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산림 대법회 제5강 - 1(2010. 7. 6 )
世主妙嚴品-七-1-(7)-나. 偈頌讚歎
一心頂禮 盡十方三世(진시방삼세) 一切諸佛(일체제불)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尊法(일체존법)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賢聖僧(일체현성승)
我弟子等(아제자등) 講論三藏(강론삼장) 唯願三寶(유원삼보)
爲作證明(위작증명)
南無本師釋迦牟尼佛(나무본사석가모니불)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無上甚深微妙法(무상심심미묘법) 百千萬劫難遭隅(백천만겁난조우)
我今聞見得受持(아금문견득수지) 願解如來眞實意(원해여래진실의)
그동안 여기 문수경전연구회에서 법화경공부를 하고, 그 다음 임제록공부를 했는데 오늘 나눠드린 임제록 대강좌 C D는 바로 화엄경 직전에 임제록 강의를 여기서 스님들을 대상으로 한 그 내용을 mp3용으로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내신 그 회비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염화실이라고 하는 매달 나가는 우리 공부한 것을 정리한 이것도 역시 우리 스님들이내신 그 회비에서 이렇게 다 만든 것입니다. 여기서 한번 듣지만, 돌아가셔서 또 이것을 가지고 복습하고 하면 훨씬 익숙해지실 겁니다. 그리고 아시겠습니다만, 염화실이라고 하는 다음 카페에서 우리 공부한 이 모든 동영상을 다 올려놨습니다. 그것을 또 올리자마자 다 바로 녹취를 해서 올리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글로도 읽을 수가 있고, 강의한 이 내용을 그대로 또 다시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아주 편안한 시간에 편안한 장소에서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도록 되어있으니까 스님은 뭡니까? 세속인 보다 한 걸음 앞서가는 사람. 중 僧자가 사람 人변에 일찍 曾자 아닙니까? 그것이 세상사람 보다 한 걸음 앞서가는 사람이라는 뜻이, 스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인터넷 못한다. 컴퓨터 못한다. 하는 말은 그것은 각자의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이 시대에서는 결코 자랑이아닙니다. 그러니까 인터넷도 하시고, 컴퓨터도 하시고 해서... 목탁치기보다 훨씬 쉽습니다. 못하시는 분들은 꼭 배워서 제 강의 뿐만이 아니고,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스님들의 설법과 글과 설법과 경전과 이런 모든 것들이 그 속에 다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그래 세상이 얼마나 편리한 세상입니까? 21세기에 들어와서 최대의 발명품이 인터넷이라고 합니다. 인류사에 있어서 그런 아주 최첨단 발명품을 이 시대에 우리가 같이 살면서 그것을 수용하고 활용하고 하는 것도 이 시대에 사는 사람으로서의 바람직한 모습이다. 이렇게 봅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회에 화엄경공부도 거기서 듣지만, 그 외의 수많은 정보를 방에 앉아서 접할 수가 있고, 또 따라서 다른 어떤 편리한 이점도 많이 활용 할 수 있으니까, 그저 한글로 염화실만 쳐도 그냥 다음 카페 우리 염화실이 뜹니다. 또 문을 막아놓지 않아서 아무 조건 없이 누구나 들을 수 있고 퍼갈 수 있고 복사할 수 있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손님으로 와서도 들을 수가 있는 그런 기회를 만들어 놨습니다.
아까 어떤 스님이 오셔서 그 안에 있는 강의는 싹 다 들었다고 하기에 얼마나 반가웠는지 저는 공을 제일 많이 들이는 것이 염화실 카페입니다. 여기서 강의하는 것이 여러 스님들에게 이 시간에 또 이렇게 이야기가 되지만, 그것을 올려놓으면 300명 400명 내지 그것을 퍼가서 다른 카페에 올려놓으면 거기서 또 보고 또 보고해서 몇 천 명이 듣는지 몇 만 명이 듣는지 모를 정도로 그렇게 확산이 됩니다. 그 점이 또 아주, 공부하는 것이 우리들의 공부로 끝나지 않고, 많은 분들에게 회향이 된다고 하는 것, 이것이 또 좋은 점입니다. 사실 여기서 우리가 한 200여명 공부합니다만, 이것이 그것을 복사해서 또 다른데 전파해가고, 거기서 또 복사해가고 그야말로 기하급수로 늘어나거든요. 이 강의를 수만 명이 듣는지 모릅니다. 바야흐로 우리가 그런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그런 이치를 우리가 아는 것이 또 필요하지요.
오늘 우선 나눠드린 유인물을 한번 보겠습니다. (여기에 화엄경 유인물을 넣지 못해 죄송합니다.
화엄경 영상 게시물을 프린트해 놓고 보시기를...)
역사적으로 화엄경을 많이 공부하신 대개의 화엄학자들이, 화엄경의 깊은 이치를 세 가지 法數로 정리를 합니다.
처음에는 四種法界. 또는 四法界라고 하고요. 그 다음에 六相圓融. 이것은 경전 안에 나오는 것인데요. 그 다음에
十玄門. 또 十玄緣起. 이렇게 해서 四法界ㆍ六相圓融ㆍ十玄緣起. ←이 세 가지 낱말로서 화엄경의 아주 높고 깊은
이치를 표현했다. 이렇게 봅니다. 이 華嚴思想에서는요? 그렇습니다. 이 世上을 그대로 眞理의 世界라고 하지요.
그리고 眞理의 世界를 우리는 法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교용어로 “시방법계” “시방법계” 이래요.
