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화엄사상의 이해

장백산-1 2014. 12. 1. 21:42

 

 

 

 

 

화엄사상의 이해   

       

海印三昧란 풍랑이 멎고 바다가 잔잔해질 때 그 속을 應視할 수 있는 것처럼, 煩腦의 파도가 멎을 때 드러나는

마음의 本性을 말한다.



불교공부는 크게 선(禪)을 공부함과 교(敎)를 공부하는 것으로 양분할 수 있다. 이를 불교에서는 선교의 공부방법이라 일컫고 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선조들에게 있어 마음을 닦는 법으로 알려져 왔고, 교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방편이었다. 따라서 선과 교는 별개의 가르침이라기보다는 방편의 차이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말을 떠난 마음이나 마음을 떠난 말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이 둘의 대립은 상당히 심각한 양상을 띄워 온 것도 사실이다. 우리 나라만 해도 오교구산이니, 선교양종이니 해서 상당히 사상적, 교단적 대립을 보여온 것도 사실이다. 교학의 공부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 초보적인 것으로서 사제·팔정도의 인과법문이 있고, 또 대승사상 속에서도 반야나 유식 등 까다로운 단계가 있다.

불교를 공부할 때 가장 마지막 단계가 바로 이 화엄사상이다. 화엄사상은 불교의 이론 중에서 가장 심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최고의 경지이다.  화엄사상의 기본경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으로 이를 줄여 《화엄경》이라 지칭한다. 《화엄경》은 세 종류의 판본이 전해 오고 있는데 권수의 분류에 의해 80권, 60권, 40권의 화엄경으로 크게 분류하고 있다. 이 중 40권 《화엄경》은 일부만이 번역되어 있어 완역본이라고는 볼 수 없다. 우리가 주로 대하는 경전은 권수가 60권, 80권인 《화엄경》이다.  중국에서 《화엄경》이 번역된 직후 우리 나라에도 소개되었다. 당시 《화엄경》은 상당히 신학문이었고, 원효나 의상 같은 분들의 중국유학 목적도 결국 그 공부에 있었다고 본다.

육상원융(六相圓融)
  
이 世界와 宇宙, 人間이라고 하는 생존의 형태를 구성하는 것을 여섯 가지의 모습(總相·別相.同相·異相·成相·壞相)

으로 설명하려는 理論이다. 이 여섯 가지의 모습은 서로 密接한 關聯을 지니고 있고, 서로 對稱하고 있다.
다음의 표와 함께 살펴보자.

總 ━━━━━━━ 同 ━━━━━━━ 成
卽↓↑中            卽↓↑中                卽↓↑中    
別 ━━━━━━━ 異 ━━━━━━━ 壞

총(總)이라 함은 전체를 의미한다. 우주 안의 존재들은 하나같이 전체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다. 여러 가지 연(緣)이

모여 성립된 상태를 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총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특수성〔別〕이 존재해야만 가능하다. 그렇지 아니하면 전체적인 통일성은 존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의 입장에서 산을 보았을 때 산은 나무, 풀, 물, 산새, 동물 등 개별적인 모습들로 구성되었다. 이 개별적인 모습들에 의해 산이라고 하는 전체적인 모습이

이룩된다. 즉, 개별이 없으면 전체가 없고, 전체가 없으면 개별이 없다는 이론이다. 우리가 참석하는 법회도 마찬가지이다. 개별적 구성원 하나 하나가 모이지 않고서는 법회가 이루어질 수 없다.  동(同)은 동질적인 모습으로 균등한

상태이다. 이(異)는 개성, 상이성을 말한다. 최소한 함께 법회를 행하는 불자는 동질적인 이상을 지니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불교는 어떻게 알고 행하는가'하는 방법론 등을 지니기 위해서는 각자의 개성이 필요하다. 누구나 지니고 있는 개별적 소양과 적성에 의해 자기 입장을 정립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가르치는 이는 가르치는 이대로,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적재적소에서 주어진 개성을 발휘할 때 동질적 이상은 완성된다.  이상이 완성〔成〕된 모습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의 희생〔壞〕을 통해야 가능하다.

《화엄경》에서는 성상(成相)과 괴상(壞相)의 관계를 나무로써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보통 집을 지을 때

실한 나무는 대들보 감으로, 둥근 나무는 서까래, 편편한 것은 문짝 등으로 사용한다. 즉, 나무의 존재입장에서 보면 자기의 희생을 통해 집이라는 완성품을 이룩한다. 여기서 각자의 나무가 서로의 주장만을 한다면 결코 완성될 수가

없다. 《화엄경》 말미에 '자연은 자기 헌신을 통해 완성된 자기 모습을 이룩한다. 인간은 이 모습에 실패한다. 자기

헌신의 정신이 없기 때문에 완성된 모습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이 成과 壞의 관계이다.

