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언어도단(言語道斷) <끝> 信心銘
“일체 삼라만상은 생각의 그림자요 인간이 만든 언어일 뿐”
2014.12.22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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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둔황 막고굴 입구에서 석종사 금봉선원장 혜국 스님과 순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신심불이(信心不二)요 불이신심(不二信心)이니,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요 둘 아님이 믿는 마음이니라.”
道란 말로 설명하면 할수록 멀어지기 마련…언어의 길이 끊어지니 ‘임제 할’ 나온 것
부처님께서는 眞理에 대해서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도 眞理는 그대로 있었고, 깨달은 후에도 억만년 후에도 眞理는 그대로 존재”
두손 모아 합장하고 들어야 할 말입니다. 우선 믿는 마음 卽, 믿음(信)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신(神)을 믿는다고 하는 믿음(信)은 나(我)와 神을 둘로 나눠서 보는 믿음(信)입니다.
믿는 마음을 내는 나(我)가 있고, 믿어야하는 對相인 신(神)이 따로 나뉘어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神이라고 하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생각해 봅시다.
神만이 아니라 一切의 모든 이름은 人間이 지어내고 꾸며낸 말이며 만들어낸 單語, 槪念 觀念일 뿐입니다.
神이라는 槪念 自體가 人間의 必要에 依해서 만들어진 말일 뿐 固定된 實體가 아닌 것이거든요.
사람들이 不安한 마음이나 두려운 마음에서 依持할 곳을 찾아 苦惱하다가
사람들 自身이 神이라는 觀念 世界, 幻想 世界를 만들어낸 겁니다.
그에 反해서 ‘信心銘’에서 말하는 信心은 나(我)와 神이 둘로 나뉘어 진것이 아닌 '하나'인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이 아닌 '하나'인 믿음이란? 生覺을 일으킬 줄 아는 者와 對相이 둘이 아니라는 事實을 깨달은 世界
卽, 全切로서의 하나인 믿음입니다. 빛과 그림자가 하나요, 바닷물과 파도가 둘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 역시 둘이 아님을 설명하기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그 만큼 둘이 아닌 世界(不二世界)를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이 世上 一切의 森羅萬象이 모두 生覺의 그림자니까요.
그렇다고 눈앞에 있던 山이 갑자기 없어졌다거나 눈에 보이던 事物이 돌연 사라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있었고 對相으로서의 事物이 있었는데, 나와 對相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고 보니 對相으로서의 事物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나와 事物간의 거리가 없어지고 나니 全切로서의 내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보는 者와 보이는 對相, 보는 行爲가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좋은 山이니 나쁜 山이니 하는 分別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直觀(intuition)이 되는 것이지요.
‘直觀’이란 좋다 나쁘다는 分別하는 生覺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볼 뿐입니다.
이러한 直觀을 아인슈타인 박사는 人間에게 주어진 거룩한 선물이라고 말했더군요.
그러나 우리들 肉眼 卽, 肉身의 눈으로는, 볼 때는 볼 뿐, 귀로 들을 때는 들을 뿐인 直觀이 되지 못하고
색안경을 쓰고 ‘좋다, 나쁘다’고 分別하는 感情에 따라 自己만의 色깔을 입혀서 보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事物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生覺이 事物에 덧씌워진채로 내 生覺의 그림자를 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실오라기 만큼만이라도 믿는다는 生覺이 남아있는 믿음은 둘이 아닌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믿는다는 生覺의 틈새가 전혀 없이 믿음 그 自體가 돼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한 生覺 일어나기 以前 無念 無心 卽, 그냥 存在 自體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 100%면 깨달음도 100%라는 겁니다.
永遠한 自由, 永遠한 現在인 겁니다. 對相이 없는 ‘空(공)’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空은 아무것도 없다는 空이 아니라 오히려 全切를 말하는 空입니다.
내가 따로 있다고 生覺할 때는 事物 하나하나가 나의 相對性이요 걸림돌이었는데
나 하나 없음을 깨닫고 나니까 宇宙全切가 그냥 存在 自體인 겁니다.
本來가 그러했으니까요. 結局 ‘信心銘’ 말씀 全切가 이 한 소식 보여준 겁니다.