“十方世界” 라고 하는 말은, “세계” 라고 하는 말은 사회에서도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불교의 안목에서 볼 때는
이 세상 그 어디든지, 이 지구에서부터 저 무한히 넓은 광대한 우주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대로 진리의 세계다. 이렇게 봅니다. 이것이 불교적 안목인데요. 그래서 이것을 法界. 이렇게 부르지요. 法 이라는 말이 眞理라는 뜻 아닙니까? 眞理의 世界. 불교에서는 그냥 하나의 세계라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을 좀 더 세분화하면 法에는, 眞理에는 말하자면 어떤 事物, 現象이 있고, 그 다음에 그 現象의 裏面에
존재하는 어떤 理法이 있다. 眞理가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四種法界에 보면 처음에 事法界라고 되어있지요? 1은 事法界인데 일 事字, 事는 事象ㆍ또는 現象ㆍ눈에 보이는 것ㆍ귀에 들리는 것. ←이런 것들을 現相. 이렇게 말하지요. 그것을 事法界라고 그래요. 그 다음에
理法界는 事法界 裏面에 숨어있는 眞理의 世界. 그것을 理法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 다음에
理事無碍法界. 理와 事가, 진리의 세계와 어떤 현상의 세계가 걸림 없이 그대로, 理法界는 理대로. 事는 事대로.
우리가 理判ㆍ事判해도 좋아요. 이판은 이판대로, 사판은 사판대로. 그대로 서로 좋아하고 미워하고 함으로 해서
어떤 한 사찰이, 어떤 한 단체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다. 하는 그런 뜻에서 사실은 모든 존재가 그렇게 잘 가고 있어요. 이대로 援滿한 상태인데 그것을 理事無碍法界라 이렇게 이해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요. 예를 들어서 事法界도 이해하려면 할 수 있습니다. 왜냐? 눈앞에 보여지는 現象을 그대로 眞理라고 보는 것. 그 다음에
보이지 않는 세계도 그대로 그것이 空이 됐든지ㆍ佛性이 됐든지ㆍ法性이 됐든지, 그 眞理라고 하는 理자를요.
그렇게 보더라도 그것은 그대로 역시 하나의 眞理의 世界다. 거기까지는 다 이해합니다. 그리고 理事無碍法界도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 이치의 면과 어떤 사상의 면. 이것이 서로 동시에 갖춰져 있는 그런 어떤 모습이지만,
전혀 서로 장애하지 않고 구애됨이 없이 세상은 그대로 굴러가고 있다. 한 사찰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사찰을
보더라도 무슨 소임자가 있고, 선방에서 또는 강원에서 공부만 열심히 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것이 조화를 잘 이뤘을 때 가장 이상적인 그 어떤 대중처소가 되듯이... 그것이 無碍입니다. 無碍라는 것이 크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우리가 이해하는데 事事無碍法界라고 하는 말이 있어요. 이것이 제일 어려운 단계이고,
이러한 이 理致를 華嚴經에서 본 眼目이고 그래서 화엄경에서 그 안목으로 드러내보이고자 하는 것이 바로
事事無碍法界입니다. 이 내용은 화엄경에 이런 용어가 있는 것은 아닌데, 설법 속에는, 우리가 화엄경을 공부하는
게송 속에는 事事無碍의 理致를 말한 것이 아주 무수히 많습니다. 이런 用語를 먼저 말하는 것이 華嚴法界玄鏡
(화엄법계현경). 또는 八宗綱要(팔종강요) 규봉종밀 스님의 注華嚴法界觀門(주화엄법계관문). 이런 서적에서
말하자면 이 事法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事事無碍法界라고 하는 말은 事物과 事物. 現象과 現象이
서로 걸리지 않는다. 라고 하는 이런 뜻인데 이것이 얼른 生覺해서 山河石壁의 障碍가 없이 그냥 通過해서 지나가는 것으로 그렇게 錯覺하고 理解할 수가 있습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니고, 현재의 모든 사물과 사물은 그대로 서로가
어떤 障碍도 없이 存在하고 있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전에 제가 얼핏 우리 사람들이 여기에 가득하게 있는데 우리 모두가 나 혼자만 내 호흡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호흡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내가 이 순간 이렇게 존재한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뿐만이 아니고, 사람과 어떤 물질. 예를 들어서 마이크ㆍ꽃ㆍ책상ㆍ시계ㆍ건물ㆍ시멘트ㆍ철근ㆍ저 흘러가는 구름ㆍ지나가는 바람ㆍ이 모든 것과 사람과. 전부가 사실은 圓融無碍(원융무애)하게, 또 아무런 걸림이 없이 그러면서 전부가 같이 調和롭게, 전부 남의 것에 의해서 내가 살아가고, 또 그도 나를 포함한 모든 것에 의해서 그가 살아가고, 꽃도 마찬가지입니다.