이 六相의 道理는 개인과 집단간의 윤리관을 담고 있지만 집단과 개인의 관계가 어떻게 선명하게 유지되는가 하는 형이상학이 담겨있다.  이와 같은 논리의 토대 위에서 '일중일체(一中一切)'라는 선언이 가능하다. 하나는 전체요, 개인은 곧 국가이다. 왜냐하면 하나가 없으면 전체가 없기 때문이다. 개인이 없다면 국가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의 입장에서는 개인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하며 개인의 입장에서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헌신해야 한다.

화엄의 '개인이 곧 국가'라는 思想은 신라인들이 이 땅을 통일할 수 있었던 정신적 지주였다.  개인과 집단과의 정당한 모색이란 참으로 어렵다. 인간 자체가 자기 위주의 입장에서 판별·유추하기 때문에 동일화시키기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의 六相理論을 우리가 체득한다고 하면 가능하다. 《화엄경》에서는 六相의 완성된 모습을 이룩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목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의 목표와 목표가 완성되는 상태가 일치하는 것을 법계(法界)라고 한다. 이 法界에는 眞理의 世界, 六相들이 각각 정당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선재동자
  
《화엄경》에서 또 다른 중요한 테마는 〈입법계품〉이다. 선재라는 동자의 구법행각을 적어 놓은 것인데, 여기서 선재란 진리에 목말라하는 구도의 나그네를 상징한다.  쉰세 명의 선지식을 만나 법을 묻고 법을 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선재에게 처음 법을 전하는 선지식은 문수보살이다. 이후 그가 만나는 선장, 어부, 심지어는 창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군상들이다. 그 모든 이들을 통해 불법의 위대한 진리를 깨달아 간다. 맨 마지막에 보현보살을 만난다. 그 직전에 만난 선지식 미륵이 손가락을 튕김에 의해 선재는 궁극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부처의 자리에 올라보니 그 자리가 자신이 출발했던 자리라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여러 가지 상징과 은유가 담겨있다. 선재동자의 경우 만났던 쉰세 명의 사람들은 다양한 사람들이었지만 그 중에는 깡패도 있었으며 창녀도 있었다. 결국 선재동자는 도 높은 이를 만나면 그 길을 따라 걷고, 자신보다 도가 낮은 이를 만나면 자극을 받으며 정진한 끝에 성불을 하였던 것이다. 또 처음 만난 이가 문수였고, 마지막 보살이 보현이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문수가 지혜의 상징이고, 보현이 비원의 상징이라면, 결국 이 구성은 불교의 입문은 지혜, 그 회향은 행원(行願)이라는 뜻이다. 불교는 알고 믿어야 하는 종교이다. 결코 믿음만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불교적 이상의 완성은 결코 알음알이에 있지 아니하다. 행동이 수반된 믿음, 동체대비를 실현하는 일이야말로 불교의 궁극적 목표라는 의미이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 선지식 아님이 없다. 또한 깨달음을 얻고 보니 제자리였다 함은 앞서 배운 여래장사상에 등장하는 본각의 입장과 동일하다.

《화엄경》에서 말하기를 "밤에 잠이 든 사람이 여행하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는 본래 제자리에 있었음과 똑같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진실로 깨달은 자는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다. 깨달음, 부처, 이러한 것들은 기묘하고 거룩한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성, 지나치기 쉬운 상식 속에 진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 화랑들에게 있어서 이 선재는 바로 인격적 모델이었다고 생각되어 진다. 불교는 '본래의 제자리로 돌아옴' 등의 극적인 반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위대한 화엄조사 의상은 이렇게 말한다. "간다, 간다 하지만 본래 그 자리, 닿았다, 닿았다 하지만 떠난 그 자리(行行本座 至至發處)."


