性이야말로 宇宙의 眞理이기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고, 새롭게 반응하며, 과거의 낡은 생각의 틀을 늘 깨고 새롭고 눈부신 마음의 눈으로 늘 새로운 삶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날 때 난생 처음 맞이하는 새벽인 것처럼, 처음으로 느끼는 아침 햇살인 것처럼, 햇살의 따스함을 느끼게 될 수 도 있는 것이다. 매 순간순간 현실에 대응하는 나의 자동반응을 살펴보고, 이것이 業習에 의한 자동반응임이

밝혀질 때 잠깐 멈춘 뒤 어떤 새로운 可能性이 있을 수 있는지를 살펴 보라.

 

無條件 새로운 選擇만이 좋다는 말이 아니라, 새로운 可能性에 마음을 활짝 열 수 있는 열린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그 때, 우리 의식의 깨어남은 빨라진다. 의식이 더 빨리 성장하고, 성숙하며, 과거 의식수준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새로운 變化에 도전하게 되며, 하루하루라는, 매 순간순간이라는 現實이 얼마나 놀라운 無限한 可能性의

삶이라는 神秘인지를 깨닫게 된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07:50~08:00)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