꽃도 우리 사람과 기타 모든 존재를 통해서 살아가고, 또 우리 모든 존재가 개개인이 또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화엄경의 안목이고, 事事無碍法界이고, 또 그것을 우리가 잘 이해했을 때, 정말 나의 인격이 되었을 때, 우리의 삶은 정말 지금 같지 않고 참으로 다른 현상을 보게 되고, 그 현상에 맞는 진리의 삶을 살게 된다 하는 그런 이치로 간단하게 설명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난해한 이치이기 때문에 우리가 두고두고 공부해야하고 또 상당한 사유를 필요로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六相圓融이라고 했는데요. 이것은 십지품 제1환희지에 있는 글입니다. 六相圓融해서 總相ㆍ別相이 되고, 同相ㆍ異相이 되고, 成相ㆍ壞相이 됩니다. 그래서 총ㆍ별ㆍ동ㆍ이ㆍ성ㆍ괴. 이것이 여섯 가지의 圓融입니다. 그 밑에 인용문을 그대로 갖다 놨습니다만, 큰 願을 發하는데, 세우는데 一切菩薩行이 廣大無量해서 무너지지도 않고 섞이지도 아니하며, 또 모든 바라밀을 전부 포섭해 가지고서 온갖 보살의 지위를 잘 다스린다. 그런데 거기에 總相ㆍ別相. 同相ㆍ異相. 成相ㆍ壞相의 所有菩薩行을, 거기에 존재하는바 모든 보살행을 다 如實하게 설한다. 그래서 일체사람들을 다 교화해서 그로 하여금 받아 행하도록 해가지고서 心得增長이라. 마음이 자꾸자꾸 발전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얼마나 발전하느냐? 廣大如法界라. 그 넓고 크기가 이 우주의 진리의 세계와 똑 같이해서 究竟에는 虛空과 같고, 그래서 未來際가 다 할 때까지, 시간적으로는 미래제가 다 할 때까지 일체 세월 속에, 일체 시간 속에서 無有休息이라. 쉬는 바가 없이 보살행을 행한다. 이렇게 되어있는 글 중의 하나인데, 이것은 대개 옛날 사람들이 이 六相을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집을 이야기를 해요.
“집” 하면 말하자면 總相입니다. 그런데 집 속에는 뭐가 있습니까? 집은 그냥 집이 아닙니다. 그냥 집이 아니고 예를 들어서 요즘 현대 건물로 치면 시멘트도 있고ㆍ철근도 있고ㆍ돌도 있고ㆍ나무도 있고ㆍ별별 자재가 다 거기에 포함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別相입니다. “집” 하면 總相이고요. 그런데 거기 여러 가지 자재가 또는 창문ㆍ문틀 할 것 없이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은 別相이다. 우리 몸으로 쳐도 그렇고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를 하고 있는 이 법회의 모습도, 예를 들어서 “문수경전연구회 화엄산림” 하면 이것은 總相이 됩니다. 그러나 또 개개인의 한 사람ㆍ한 사람의 살림살이가 따로 있어요. 이것은 또 別相입니다.
이런 식으로 同相ㆍ異相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라고 봤을 때는 同相이 되고, 그러나 개개인의 또 다른 차별된 어떤 그 개인의 삶이 있으니까 그것은 異相입니다. 또 成相ㆍ壞相이라고 하는 말도 그래요. 成은 이렇게 많이 모였을 때 하나가 성립됩니다. 또 여기에서 다른 어떤, 여기 동참한 스님들의 사찰에서 무슨 행사가 있어서 우리가 그 쪽으로 다 모였다 했을 때는 거기는 또 거기대로 하나의 成相이 되는 겁니다.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성취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자의 삶이 또 따로 있어요. 예를 들어서 여기 법회에 모였다고 해서 늘 이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늘 이대로 있으면 큰 일 나는 겁니다. 아예 만들어질 수도 없고, 늘 이대로 있지도 않고, 있어서도 안 돼요. 다 흩어져야 됩니다. 그것이 壞입니다. 무너질 壞(괴)자. 흩어질 때 흩어져야 되는 겁니다.
모든 존재가 이렇게 상반된 원리 속에서 이미 그렇게 잘 이루어져 가고 있다ㆍ잘 살아 가고 있다ㆍ잘 되어 가고
있다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반된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 잘 되어 가고 있다. 우리 육신만 하더라도 그래요. “몸” 하면 總相이고, 또 다른 입장으로서는 同相이고, 또 다른 입장에서는 成相이 됩니다. 그러나 몸에는 눈도 있고ㆍ머리도 있고ㆍ팔도 있고ㆍ다리도 있고ㆍ온갖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졌다든지, 뭐 비위 간담이라든지 등등 분해하면 아주 여러 가지가 나올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개별적인 겁니다. 이것은 다른 개체적인 겁니다. 그것은 別이고요. 그런데 그것이 전부 조화를 이루어서 한 육신을 이루고 있잖아요.
그것이 同ㆍ異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똑 같이 육신 하나를 두고도 설명할 수가 있고, 집 한 채를 두고도 설명할 수가 있고, 또 사실은 成ㆍ壞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 하나를 두고도 그렇고ㆍ단체를 두고도 그렇고ㆍ한 사찰을 두고도 그렇고ㆍ그 다음에 집을 두고도 그렇고ㆍ모든 것이 다 이렇게 여섯 가지 입장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과, 이 여섯 가지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살아가면 자기 집착내지 자기의 고집이 생겨요. 우리는 우리 단체인데 왜 혼자 개별적으로 노느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또 나는 난데 왜 내가 거기에 예속되어야 되느냐? 이것도 아닙니다. 이것도 잘못된 것이라고요. 그러니까 단체일 수도 있고 개별적인 개인일 수도 있고, 개인이면서 단체가 되고 단체이면서 개인이 되는 것. 이것이 정말 조화를 잘 이루고 원융하게 돌아갈 때, 이것이 정말 바람직한 어떤 삶의 모습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화엄경에서 하나의 이치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十玄門. 十玄緣起. 이것이 제일 어려운 것인데, 역시 事事無碍法界ㆍ六相圓融ㆍ十玄門. 이것도 결국은 화엄경의 아주 궁극적인 이치를 어떻게 하면 이해시킬까 하는 것, 이것이 옛날 스님들이 정리를 한 것이 十玄門인데요. 유인물에 보면 위에는 新十玄門이라 하고, 밑에 것은 古十玄門입니다. 古十玄이 맨 먼저 되었습니다.