화엄일승법계도
  
이 《華嚴一乘法界圖》는 53개의 角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53명의 善知識을 상징하며 상호 대칭되게 이루어졌다. 또 전체가 사각으로 이루어진 것은 四攝과 四無量을 상징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道印의 첫 글자는 法이고, 끝나는 글자는 佛이다. 이는 法으로 시작하여 佛로 회향한다는 의미이다. 또 도인의 굴곡이 심한 까닭은 중생의 근기가 같지 않음을 상징한다고 했다. 외길인 까닭은 불도가 일승이어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세계 불교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이 도장형의 게송은 흔히 法性偈라고 이름한다. 또 그의 제자들이 이에 관해 문답을 주고받은 해설서를 《법계도기총수록》이라고 한다. 210字로 이루어진 이 글의 뜻을 익혀 보자

〈화엄일승법계도〉
法의 性稟은 圓融하여 두 모습이 없으며, 모든 法은 본래 움직임 없이 고요하다(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여기에의 法은 眞理이며, 諸法의 法은 이 世上 모든 것, 客觀物質이라는 現象이다.
그것은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이 모든 것이 다 끊어졌으니 깨달아 지혜로써 알뿐 다른 대상이 아니다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무명무상(無名無相)의 사고는 동양적 사고의 한 형태이다. 노자의 《도덕경》 첫머리에도 "태초에 모든 것이 사물의 근원을 움직이고 생성·발전시켜 왔다. 그런데 이것은 모습도 없고 이름도 없다. 크다고 하면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으며 작다고 하면 이보다 더 작은 것은 없다. 크기로 따지면 가장 큰 것, 작기로 따지면 가장 작은 것, 무어라 이름 붙일 것이 없으니 구태여 붙여 도(道)라고 한다."  이 경우 도(道)란 완벽한 이름일 수 없다. 眞理 그 自體는 뭐라고 表現할 수 없다. 오로지 깨달은 이의 안목으로 관조된 경지일 뿐이다.  참다운 性稟이란 깊고 깊어 아주 微妙한 것이며 本來 性稟을 지키는 일 없이 오직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하나 가운데에 모든 것이 있고, 여럿 가운데에 하나가 있어 하나가 곧 모두이며 여럿이 곧 하나이다(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六相圓融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동전 한 닢은 열 닢이다라는 비유가 있다. 왜냐하면 열 닢이란 결국 하나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전 열 닢이란 결국 하나 하나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하나의 미세한 먼지는 시방세계를 모두 포함하고, 이 세상 모든 먼지가 또한 그러하다네(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의상의 우주관 속에 瞬間과 永遠이 승화되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이다. 헤아릴 수 없는 영겁의 세월이 곧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일세(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세속과 열반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지만 혼잡되지 아니하고 뚜렷하여 경계를 두고 이루어지네(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여기서 구세(九世)란 삼세(과거·현재·미래)를 또 삼세로 나눈 것으로 세속의 세계를 상징한다.

십세란 영원불멸의 세계이다. 용수의 표현을 빌자면 구세는 속제이며 십세는 진제를 말하는 셈이다

부처님 향한 첫 믿음을 내는 그때가 곧 올바른 깨달음의 그때여서 생사와 열반이 서로 화목하게 어울려지네

(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常共和)  초발심이 곧 정각이라면 깨달음에는 선후가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생사와 열반이 하나가 된다. 衆生의 不幸은 이 둘을 別個로 生覺하고 行動하는 데서 비롯된다. 나고 죽음과 열반이 하나인 경지, 중생과 부처가 하나인 깨달음이 바로 華嚴의 世界이다.  理와 事가 뚜렷하여 分別이 없으니 한량없는 부처님들과 보현대인들의 경계가 바로 이것일세(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능히 眞理는 해인삼매의 가운데에서 진리의 뜻대로   무수히 드러내는데 그것은 불가사의하다(能人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議).

해인삼매라는 표현은 인간의 마음을 바다에 비유하는 데서 연유한다. 풍랑이 멎고 바다가 잔잔해질 때 그 속을 응시할 수 있는 것처럼, 번뇌의 파도가 멎을 때 마음의 본성은 드러난다. 판본에 따라 능인(能仁), 능입(能入) 등으로 다르게 표기되는 경우가 있는데, 능인 일 경우에는 부처님의 다른 이름이 되고, 위에서 해석한 대로의 능인인 경우에는 '능히‥‥‥을'로 해석할 수 있다.  