信心銘 句節句節이 本來 完全한 부처(佛)인 森羅萬象 우리 本質을 보여주신 것이지만
오늘 이 信心銘을 마무리하는 입장에서 다시 몇 구절만 살펴볼까 합니다.
信心銘 첫 구절인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嫌揀擇)이니”하는 구절이나
중간에 “허명자조(虛明自照)하야 불로심력(不勞心力)이라”는 구절
그리고, 오늘 마지막 구절인 “신심불이(信心不二)요 불이신심(不二信心)이니”하는 구절은
볼수록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는 가르침입니다.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하는 대목에서 지극한 도는 전혀 어려운 게 아니라
‘좋다, 나쁘다, 너다, 나다’하는 揀擇心만 몰록 놓아버리면 바로 ‘그 자리가 도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나니 너니’하는 分別心이 남아 있는 限 결코 지극한 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극한 도는 전혀 어려울 것이 없는 게 진실이지만 간택심이 있는 限 지극한 도를 보기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이러한 때에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생각이니 간택심이니 분별심이니 하는 모든 것이 다만 꿈속 일이란 걸 알고 꿈에서 몰록 깨어나던지
아니면 간택심이 끊긴 무심(無心)을 위하여 피나는 精進을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知識, 모든 業識이 오직 모를 뿐인 의정독로(疑情獨露)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화두참선을 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볼 때 화두 참선법 즉, 조사선이야말로
生覺의 限界를 뛰어넘는 참으로 妙한 藥이라고 생각합니다.
話頭란 허명자조(虛明自照)이니까요. 왜냐하면 ‘덕산방’이니 ‘임제할’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거든요.
덕산방 임제할은 위로는 부처님의 恩惠를 갚고 아래로는 衆生을 위하는 마음이 하나가 된 ‘허명자조’에서
나오는 大慈悲의 가름침이란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임제할’이라고 하는 ‘할’이 나오기까지 임제 스님께서 걸어오신 工夫 길을 갖고
그 할이 얼마나 대단한 할인가를 이론적으로 나마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임제 스님이 젊은 시절 황벽 스님의 門下에서 지낼 때라고 합니다.
임제 스님으로서는 그야말로 젖 먹던 힘을 다하여 精進을 하셨겠지요.
그러나 조실이신 황벽 스님의 문하에 찾아 들어온지도 2년이 넘어가고 3년이 넘어가는데도
내가 누구인가를 모르니 그 답답함이 온몸에 넘쳐났던 겁니다.
이러한 임제스님의 모습을 보고 그 당시 수좌이신 목주 스님이 한 마디 하십니다.
“이 보게 젊은 수행자 그렇게 답답하고 목이 타 들어가면 조실 스님께 찾아가서 여쭈어 보게나.”
임제 스님이 “스님, 저는 도대체 무엇을 물어야할지 조차 모르겠습니다”하니
“이 사람아 어떠한 것이 부처(佛)입니까 하고 물어보게”라고 답합니다.
結局 임제 스님은 조실 스님을 찾아뵙고 그대로 묻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는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30방을 내리치는 겁니다.
한 마디도 못하고 30방을 맞고 나오니 목주 스님이 조실 스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 하고 다시 묻습니다.
“아무 말씀 안하시고 30방을 때리셨는데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목주 스님이 “이 사람아 조실 스님께서 한 平生 道를 위하여 사신 어르신인데 그냥 때렸겠나.
다시 한 번 가보게”라고 이르십니다. 목주 스님의 격려에 임제 스님은 다시 조실 스님을 찾아 갔는데
또 다시 30방을 맞고 나온 겁니다.
이렇게 찾아 가기를 세 번, 세 번에 걸쳐 세 번 모두 30방을 맞고 나왔으니 임제 스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정말이지 죽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옛날 어른들은 스승을 믿는 마음이 요즘 사람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렇게 맞고도 생각하기를 “조실 스님께서는 오로지 우리 수행자들을 위해서 사시는 어른인데
이렇게 방을 칠 때는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내가 우둔해서 저러한 큰 慈悲를 받아들이지 못하는구나”
하고 생각을 하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한 뒤 떠날 준비를 합니다.
어디에 가서, 어떻게 해서라도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고 와서 기필코 이 은혜를 갚겠다고 길을 나섭니다.