古十玄을 보면 화엄의 2조 지엄스님의 一乘十玄門이라고 하는 글에 이 십현문이 들어있고, 그 다음에 3조 현수법장스님의 華嚴五敎章에서 또 고십현문을 이야길 했었어요. 그 다음에 또 현수스님께서 다시 그것을 재정리한 것이 新十玄입니다. 현수법장의 탐현기에서 新十玄門. 새롭게 했는데 큰 차이는 없습니다. 몇 개가 조금 다를 뿐입니다. 그것을 전부 번호를 적어놨는데 비교해보면 하나가 조금 다른 점이 있고, 그 외에는 거의 비슷비슷하게 맞아 떨어지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래서 신십현을 주로, 新十玄이나온 이후로는 주로 신십현을 가지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거기에 이름을 나중에 華嚴祖師들의 역사에 대해서는 또 따로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만, 여기 우선 이름들이 나왔으니까...
古十玄에 보면 제 1조가 두순스님ㆍ2조 지엄스님ㆍ3조 현수스님. 의상스님. 우리나라의 의상스님과 현수스님이 2조 지엄스님 밑에서 공부를 했지요. 그 다음에 중국 華嚴祖師로서는 4조가 청량스님. 화엄경 소초를 내신 청량징관스님이고, 5조가 규봉종밀 스님. 이것이 가장 두드러진 다섯 조사로 그렇게 봅니다. 그래 이런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또 말씀드리기로 하고요.
이 十玄門도 이야기를 하기로 하면 상당히 아주 까다로운 내용이고 의미심장한 것이기 때문에, 그 대체적인 것만 말씀드리면 눈앞에 이렇게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 事事物物 전체가 圓融無碍하다는 것입니다. 원융무애의 관계에 있음을 열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고, 그것을 정리한 것이 十玄緣起ㆍ十玄門이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경전보다 재미도 없고, 좀 까다롭기만 하고 그럽니다만, 경전에 보면 간혹 우리 상식을 초월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런 것들을 교리적으로 이렇게 정리를 합니다. 예를 들어서
1. 同時具足相應門(동시구족상응문). 처음에 1번이 그렇지요? 시간적으로 모두가 같은 시간에 갖춰져 있다. 그래서 서로 잘 맞아 떨어지고 있다. 相應하고 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2. 廣狹自在無碍門(광협자재무애문)이지요. 이것은 공간적으로 넓은 것과 좁은 것이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걸림이 없는 그런 이치다. 그 다음에
3. 一多相容不同門(일다상용부동문). 하나와 많은 것이 서로 용납 되었지만, 서로 용납되면서 또 같지 않는, 혼잡해지지 않는. 그런 뜻입니다. 서로 혼잡하지 않는 그러한 입장을 정리한 것이고, 또 그 다음에 네 번째
4. 諸法相卽自在門(제법상즉자재문). 모든 존재는 서로서로 相卽相入해있다. 화엄경을 이야기할 때 相卽相入이라는 말을 잘 써요. 옛날 표현을 빌리자면 서로 즉해있고ㆍ서로 들어가 있다. 이것을 쉬운 표현으로 말씀드리면 모든 존재는 따로따로 노는 것 같지만, 그 깊은 이면에 보면 손과 손가락과의 관계와 같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손과 손가락이 어찌 보면 다른 것 같으면서 어찌 보면 또 하나고요. 손가락하고 손하고 어찌 보면 다르잖아요. 다르면서 또 떼놓을 수 없는 겁니다. 하나입니다. 하나면서 또 다른 겁니다. 이것이 相卽相入. 손과 손가락과의 관계 ←이 정도로 모든 존재는 이렇게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諸法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밀접한 관계인데 우리는 그것을 망각하고, 손과 손가락과의 관계인데, 너도ㆍ나도ㆍ남도ㆍ북도ㆍ진보도ㆍ보수도ㆍ남쪽도ㆍ북쪽도ㆍ그 어느 관계에도 사실은 엄밀히 따져보면 전부 손과 손가락과의 관계입니다. 이렇게 밀접한 관계이건만, 우리가 그 이치를 모르고 지엽만 보는 것이지요. 지엽적인 것. 지엽적인 것만 보니까 뭐 남이다. 그리고 원수다. 그리고 나와 반대되는 존재다. 자꾸 그렇게만 보는 겁니다. 그래서 화엄의 이치에서ㆍ화엄의 안목에서 모든 존재의 이면을 표현하자고 한 것이 이런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5. 隱密顯了俱成門(은밀현료구성문). 이것은 隱密은 숨은 것이고,
顯了는 드러난 것. 그것이 제대로 함께 갖춰져 있는 문이다. 그런 표현을 했는데 이것도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 하고, 보이지 않는 것 하고, 이것이 사실은 함께 존재해야 모든 것이 제대로 성립되는 것이지,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가 무시한다면, 뭐 어떤 분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틀어지기 시작 하는 것이지요. 무너지기 시작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있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보이는 면에는 보이지 아니한 그런 입장이 있어서 보이는 것이 잘 돌아가고,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느 사중을 두고 이야기하더라도, 사중에 열심히 법문하고 포교활동하고 행정 하는 데는 그 뒤에 보이지 않는 하소임을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겁니다. 그런데 생색도 못 내고ㆍ얼굴도 안 드러나고ㆍ어디 무슨 행사 있어도 이름도 한 번 안 불러주고, 그런 사람들이 사실은 무수히 많잖아요. 그러나 앞에 드러난 사람과 그렇게 드러나지 않은 사람이 사실은 하나로 굴러가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우리 일상생활하고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한 덩어리로 되어있는데 그 이치를 모르고 살아감으로 해서, 화엄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6. 微細相容安立問(미세상용안립문) ←그냥 지나가시지만, 말이 다를 뿐 사
실은 5번과 같은 뜻.