 

이 虛空에 보배로운 비가 가득 차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건만, 중생은 각자가 지닌 마음그릇 크기만큼 그 이익을 얻는다네(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옛 선사들 말씀대로 같은 물도 소가 마시면 우유, 뱀이 마시면 독이 되듯이 결국은 '내 그릇'에 관한 문제이다. 이 허공에 가득한 부처님의 진리를 내 그릇으로 더 넓고 깊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道 닦는 이는 본래의 제자리로 되돌아오네. 妄靈된 生覺을 쉬어서 다시는 그와 같은 생각을 얻지 않는다네(是故行者還本際  파息妄想必不得).  이와 같은 경계는 인연에 따르지 않는 선교의 방편으로 내가 뜻한 바대로 모든 생각을 이루는 것이니, 이제 내 그릇대로 얻은 양식을 갖고 집으로 돌아간다네(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  다라니의 한량없는 보배를 가지고 법계를 장엄하고 부처님의 궁궐을 실답게 가꾸고 있다네(以陀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  궁극적인 중도에 와 앉으니 예로부터 움직이지 않았건만 사람들은 그를 불러 부처라 하네(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부처님은 人格的 存在라기 보다는 살아 生動하는 삶의 現場, 그 攝理를 意味한다. 따라서 '옛 자리, 움직임 없는 그 자리'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이 게송을 조석으로 외우면 공덕이 크다. 이 7언 30구 210자는 80권의 《화엄경》정수(精髓)를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화엄경의 중심사상<화엄사상>    

화엄경의 중심사상

먼저 화엄경의 중심사상을 이야기 하기 전에 華嚴經의 思想과 一般的으로 말하는 華嚴思想에 대해 區分을 짓는게 좋을 듯 싶습니다. <화엄경>의 思想은 말 그대로 화엄경에 설해지고 있는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反面 華嚴思想은 화엄가(즉,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하신 후 지금까지의 많은 화엄사상가들의 체계화되고 전개되어 온 사상을 말합니다. 즉 화엄사상은 여러 화엄사상가들의 견해가 많이 포함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화엄경에 설해지는 사상과 이후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화엄사상을 하나로 보고 생각하기에는 조금의 무리가 있을 듯 합니다. 그리고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은 화엄경에 나타난 사상, 즉 전자의 경우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華嚴經의 思想을 일단 몇가지로 요약해보면, 1)法身佛思想, 2)菩薩思想, 3)唯心思想, 4)法界緣起思想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법신불 사상
법신불의 槪念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석가모니 세존과의 개념과는 조금 다릅니다. 물론 석가모니 세존이 법신불이

아니다라는 식의 결론은 아니구요. 법신불이란 말그대로 법을 몸으로 하는 부처님을 뜻합니다. 여기서 法이란 眞理를 말하는 것이죠.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 부처님(vairocana)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비로자나 부처님의 몇가지 특징은

첫째, 법신불은 무상(無相), 무색(無色)이다. 즉 어떤 실체적인 모습이나 색상이 없다는 뜻입니다.

둘째, 무소부주(無所不住)하다. 즉 아니계신곳이 없다는 뜻으로 온 법계(세계)에 충만해 있어 항상 우리와 같이 한다는 뜻입니다. - 여기서 한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法身佛의 法과 法界의 法은 다른 槪念입니다. 法身佛의

法은 眞理 그 自體를 말하는 것이고, 法界의 法은 現床世界, 卽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世上, 宇宙의 槪念입니다.

셋째, 법신불의 능력은 不思議합니다. 즉 생각할 수 없을 만큼 全知全能 하다는 뜻입니다.

넷째, 법신불의 공덕은 無量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보기만하면, 번뇌가 다 없어지고 환희의 마음이 솟아납니다.

이상이 법신불의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법신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물론 눈치채셨겠지만,

法身佛은 有信敎, 卽 신을 믿는 종교에서 말하는 神의 特徵과 類似합니다.

 

하지만, 華嚴의  法身佛은 유신교에서 말하는 神과는 決定的인 差異를 가집니다. 즉 法身佛은 어떠한 의지도 노력도 없는 무공용(無功用)입니다. 즉, 그냥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어떠한 의지나, 의도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냥 있어 법계를 두루 비추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대낮에 비추는 햇살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법신불을 진리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즉 법신불은 법을 몸으로 한다고 하여 어떤 인격체적인 것이 아니라, 진짜 말그대로 법을 몸으로 하는... 즉 존재해서 흘러가는 그 자체가 법신불입니다.

2)보살사상
보살사상은 교리적으로 보았을 때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사상입니다.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 초기불교나 대승불교가 딱히 뭔가의 구분을 짓는다는게 무의미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을 떠나서 많은 사람들이 구분지어 이야기하고 생각합니다.

