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오당 한소리********
["마음이 본래로 부처인데 6도만행을 다시 닦아야 합니까?"
"깨달음은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지 6도만행과는 상관이 없느니라.
6도만행이란 그저 교화의 방편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쪽의 일 일뿐이다.]
심즉불(心卽佛)이라 하는데 마음이 곧 부처이다
그렇게 말을 해도 중생심은 움직이지 않는다.
왜 믿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바로 識心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견문각지(見聞覺知)로 받아들여 스스로 判斷하고 分別하여
이것이다 하여 만들어진 부처의 相이 바로 前面으로 思量分別하여
내가 아는 부처는 그런 부처가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받아들이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그럼 너 스스로 찾아봐라 그래서 나온 方便이 바로 12頭陀行이며 육도 만행이라는 것이다.
自己 스스로 만든 觀念이나 哲學이나 信念이나 宗敎觀이 바로 거부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아집(我集)이며 아상(我相)이며
관념(慣念)들이 다 부정하는 부정심(不定心)이며 의구심(意拘心)인 것이다
이런 자기적 논리로 그 원래 다 方便임을 모르고
부처라면 부처라는 실제가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니 그 존재성을 너 스스로 보아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또 方便으로 생겨나는 것이 바로 등상불(等象佛)인 것이며 사리탑이 登場한다.
그리고 불화인 영산회상도 등 각종 탱화가 등장하고
각종 신장과 수많은 불보살이 도열하게 되였던 것이다.
그렇게 여기 이 화엄회상을 떠나 경전속에 있는 그 불국토를 도상화하여 나열한 것이
지금의 가람의 형태가 되었던 것이며 이것을 절이라 칭하였다.
그래서 그 形相에 依持하여 마음을 일으키게 하고
그 마음을 훈숙시켜 본래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점차적으로 삼아승지를 돌아 부처의 세계로 간다는
方便論이 쓰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굳어져 신앙이 되였고 종교화 되였으며
의식과 율이 자리하여 하나의 불교라는 형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부처님의 모든 法이 바로 마음을 이야기 하고 있음인데
어찌 허망한 형상을 의지하여 마음을 깨칠 수가 있겠는가
부처님의 경전이 아닌 敎外別傳이라는 것이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마음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 것을 일러 선불교(禪佛敎)가 되였든 것이다.
이것은 마음을 깨치고 마음을 傳하여 사자전승의 계통을 밟아
마하 가섭으로 부터 출발하여 28대를 거쳐 동토의 첫 달마대사가 마음을 전하여
혜가.도신. 승찬. 홍인을 거쳐, 六祖 혜능대사에게 전하였으며
이것이 회양선사를 거쳐 마조 도일 스님에게 전하였고
다시 백장스님을 이어 여기 황벽스님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황벽스님은 재가불자인 배휴를 만나
이렇게 마음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 설한 전심법요에 이어 여기 완릉록 역시 배휴가 뭍고 황벽스님이 답한 내용을
배휴가 정리 후대에 전해진 것이니, 당연히 재가불자 즉
아직 마음을 깨치지 못한 범부를 위하여 그 내용이 정리된 것이며,
배휴 자신이 깨달아 가는 과정을 도설하였음으로 마음을 떠난 일반적 불교까지
이렇게 뭍고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것이라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배휴가 뭍는 마음이 부처이면
더는 알 것도, 구할 것도, 바랄 것도, 얻을 것도 없는데
무엇하러 다시 육도 만행을 하느냐고 뭍는다.
그래서 스님은 이렇게 답한다.
다 方便이라고. 왜........! 方便을 베푸느냐?
믿지 않으니까.........!
스스로 體驗해서 確實하게 스스로 아는 方便인 것이다.
12두타행을 해서 아무리 고행을 해봐도 그 마음이 그 마음이지
바뀌거나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라는 方便인 것이다.
[설사 보리, 진여와 실제의 해탈법신과
나아가 10지 4과 등의 성인의 지위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모두가 교화 제도하는 方便의 門일 뿐이어서,
부처님의 마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느니라.
마음이 곧 그대로 부처이니
교화 제도하는 모든 방편문 가운데서 부처님의 마음이 으뜸이니라.
다만 생사, 번뇌 따위의 마음만 없으면 보리 등의 법을 쓸 필요가 없다.]
그래서 스님은 설사 육도만행을 하여 보리니 진여니 해탈법신과 10지 4과 등의
성인의 지위에 도달한다 할지라고 그것은 다 본래마음을 아는 것이지
다 교화 방편임을 스스로 체달하도록 하는 것이지
부처님의 마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신 것은
부처님의 마음이란 바로 본래 우리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얻어지던 구해서 얻어지던 본래 그 마음이지
조작하여 얻어지는 마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지금의 마음에서 생사, 번뇌 따위의 내가 만들고 조작하는 마음만 없으면
지금 그대로의 마음이 바로 본래불(本來佛)인 본래(本來)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보리니 법을 별도로 쓸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래도 믿지 못한다면 더는 어찌 해줄 수가 없다.
수십년 두타행을 해서 알아보던 삼 아승지를 돌아가던
오직 그것은 그대 자신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法은 나의 모든 마음을 제도하시기 위함이로다.
나에게 일체의 마음이 없거니, 어찌 일체법을 쓰리오'라고 하였다.