7. 因陀羅網境界門(인다라망경계문). 이것은 인다라 신의 그물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예를 들어서 제석천의 궁전을 덮고 있는 인다라 신의 그물인데 거기에 매듭, 매듭마다 다이아몬드 같은 아주 영롱히 빛나는 구슬이 하나씩 다 달려있지요. 무수히 달려있습니다. 매듭 매듭에ㆍ사이사이에 다 달려있으니까요. 그런데 전부 모든 수 만개ㆍ수 천 만개의 구슬을 한 구슬이 반영하고, 구슬ㆍ구슬마다 다 전체 구슬을 서로 비추고 비춰주고 하는 그런 관계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로써 因陀羅網. 자주 쓰는 말이지요. 因陀羅網境界門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8. 託事顯法生解門(탁사현법생해문). 이것은 현상에 의탁해가지고, 현상에 의탁해서 어떤 보이지 않는 진리를 나타내가지고, 이해를 내게 하는 문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것은 아까 四種法界 = 理法界ㆍ事法界ㆍ理事無碍法界ㆍ事事無碍法界. 거기에 연관된 이야기지요. 그 다음에
9. 十世隔法異成門(십세격법이성문). 우리가 九世十世互相卽이라고 하는 의상조사 법성게에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과거에 과거ㆍ현재ㆍ미래가 있고, 현재에 과거ㆍ현재ㆍ미래가 있고, 미래에 과거ㆍ현재ㆍ미래가 있고, 그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한 바로 現今. 현재 이 순간이 그런 모든 九世를 다 함용하고 있다 해서 현재一念. 그것을 또 一世라고 쳐서 十世라고 하는 것이지요.정말 불교는 시간을 쪼개도 이렇게까지 아주 치밀하게 쪼개고 있습니다. 이런 이치가 참 없습니다.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도 사실은 없습니다. 불교의 위대성을, 또 불교의 우수한 점을 우리가 따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만, 이러한 것들도 불교의 정말 참 우수한 점이기도 합니다. 그 다음에
10. 主伴圓明具德門(주반원명구덕문). 主와 伴이 圓明하게 덕을 갖춘 그런 문이다. 예를 들어서 제가 여기서 강의를 하면, 제가 主가 된다면 여러분이 伴이 되고, 또 여러분 중에서 어디에, 어느 사찰에서 법문을 하든지 무슨 행사를 주관하든지 하면, 그 때는 그 스님이 주인이 되고 우리 모두는 거기 가서 伴이 되는 겁니다. 항상 이런 관계 속에 놓여있다. 항상 主라고 생각해도 안 되고, 항상 伴이라고 생각해도 안 된다. 이 모든 것이 정말 원만하게 서로서로 덕을 갖추고 있는 그런 이치. 이러한 것을 十玄門을 가지고 화엄경의 이치를 이렇게 정리를 참 잘 제대로 했다고 보는데, 그만치 또 어렵지요. 제가 설명을 아주 간단하게 했습니다만, 이것은 두고두고 원문하고 경문하고 연관시켜 가면서 또 한 번씩 살펴볼 기회가 있을 줄 믿습니다. 이쯤 간단하게 말씀드리고 또 다른 기회에 이것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또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경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2권을 끝냈으면 하는 그런 계획인데 양이 좀 많습니다. 속도를 조금 빨리할까 합니다.
나, 偈頌讚歎(게송찬탄)
爾時(이시)에 善化天王(선화천왕)이 承佛威力(승불위력)하사
普觀一切善化天衆(보관일체선화천중)하고
而說頌言(이설송언)하사대
世間業性不思議(세간업성부사의)를
佛爲群迷悉開示(불위군미실개시)하사대
巧說因緣眞實理(교설인연진실이)와
一切衆生差別業(일체중생차별업)이로다
種種觀佛無所有(종종관불무소유)여
十方求覓不可得(시방구멱불가득)이라
法身示現無眞實(법신시현무진실)하시니
此法寂音之所見(차법적음지소견)이로다
佛於劫海修諸行(불어겁해수제행)은
爲滅世間癡闇惑(위멸세간치암혹)이라
是故淸淨最照明(시고청정최조명)하시니
此是力光心所悟(차시력광심소오)로다
世間所有妙音聲(세간소유묘음성)이
無有能比如來音(무유능비여래음)이라
佛以一音遍十方(불이일음변시방)하시니
入此解脫莊嚴主(입차해탈장엄주)로다
世間所有衆福力(세간소유중복력)이
不與如來一相等(불여여래일상등)이라
如來福德同虛空(여래복덕동허공)하시니
此念光天所觀見(차념광천소관견)이로다
三世所有無量劫(삼세소유무량겁)에
如其成敗種種相(여기성패종종상)을
佛一毛孔皆能現(불일모공개능현)하시니
最上雲音所了知(최상운음소료지)로다
十方虛空可知量(시방허공가지량)이어니와
佛毛孔量不可得(불모공량불가득)이니
如是無碍不思議(여시무애불사의)를
妙髻天王已能悟(묘계천왕이능오)로다
佛於曩世無量劫(불어양세무량겁)에
具修廣大波羅蜜(구수광대바라밀)하사
勤行精進無厭怠(근행정진무염태)하시니
喜慧能知此法門(희혜능지차법문)이로다
業性因緣不可思(업성인연불가사)라
佛爲世間皆演說(불위세간개연설)
法性本淨無諸垢(법성본정무제구)하시니
此是華光之入處(차시화광지입처)로다
汝應觀佛一毛孔(여응관불일모공)하라
一切衆生悉在中(일체중생실재중)호대
彼亦不來亦不去(피역불래역불거)니
此普見王之所了(차보견왕지소료)로다
爾時(이시)에, 그 때에
善化天王(선화천왕)이 承佛威力(승불위력)하사, 부처님의 위력을 받들어서 普觀一切善化天衆(보관일체선화천중)하고, 一切善化天의 대중들을 널리 살피시고 而說頌言(이설송언)하사대, 게송을 설해 말하되
1. 世間業性不思議(세간업성부사의)를 佛爲群迷悉開示(불위군미실개시)하사대, 世間業性. 세상의 업의 성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업의 성품이 정말 불가사의해요. 얼마나 다종다양하고 많은지 몰라요. 그런 것을 몰라요. 그래서 부처님은 여러 미혹한 사람들, 群迷. 여러 미혹한 중생들을 위해서 다 모두 열어서 보였다. 정말 불교의 우수성을 이야기할 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진리로써의 우수성. 이것이 인연설입니다. 巧說因緣眞實理(교설인연진실이). 그랬지 않습니까? 인연이라고 하는 진실한 이치와 또 一切衆生의 差別業(일체중생차별업). 일체중생들의 차별한 업을 巧 說 했다. 아주 능숙하게ㆍ익숙하게ㆍ아주 자세하게 잘 설명했도다. 그런 말입니다.