보살이란, 보리살타(Bodhsattva)의 약어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 이란 표현이 적합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즉 초기불교의 '아라한'과 비슷한 개념을 가집니다만,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깨달음을 구함'이란 뜻과 함께 '중생을 구한다(제도한다)'는 뜻도 내포합니다. 즉 <상구보리 하화중생(위로는 보리(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이 보살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3) 유심사상(唯心사상)
唯心이란 말 그대로 '오직 마음뿐'이란 뜻입니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뜻으로 유신사상(唯神- 신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이끌어 나간다)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의 모든 것(일체)는 어떠한 개념인가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 가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개념으로 희로애락등의 모든 생물들의 감정, 그리고

두 번째가 그 감정이나 생각들에 의해서 생겨난 인공적인 물건, 마지막

세 번째가 산천초목과 같은 자연적으로 생겨난 자연물.등이 포함됩니다.

이렇게 볼 때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경우는 마음에 의해 생겨났다는 말은 자연적으로 성립이 됩니다.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의 경우까지 마음의 소생물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자칫 유신론과 다를 바가 없이 보여 집니다. 즉 심과 신이 동일하다는 개념이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또한 명확한 차이를 가집니다. 여기서 마음의 소생이란, 마음이 있어 그 마음에 의해 모든 것이 만들어졌다는 이분법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또 화엄에서는 이렇게 주체와 객체를 나누어 설명하지 않습니다. 즉 인연이 닿아서 생하고, 또 그 인연이 다하면, 멸하는 緣起의 槪念으로 설명됩니다. 즉 주와 객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심지어 유심의 마음까지도) 緣起의 所生, 緣起의 作用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의 유심론은 철저히 緣起의 입각한 思想을 말합니다.

4)법계연기사상
앞에서 말한 唯心思想이 존재의 生成論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면,

法界緣起思想은 개개의 사물이 서로 어떤 關係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사상의

첫 번째는 <제법은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원융무애(圓融無碍)하게 상의상성(相依相成)한다.>입니다. 이 말을 풀이하자면 세상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서로 서로에게 들락날락거리면서 서로 걸림없이 서로를 의지하며 생겨나고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바닷물과 파도의 관계처럼 현상적으로 보면 분명 바닷물과 파도는 다른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바닷물과 파도는 서로 바닷물이 되기도 했다가, 동시에 파도가 되기도하면서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그런 뜻이죠.

둘째는 <緣起하는 諸法은 相卽相入하여 주반구족(主伴具足)의 관係에 있다>입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들(심지어 보이지 않는 마음이나 의지까지도)은 서로 다름(차별의 의미)가 있을 지언정 높고 낮음의 主從關係에 서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즉 際法(존재)의 구조를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水平的인 立場에서 바라봄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가 존재하고 있을 때 남자가 있으므로 여자란 의미가 성립하고, 이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인간이 있으므로 그와 대비되는 개념의 자연이라는 개념이 서기도 하죠. 즉 남자와 여자, 인간과 자연등은 그 모습은 다를 지언정 남자로 인해서 여자가 존재할 수있고, 인간으로 인해서 자연이 존재할  수 있다는 식의 개념입니다.

셋재, 제법은 상즉상입하여 중중무진(重重無盡)한 관계에 있다. 즉 제법은 서로 거듭거듭 그물처럼 서로를 얽혀 있고, 끝이 없이 이런 관계는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즉 쌀 한톨을 예를 들어 그 쌀 한톨은 땅과 씨와 하늘과 바람과 햇볕, 그리고 농부의 땀과 운반하는 자동차, 그리고 밥을 짓는 어머니의 손길까지 그리고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밥을 먹은 자신과 소화시킨 후의 배설물과 다시 거름이 되고, 땅이 되고 또 자연이 되듯... 이렇게 끝없는 循環의 連續이죠. 이러한 세가지의 法界緣起의 根本思想은 現象的으로는 서로서로 다르지만 本質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같다고 보는

圓融無碍 思想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화엄경의 근본 사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화엄경은 80화엄경과 60화엄경, 입법계품만을 요약한

40화엄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화엄경의 전체 내용을 가장 핵심만 모아 요약해 놓은 것이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입니다. 가장 화엄의 핵심이기에 화엄사상 공부에도 가장 중심되는 공부가 이 화엄일승법계도의 해석과 정확한 의미 파악입니다. 화엄사상에 대해 정식으로 공부해 보고자 한다면 먼저 화엄일승법계도부터 차근히 읽고 해석해가면서

그 핵심의 뜻을 파악할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물론 쉬운 공부는 아닐테지만요.

 

withoutQ | 2005.11.28 10:22 |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