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릉록 3. 기틀을 쉬고 견해를 잊음 완릉록 보설편
◈ 완릉록 3. 기틀을 쉬고 견해를 잊음 "성인의 無心은 곧 부처의 경지이지만, 범부의 無心은 空寂한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까?" "法에는 凡, 聖의 區別이 없으며 또한 空寂한 상태에 빠지는 것도 없다. 法이 本來 있는 것이 아니지만, 없다는 견해도 내지를 말라. 또한 法은 本來 없지 않으나, 있다는 견해도 내지 말라. 法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은 모두 뜻[情]으로 헤아리는 견해로서, 마치 허깨비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보고 듣는 것은 마치 허깨비같고, 思量하고 느끼는 것이 바로 衆生心이니라'고 하였다. 조사문중에 있어서는 오로지 마음을 쉬고 알음알이를 잊는 것을 논할 뿐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쉬어 버리면 부처님의 道가 융성해지고, 分別하면 마구니의 장난이 치성해지느니라."
********원오당 한소리******** ["성인의 무심은 곧 부처의 경지이지만, 범부의 무심은 공적한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까?" "법에는 범, 성의 구별이 없으며 또한 공적한 상태에 빠지는 것도 없다.] 배휴가 몰라서 뭍는 것일까 아니면 후인을 위해서 이런 질문을 할까? 오직 이 글은 다 후인을 견책하기 위하여 구성되였기 때문에
이런 수도인의 지남이 되고자 하고 있는 물음일 것이다. 무심이 곧 부처라고 하니 마음이 없는 경지를 일러 불지라면
범부의 입장에서 보면은 아무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분별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었어
아주 단멸적 적멸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냐고 뭍고 있다.
잘 물어 주었다. 많은 공부인들이 無心에 들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空에 떨어져 아주 寂滅이 되어 버리면 내가 살았는지 죽은 것인지 모를 것이니
이것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 일 것이라는 그 두려움이 바로 無心에 들수 없는 根本 原因이 되는 것이다.
納僧도 많은 工夫人을 이끌어 보았으나 이 無心에는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 虛空같은 백척간두에서 진일보(進一步)하라고 하면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삼매에 들면 내가 다시 깨어나지 못하면 어쩌냐고 하면서 그곳은 가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많은 지견을 찾고 또 다른 선지식을 찾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들의 錯覺일 것이다. 無心이라고 하니 아주 마음이 없어지는 것으로 안다면 이것이야 말로 천리 만리로 벌어지는 것이다. 무심(無心)이란 形相에 이끌리거나 執着하지 않고 差別的 境界를 만들어 내지 않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지 마음이 아주 없는 것으로 한 生覺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마음이 또렸하고 더욱 鮮明하여 밝고 智慧로워 져 있다. 이것은 마음은 恒住不變하여 그 언제나 없어지지 않는 것이며
그렇다고 이것이다 할 것은 없지만 그대로 完全하게 存在性을 드러 내고 있다. 萬相을 다 비추이고 萬法을 다 쓰고 펼친다. 누리고 펼치고 自由自在로 如脫自在하여 取하고 버림또한 自由自在하다. 그래서 이름하여 觀自在 菩薩이라고 칭한 것이다. 마음의 作用이나 報身의 相을 다 드러낼 수도 쓸어버릴 수도 있지만
단 집착하거나 물들지도 않고 어디에도 훈습되지 않으며 生覺의 굴림을 하지 않아 있는 그대로를 보고 듣고 다 하면서도 거기를 벗어나 있음으로 무(無)자를 붙여서 無心이라고 할뿐 有心이 그대로 無心이고 무심(無心)이 그대로 유심(有心)인 것이다. 오직 한 마음인 것이다.
[法이 本來 있는 것이 아니지만, 없다는 見解도 내지를 말라. 또한 法은 本來 없지 않으나, 있다는 見解도 내지 말라. 法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은 모두 뜻[情]으로 헤아리는 見解로서, 마치 허깨비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보고 듣는 것은 마치 허깨비같고, 思量하고 느끼는 것이 바로 중생이니라'고 하였다.]
法이라고 할때 法은 無爲法과 有爲法를 統稱하여 말한다. 그러니 無爲法에서 보면 法이 있는 것이 아닐 것이고 또 有爲法에서 보면 實로 마음의 用이 全部 그대로 法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오직 作用면에서 보느냐 體에서 보느냐만 다를뿐 만들면 法이고 버리며 法이 아니다. 그러니 있다거나 없다는 見解을 내지 말라는 것이다. 見解를 내면 見解는 또다른 觀念을 부르고 그 觀念은 잘못과 바름이 있어지고
잘못이 있으면 바로 罪가 있어지고 罪가 있어지면 괴롭고 고통이 따라오게 된다. 그럼으로 이 모두 무유정법(無有定法)인 것이다. 諸法은 마음의 作用를 統稱하여 하는 것이니 이것은 다 方便法이며 因緣造作에 依한 法이므로
固定된 實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法이 아니다라고 할뿐 세우면 세우는대로 法이되는 것이다. 그러니 有爲的 法을 쓰는 것을 情이라고 하시면서 이 情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衆生이라고 하신다.
[조사문중에 있어서는 오로지 마음을 쉬고 알음알이를 잊는 것을 논할 뿐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쉬어 버리면
부처님의 도가 융성해지고, 분별하면 마구니의 장난이 치성해지느니라."]
그래서 스님은 조사문중이라고 하신 것은 조사선을 말하는 것으로 달마대사로 부터 전해온 원래부터 있는 그대로의 本佛인 마음을 밝히는 것을 할 뿐 마음의 지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卽 지금은 다 因緣所生임으로 이것은 다시 因緣이 다하면 사라져 버리는 虛妄한 것임으로 그 固定된 實相이 없는 것임으로 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줄이고 오직 마음을 쉬고 또 쉬어서
識心의 境界인 見聞覺知인 알음알이를 잊는 것을 논할 뿐이라고 하시면서
마음이 쉬면 부처님의 도가 융성해 지고, 분별하면 마구니의 장난이 치성해지느니라 이 말씀은
오직 마음이라는 그 名色이나 알음알이를 쉬라는 것이니
이것은 마음의 作用과 相이 虛妄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럼으로 本來佛인 本래마음은 이런 알음알이가 다하면 自然히 드러나는 것이지
만들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부처님 道가 치성해 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한 마음을 일으켜 分別하고 差別한다면 이것은 全部 마구니의 장난이라는 알음알이인 識心만 亂舞하여 虛妄한 境界로 떨어지는 것이니 오직 避하고 피해야 하는 것이 바로 分別하는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無心이 道이니 오직 내가 안다는 見解를 내지 말고
내가 어떤 境地에 있다는 差別的 기틀을 쉬는 것이
바로 祖師禪의 修道이며 佛道를 닦는다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본불본락(本佛本樂) 하옵소서! ()()()*** ***화엄동산에서 원오스님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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