우리 불교에 있는 너무나 익숙한 말입니다만, 옛날에 사리불과 목건련이 출가하기 전에, 부처님제자가 되기 전에 길을 가다가 마승비구라고 하는 아주 점잖은 비구를 만나가지고 처음들은 내용이 因緣說 아닙니까? 緣起說. 緣起라고도 하고요. 緣起果報라고도 하고요. 워낙 품위 있는 스님이라서 사리불과 목건련이 보니까 턱~ 아주 대단한 인격자가 지나가요. 붙들고 물었어요. “당신 옷은 왜 그런 색깔입니까?” 그리고 “어찌 그렇게 고결해 보이고 근사하고 품위가 있어 보입니까? 당신은 무엇을 배우며 당신의 스승은 누굽니까?” 하고 그냥 따발총처럼 막 그냥 궁금한 것을 쏟아 놓습니다. 그런데 마승비구는 점잖하게 “싯달태자가 출가해서 깨달음을 얻었는데 나는 그 분을 스승으로 삼고 그 분의 법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사리불이 “그 분은 뭐라고 가르칩니까?” 했을 때, “나는 초보자라서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우리 부처님 대사문께서 늘 자주 말씀하시는 단 한 마디는 일러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諸法從緣生 諸法從緣滅. 我佛大沙門 常作如是說. 천고에 아주 빛나는 가르침이지요. 모든 법은 인연으로 쫓아 생긴다. 모든 법은 인연으로 쫓아 멸한다. 우리 부처님 대사문께서, 큰스님께서, 그런 뜻이지요. 우리 부처님 큰스님께서 常作如是說이라. 항상 이러한 이치를 말씀하십니다. 하고 그렇게 했어요. 그것을 일러주니까 듣고 사리불과 목련존자는 그 말 한 마디그냥 눈이 확 밝아진 겁니다.
인도에 수많은 성인들이 있고, 수많은 종교가가 있지만 모든 존재의 출발점을 연기로 본 것, 인연으로 보았다고 하는 그런 것은 생전 처음 들은 겁니다. 뭐 어떤 유일신이 만들었다느니ㆍ갑자기 어디서 생겼다느니ㆍ캄캄한데서 생겼다느니ㆍ별별 학설이 있는데 인연에 의해서 생겼다. 그 한 마디에 그냥 모든 의문이 다 풀려버렸어요. 그래서 당장 앞세워 가가지고 부처님한테 귀의해가지고, 자기들 제자들도 수백 명 있었는데 그 제자들도 한꺼번에 같이 부처님한테 출가를 하게 된 그런 이치. 그런 낱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교에서는 이야기할 때, 인연설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 하지요.
여기는 또 一切衆生의 差別業. 차별한 업도 왜 차별하느냐? 결국 각각 인연이 다르기 때문에요. 왜? 얼굴이 전부 다르냐? 인연이 다르기 때문에요. 마음의 인연ㆍ행동의 인연ㆍ일체 인연이 다르기 때문에 업이 차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 ←이것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됩니다. 절대 이것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어떤 주장도 그래요. 따지고 보면 전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가 없는데, 자기하고 다르다고 틀리다고 인정하니까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첫 게송이 아주 좋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게송.
2. 種種觀佛無所有(종종관불무소유)여,
가지가지로 부처님을 관찰해도 존재하는 데가 없어요. 아~ “부처님” “부처님” 여기서 앞에서도 몇 번 나왔습니다만, 화엄경은 부처님을 이야기합니다. 佛身을 이야기하고ㆍ여래를 이야기하고ㆍ세존을 이야기하고ㆍ부처를 설합니다. 부처님이 설한적은 거의 없어요. 뒤에 아주 작은 두 품만 부처님이 설한 것이고, 거의 보살이나 여기 대중들이, 법회 청중이 부처님을 설명한 것이 화엄경의 특징이지요. 법화경은 부처님이 법을 설하고, 법화경은 법을 설한 것이라면 화엄경은 부처님을 설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대중이 부처님을 설한다. 그래서 여기서도 보면 어떤 입장에서 보니까 여러 가지로 부처님을 뜯어보아도 부처님은 존재하는 데가 없어요. 無所有입니다.