부처님으로부터 역대 조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른 것은 말하지 않으셨고,
오직 한 마음만을 말했을 뿐이며,
또한 일불승(一佛乘)만을 말하셨을 뿐이다.]
부처님의 경전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
'모든 法은 나의 모든 마음을 제도하시기 위함이로다
나에게 일체의 마음이 없거니 어찌 일체법을 쓰리오' 하고 하신 대목을 들어 설하신다.
原來 마음이라고 하나 法이라고 하나 그것은 같은 것인데,
본래의 마음은 形相도 아니요, 흔적도 없고 虛空같이, 그 어떻한 한 物件도 없는데,
어찌 法인들 있을 것이며. 마음이라고 할 어떤 것이 있겠는가.
그러니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니 그대로의 마음을 쓰고 펼치고 누리면 될 것을
어찌 그 마음을 언설을 빌어 설할 수 있겠느냐고 하신다.
여기서 그대로의 마음이란 바로 法身을 말하고 계신 것이며, 그 법신을 들어
조사들이 서로 서로 사자전승을 한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시고
또 일불승(一佛乘)만을 설하셨다는 것은 부처님이 법화회상에서
菩薩과 聲聞 緣覺과 四果등은 다 方便說이지 실지가 아니라고 밝히셨다.
그러니 무엇이 있는가 '오직 마음인 一佛乘이 있을 뿐이다.' 하시였으니
이것이 바로 一心이며 부처라고 하는 마음의 心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法을 설하는데 一乘法門이라는 것도 일불승(一佛乘)을 설하는 법문인 것이다.
그러니 모든 法門은 다 方便法門이지만
一乘法門만은 오직 부처를 말할뿐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十方을 두루 살펴보아도 다시 다른 승(乘)이 없나니,
지금 여기에 남아 있는 대중들은 곁가지와 잎은 없고
오로지 모두 잘 익은 열매들뿐이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뜻은 쉽게 믿기가 어렵다.
달마스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양(梁), 위(魏) 두 나라에 머물렀는데,
오직 혜가(慧可 : 487-593)스님 한 분만이 자기의 마음을 가만히 믿고
말 끝에 문득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았었다.]
다른 승(乘)이 없다는 것은 마음을 떠나 한法도 세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法門을 듣고 있는 그대들 역시 報身과 化身을 떠나
本體인 法身은 한결같이 그대로라는 것이며, 달마스님이 오셔서 그렇게 많은 구도자를
제접하였으나, 오직 혜가만이 자기 마음을 잘 관하여 가만히 믿고,
달마대사의 말끝에 바로 마음이 부처임을 알았다고 하신다.
[몸과 마음이 모두 함께 없음을 이름하여 큰 道라고 하느니라.
큰 道는 本來로 平等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이 하나의 참 성품으로
같다는 것을 깊이 믿어야 한다.]
몸과 마음이 모두 함께 없음이란
몸이라는 이 나라는 相과 마음이라는 諸法이 원래 없음을 안다면 이라고 하시어
제법무아(諸法無我)를 밝혀 안다면 바로 큰 道라고 하신다.
나라는 것도 실제가 아니며, 法이라는 것도 다 方便인 줄 밝혀 안다면
무엇이 걸리고 막힐 것이 있겠는가 이것은 바로 疑心을 내려 놓는 것이다.
그래서 衆生心은 바로 疑心이라고 누누이 말했다.
부처님의 마음이나 우리의 마음이 조금도 다름이 없음으로 그 마음이 그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원래부터 그대로 였음으로 여여(如如)라 하였고
그 如如에서 왔다고 하여 여래(如來)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제 모든 疑心을 내려놓고 그대로의 本來佛이 바로 지금 이대로의 마음인 줄 안다면,
이것이 바로 아는 마음의 참성품이며 이 성품은 누구나 똑 같기 때문에
平等性智라고 하였으며 이것을 道라고 하였든 것이다.
그래서 스님도 믿으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신다.
[마음과 성품이 본래 다르지 않으므로 성품이 곧 마음이니라.
마음이 성품과 다르지 않은 사람을 일컬어 조사(祖師)라고 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마음의 성품을 알았을 때
비로소 不可思議하다고 말할 수 있도다'라고 하였다."]
그러니 元來 虛空性인 마음의 性稟이 별도로 존재 하는 것이 아니지만
바로 마음이라고 하나 그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의 法身을 말하는 것이니
그 法身이 바로 本來 부처이며,
이것이 불성(佛性)이라는 부처의 성품(性品)인 것이다.
그러니 마음과 성품이 다르지 않고 마음 그대로가 성품이라고 하신다.
부처와 佛性이 같은 것이며, 法과 法性이 같은 것이며,
나와 自性이 다른 것이 아니며, 法界와 眞如가 다르지 않은 것이니,
이것은 다 같은 말이며,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지.
결코 이것을 떠나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性稟을 안다는 것은 이것이 바로 부처의 佛性을 안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성품을 통달한 사람을 조사(祖師)라 한다라고 하신다.
그러니 마음의 성품을 알았을 때라야 비로소 모든 것을 쉬어서 不可思議하다고 하신다.
또 불가사의한다는 말에 떨어지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또 이 말에 떨어지면 천리 만리일 것이다.
부디 本來佛을 믿어 심즉불(心卽佛)을 믿어라.
***본불본락(本佛本樂) 하옵소서! ()()()***
***화엄동산에서 원오스님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