도(道)를 위해서 이 한 목숨 온전히 바치지 않고는 이렇게 生覺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때 목주 스님이 임제 스님의 생각을 알아차려 그래도 조실 스님께 인사는 하고 가야한다고 일러줍니다.
임제 스님은 또 그대로 따릅니다.조실 스님께 하직 인사를 올리자,
조실 스님께서 “어디로 가려는가”하고 묻습니다.
“예, 조실 스님 어디로 가면 좋겠습니까?”
“응, 저 고한에 있는 대우 스님을 찾아가 보게나.”
임제 스님은 그 길로 대우 스님을 찾아갑니다.
대우 스님의 첫 마디가 “어디서 왔는가” 하니,
임제 스님은 “예, 황벽 스님 문하에 있다가 왔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대우 스님이 “그래 황벽 스님은 法을 어떻게 쓰는가?”라고 재차 묻습니다.
그러자 “예, 법을 어떻게 쓰는지는 모르겠고 3차례 참방하여 3차례나 30방을 맞았습니다”라고
있었던 일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이에 대우 스님 하시는 말씀이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군.
황벽 스님이 그렇게나 慈悲로운 法을 쓴다는 말인가”라고 讚歎하십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은 대우 스님 그 한마디 말씀에 크게 깨닫게 됩니다.
“허명자조(虛明自照) 불로심력(不勞心力)”의 道理를 깨달아 홀연히 소리하기를
“아이쿠 황벽의 佛法도 몇 푼어치 안 되는 구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심불이(信心不二)입니다.
여기에서 대우 스님과의 거량이 끝나자 대우 스님 말씀이
“자네는 황벽 스님 法에 의해서 깨쳤네. 어서 돌아가게”라고 이르니
임제 스님은 다시 황벽 스님의 회상으로 돌아와서 그 法을 이으신 겁니다.
글재주가 없어서 이렇게 밖에 쓰지 못하기는 하지만 信心不二 不二信心
이 말귀 안에 숨겨진 임제 스님의 위법망구(爲法忘軀)나
황벽 스님과 대우 스님께서 사람을 사랑하고 위하는 활발발한 그 마음은
어떤 무슨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는 겁니다.
지도무난(至道無難)은 이렇게 해서 지도무난(至道無難)이 되는 겁니다 생각이 끊긴 자리에서.
그렇게 된다면 허명자조(虛明自照)는 설명이 필요 없이 至道無難 그 自體가 됩니다.
텅~비면 밝음이요, 밝음이면 스스로 비춤이니 結局 道는 말로는 說明할 수 있는 世界가 아니기에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세계인 겁니다.
“언어도단(言語道斷)하야 비거래금(非去來今)이로다,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過去· 現在· 未來가 아니로다”라는 의미입니다.
임제 스님이나 스승들이 스승이 될 때까지 걸어오신 길, 그 길이 다하고 나니 바로 言語의 길이 끊어진 겁니다.
그래서 임제의 할이 나온 겁니다. 할이란 卽, 眞理라는 말이 나오기 以前의 消息입니다.
불이신심(不二信心)인 것이지요. 그 사실을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緣起法, 다시 말해서 眞理란? 내가 이 世上에 나오기 前에도 眞理는 그대로 있었고
내가 깨닫고 나서도, 成佛하고 나서도 眞理는 그대로요 億萬年 後에도 眞理는 그대로라고.
이 얼마나 고구정녕하신 말씀입니까? 그러니 ‘永遠한 現在’라고 말하는 겁니다.
永遠한 現在라고 말하면 現在가 永遠한 걸로 生覺하는 이가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永遠한 現在라는 그 말은 過去도, 未來도, 現在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過去가 없어지고, 未來도 없어지고 나니 그 사이에 있었던 現在도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냥 存在 自體이기에 부득이 영원한 현재라고 ‘이름’하는 겁니다.
영원한 현재가 있을 까닭이 없기에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과거· 현재· 미래가 아닌 겁니다.
이제 일년간 써왔던 ‘신심명’을 끝냅니다.
도(道)란 말로 설명할수록 멀어지기 마련인데 지난 일년간 허물이 많은 줄 압니다.
生覺生覺에 菩提心 이어지기를 發願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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