十方求覓不可得(시방구멱불가득)이라. 시방세계 어디가서 찾아봐도 가히 얻을 데가 없더라. 示現無眞實(법신시현무진실)하시니, 그 진리의 몸, 法身은 아무리 나타나도 無眞實해요. 진실성이 없다. 이 말은 “고정불변 하는 어떤 실체가 없다.” 이런 말입니다. 왜냐? 여기 앞에서(1번) 因緣眞實理. 그랬어요. 인연이야말로 진실한 이치입니다. 부처님도 연기로 존재합니다. 法身도 연기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서 고정불변 하는 실체가 없다. ←이것이 無眞實이라는 뜻입니다. 此法은 寂音之所見(차법적음지소견)이로다. 이 법은 적정음광명천왕(4강-4(7)-가, 두 번째 천왕)이 얻은 법이더라. 그 다음에 세 번째
3. 佛於劫海에 修諸行(불어겁해수제행)은,
여기도 또 부처님이지요. 부처님을 설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모든 것입니다. 유형무형 모든 것입니다. 유인물에서 四法界ㆍ十玄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이 모든 것을 다 부처님이라고 하는 그 존재 속에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劫海. 아주 오랜 세월동안 여러 가지 수행을 했어요. 왜 했느냐?
爲滅世間癡闇惑(위멸세간치암혹)이라. 세간의 어리석음의 미혹을 소멸하기 위한 것이다. 불교는 한 마디로 지혜입니다. 智慧. 수행을 아무리, 우리가 어떤 수행을 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어리석음을 소멸하고 지혜를 얻자고 하는 것. 그것입니다.
是故淸淨最照明(시고청정최조명)하시니, 그런 까닭에 아주 청정하게 가장 비춰서 밝히시니, 此是力光心所悟(차시력광심소오)로다. 이것은 력광천왕의 心所悟로다. 마음에 깨달은 바로다. 그 다음에 네 번째
4. 世間所有妙音聲(세간소유묘음성)이,
세간에 있는 아주 아름답고 아름다운 音聲이, 無有能比如來音(무유능비여래음)이라. 여래의 음성에 비교할 수가 없다 이 겁니다. 세상의 아무리 아름다운 음성이 있다하더라도, 무슨 악기ㆍ어떤 가수ㆍ어떤 음성이라 하더라도 여래의 음성하고는 비교할 수 없다.
佛以一音遍十方(불이일음변시방)하시니, 부처님의 하나의 음성으로 시방에 두루하시니 入此解脫은 莊嚴主(입차해탈장엄주)로다. 이 해탈에 들어간 사람은 莊嚴主로다. 그랬어요. 네 번째 천왕이니까요. 장엄주천왕이 얻은 것이다. 그 다음에
5. 世間所有衆福力(세간소유중복력)이,
세간에 있는 온갖 가지가지 복력이 不與如來一相等(불여여래일상등)이라. 그랬어요. 세상에 아무리 복 많은 사람들이 있다하고, 그 많은 복을 다 한데 모아도 不與如來一相等이라. 부처님, 여래의 한 相과 더불어 같지 않다. 如來의 一相에도 미치지 못한다 말입니다. 세상 복 전체하고, 여래의 수많은 相중에서, 福相 중에서 한 상하고도 같지 않다. 如來福德同虛空(여래복덕동허공)하시니, 여래의 복덕은 허공 같으시니 此念光天所觀見(차념광천소관견)이로다. 이것은 념광천왕이 관견한 바로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복에 대한 아주 저속한 그런 안목. 우리가 생각하는 속된 마음으로 알고 있는 복하고, 그리고 출세간적인 복의 안목. 이것이 천양지차로 아주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화엄경을 조금이라도 맛을 보려면 정말 진정한 복은, 우리가 그동안 계산하던 그런 복하고는 다르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여섯 번째
6. 三世所有無量劫(삼세소유무량겁)에,
과거ㆍ현재ㆍ미래에 있는 한량없는 세월에 如其成敗種種相(여기성패종종상)을, 그 성하고 패하고ㆍ성하고 패하고 하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 모습들을 오랜 세월 속에, 아까 九世十世互相卽이라는 말을 했는데, 무한한 과거ㆍ무한한 미래ㆍ그리고 현재. 거기에서 일어나는 成ㆍ住ㆍ壞ㆍ空. 成敗라고 하는 말은 그것을 줄인 말이지요. 그런 여러 가지 모습들을 뭐라고요? 佛一毛孔皆能現(불일모공개능현)하시니, 부처님의 한 毛孔속에 능히 그것을 나타내시니, 그랬습니다.
아~ 이것은 참 그야말로 우리가 잘 아는 一微塵中含十方. 한 미진 속에서 시방세계를 다 나타내고 있고 모든 시간도 일 찰라에 나타내고 있다.
여기는 시간을 이야기했어요. 三世속에 無量劫이라고 했으니까요.
거기에 벌어지는 현상들. 그것을 부처님의 한 毛孔속에 다 나타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사실은 여기의 꽃 한 송이의 역사. 그 역사에서 온 우주의 역사를 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꽃 한 송이가 있다. 그럼 이 꽃은 우리가 기껏해야 한 달 안에 이 꽃이 이루어졌다 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꽃이 되기 이전. 꽃의 씨앗도 좋고ㆍ흙의 역사도 좋고ㆍ그 거름의 역사도 좋고, 간단하게 우리가 알기 쉽게 흙이라고 봅시다. 그 흙의 역사가 얼마나 됐습니까? 어찌 한 달입니까? 1년입니까? 10년입니까? 100년입니까? 그것은 이 우주의 역사와 맞먹는 겁니다. 똑같은 겁니다. 사실 알고 보면 꽃잎 하나 속에 온 우주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여기는 사실은 부처님의 一毛孔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등장시켜 놓고 우리들과, 그리고 모든 존재를 제대로 이해시키려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最上雲音所了知(최상운음소료지)로다. 최상운음이 능히 了知한 바로다. 깨달은 바로다.
아~ 참 이것, 대단한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일곱 번째 *스님은 다음은 일곱 번째라고 하시지만,
4강-4, (7)-가의 7. 勝光天王이 33쪽 나. 게송찬탄에는 없는고로, 다음에는 (7)-가의 8번.
묘계천왕으로 사료됩니다만...
7. 十方虛空可知量(시방허공가지량)이어니와,
시방의 허공을 가히 알아서 헤아릴 수 있던가? 佛毛孔量은 不可得(불모공량불가득)이라. 부처님의 毛孔의 量은 가히 얻을 수 없다. 헤아릴 수가 없다. 우리 외우는 염불 속에 이런 말이 있지요?
刹塵心念可數知(찰진심념가수지) 大海中水可飮盡(대해중수가음진) 虛空可量風可繫(허공가량풍가계). 그래놓고는 뭐라고요? 無能盡說佛功德(무능진설불공덕)이라. 능히 부처님 공덕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刹塵心念可數知. 그 무한히 많고 많은 우리들의 한 생각 한 생각을 다 헤아려서 알 수 있다 하더라도, 또 저 태평양 넓은 바다의 물을 다 마신다 하더라도, 또 저 드넓은 허공이 얼마나 넓든지 간에 그것을 전부 내가 부여잡을 수 있다 하더라도 헤아릴 수가 있고, 虛空可量風. 흘러가는 바람을 내가 손으로 부여잡을 수 있는 그런 입장이라 하더라도, 無能盡說佛功德이라. 부처님 공덕은 헤아릴 수가 없다. 설명할 길이 없다. 라고 이렇게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대로지요.
十方虛空可知量이나, 시방의 허공을 가히 알아서 헤아릴 수 있거니와 佛毛孔量은 不可得이라. 부처님의 毛孔의 그 量은, 부처님의 毛孔의 量이 얼마나 많은지 가히 얻을 수가 없다. 如是無碍不思議(여시무애불사의)를, 이와 같이 걸림이 없는 불가사의한 도리를 妙髻天王已能悟(묘계천왕이능오)로다. 묘계천왕이 이미 능히 깨달았더라. 그 다음 여덟 번째, *다음에는 (7)-가의 9번. 희혜천왕으로 사료됨.
8. 佛於曩世無量劫(불어양세무량겁)에, 曩: 옛 양자입니다. 오랠 양자. 부처님이 아주 오랜 세월, 한량없는 겁에 具修廣大波羅蜜(구수광대바라밀)하사, 광대한 바라밀을 具修. 갖춰서 닦았다.
勤行精進無厭怠(근행정진무염태)하시니, 부지런히 精進을 행해서 싫어하거나 게으름이 없으시니 喜慧能知此法門(희혜능지차법문)이라. 희혜천왕이 능히 이 법문을 알았더라. 그 다음
10. 業性因緣不可思(업성인연불가사)나,
業性의 因緣을 가히 생각할 수 없으나 佛爲世間皆演說(불위세간개연설)이라. 부처님은 세간을 위해서,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다 연설하셨다. 法性本淨無諸垢(법성본정무제구). 法性은 本來 淸淨해서 모든
허물이 없어서, 그러니까 業性과 法性. 그 두 가지를 대비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業性因緣은 물론 많습니다. 불가사의해요. 생각할 수가 없지만 法의 性稟에서 보면 本래 텅~비어서 本淨입니다.
텅~비어서 本來 淸淨하기 때문에 어떤 허물도 없다. 부처님은 우리의 業性을 根據로 해서 法性을 노래하신 겁니다.
法性을 설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業性에 늘 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통해서 法性에 눈을 뜨라는
것이지요. 此는 是華光之入處(차시화광지입처)로다. 화광천왕이 들어간 곳이더라.
11. 汝應觀佛一毛孔(여응관불일모공)하라.
그대는 부처님의 一毛孔을 관찰하라. 一切衆生悉在中(일체중생실재중)이라. 일체중생이 전부 그 속에 들어 있다.
우리 모두가 부처님의 한 모공 속에 들어있다. 뭐라고요? 하나의 이치 속에, 하나의 원리 속에 다 존재한다.
지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하나의 이치, 하나의 원리 속에 들어있다. 이것도 우리가 늘 외우는
一微塵中含十方. 또 유인물에서 금방 봤던 一多相容不同門. 하나와 많은 것이 그 속에서 서로 용납되고, 不同이라고 하는 말은 서로서로 개개인으로서의 어떤 그 존재를 살려주는 그런 입장을 不同이라고 그럽니다. 전부가 같지 않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毛孔 속에 있지만, 우리는 우리대로 당당하게 우리의 삶을 살고있다.
彼亦不來亦不去(피역불래역불거)니, 그러면서 일체중생 그는 또한 옴도 없고 감도 없어요.
아무리 모공 속에 있어도 가고 오고해서, 부처님 毛孔 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현재 존재하고 있는 이대로의
모습을 화엄경의 안목에서, 화엄경 차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此普見王之所了(차보견왕지소료)로다. 이것은 보견천왕의 깨달은 바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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