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무아와 업보

장백산-1 2015. 1. 10. 19:47

 

 

 

 

 

무아와 업보

 

 

우리는 行爲의 主體, 卽 固定된 作者가 별도로 있어서 行爲를 일으킨다고 生覺한다.

그리고 이러한 別度로 고정되게 存在한다고 生覺하는 行爲의 主體를 自我(나)라고 生覺한다.

 

그러나 붓다는 이러한 行爲의 主體의 存在를 否定한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눈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認知하는 自我, 行爲하는 自我는 固定되고 不變하는 實體로서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因緣과 條件에 依해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無常한 것, 現象일 뿐이다. 

 

따라서 認知하고 行爲하는 固定 不變하는 實體는 없고, 오직 行爲를 通해

相互 影響을 주고 받는 關係   卽, 業을 짓고 報를 받는 일만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佛敎에서는 緣起說이라는 相互因果律에 依해

自我와 世界, 人間과 自然, 精神과 物質을 二元化된 實體로 보지 않고,

行爲를 通해 서로 影響을 주고받는 相互關係로 理解한다.

 

이러한 붓다의 無我說은 自我를 全的으로 否定하는 것은 아니다.

業報는 있으나 作者는 없다는 말은 

不變하는 固定된 實體(作者)로서의 自我는 存在하지 않으나

行爲를 通해서 變化해가는 業報로서의 自我는 있다는 말이다.

卽, 착한 사람(作者)가 있어서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착한 일(業)을 지으면 착한 사람(報)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無我說의 根本 취지이다.

 

人間의 本質은 靈魂도 精神도 物質도 아니다.

모든 人間에게 共通된 人間의 本質이 存在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삶에 의해 스스로를 이룬다. 

卽, 人間의 本質은 業報라는 말이다.

 

Majjhima-Nikaya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모든 衆生은 業의 所有者이며, 業의 相續者이며, 業에서 나온 것이며,

業의 친척이며, 業을 依持處로 한다.

作者는 없고 果報는 있다는 이 말은 무엇인가?

세존은 業報를 認定하지만 不滅의 自我를 認定하지 않았다

세존은 無我와 業報에 대하여 (第一義空經)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業報는 있으나 業을 짓고 報를 받는 行爲 主體로써의 自我는 없다"고 한다.

우리는 事物을 볼 때 固定된 實體로써의 보는 自我가 存在하고 있으며

이 自我가 外部에 存在하는 事物을 본다고 生覺한다.

卽, 우리는 事物을 볼 때 보는 나를 意識하며 이러한 意識을 土臺로 自我가 있다고 生覺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보는 나(자아)를 볼 수 없고 듣는 나를 들을 수 없다.

우파니샤드에서는 보기 때문에 눈, 듣기 때문에 귀,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라 불린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아트만(Atman)에 대한 活動이다. 이러한 見解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눈이 事物을 보는 것으로 生覺하지 않고 自我가 눈을 通해 事物을 본다고 生覺한다.

이 우파니샤드 哲學者들은 눈 귀 코등을 通해 事物을 知覺하는 自我를 아트만이라 불렀다.

 

그래서 그들은 볼 때 보는 者를 볼 수 없고 들을 때 듣는 者를 들을 수 없고

생각할 때 生覺하는 者를 알수 없고, 알 때 알 수 없으나

그 모든것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트만이라 했다.

아트만은 不滅의 存在로 보이지 않으나  보는 者요....알수 없으나 아는 者로 生覺했다.

 

세존은 第一義空經에서 이러한 아트만과 같은 自我를 非判했다.

우리는 보고 듣고... 할 때 行爲하는 主體로써 固定 不變하는 自我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듣고 行爲하는 自我를 찾아보면 우리에게 觀察되는것은

行爲하는 自我가 아니라 知覺 卽, 보고 들음으로써 生成된 느낌 感情 生覺뿐이다.

이런 느낌 감정 생각이 보고 듣는 自我의 實體이다.

볼 때 보는 者가 있다는 느낌 감정 生覺이 나타나며 이 느낌 감정 생각을 自我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보는 者는 보지 않을 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만약 볼 때는 나타나고 보지 않을 때는 사라지는 그런 보는 者가 固定되고 不變하는 自我로

實在한다면 그 自我는 보기 前에는 어디선가 숨어있다가 볼 때는 나타나고

보지 않을 때는 그곳으로 사라져야한다.

固定 不變하는 自我가 나타날 때 오는 곳과 사라질 때 가는 곳이 과연 存在하는가.

보는 자가 볼 때 온 곳이 없이 나타나고 보지 않을 때 간 곳이 없이 사라진다면

그러한 보는 者는 固定된 實體性이 없는 存在이다.

 

여기서 세존은 단언한다.

"보는 行爲(業)와 그 業/行爲의 結果로 나타나는 知覺(報)는 있지만

보는 者로써 작자, 自我는 없다"고. 이것이 無我思想이며 空思想이다.

緣起說에 基礎한 無我說과 空思想은 바로 불교의 業說이다.

作者는 없고 果報는 있다라는 말은 無我說과 業說 空思想을 말해주는 말이다.

業報는 있으나 作者는 없다라는 말은 業을 짓고 果報를 받는 存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業을 지으면그 果報로써 自我와 世界가 意識이라는 스크린 위에 나타난다는 말이다.

卽, 도둑이 있어서 도둑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둑질을 하면 그 果報로써 도둑이 되고

그 도둑에게는 도둑의 世界가 나타나는 것이다.

 

중생의 세계 轉變說과 적취설이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外道들의 思想이듯이

緣起說은 世界와 人間을 설명하는 佛敎 思想이다. 緣起說은 또 現實世界와 自我를

어떤 實體의 離合集散으로 보지않고 無明에서 緣起한 것으로 보며, 이러한 緣起 過程을

설명하는 것이 十二處 . 十八界. 五蘊등의 교리다. 이가운데 十二處는 世界와 自我의 根源이다.

 

<잡아함319경>의 세존과 생문이라는 바라문과 對話를 보자.

생문 ; 구담이시여, 所謂   一切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했다.

세존 ; 一切란 十二處를 말한다. 보는 者와 보이는 모습, 듣는 者와 들리는 소리, 냄새맡는 者와 냄새,

맛보는 者와 맛, 만지는 者와 만져지는 촉감, 생각하는 者와 생각되는 대상, 이것을 一切라 부른다.

만약 이것은 一切가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言說만 있을 뿐 물어도 알지 못하고 疑惑만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境界가 아니기 때문이다. .......

 

이 經의 내용에서 바라문이 묻고있는 一切는 世界와 自我의 根源을 말한다.

우파니샤드에서 " 一切는 브라만이다. 一切는 브라만 여기서 생겨나고 돌아간다.

그러므로 便安한 마음으로 경배하라, 實로 人間은 欲望으로 되어있다.

人間은 世上에서 갖는 欲望에 따라 來世에 存在한다."라고 이야기 한다.

세존에게 질문하는 생문이라는 바라문은 바라문교에서 이야기하는 

存在의 根源인 브라만에 對하여 세존의 見解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存在의 根源에 對하여 바라문교에서는 브라만이라 주장했고

沙門들은 四大와 多樣한 要素라 이야기 한다. 

이들은 不滅의 實體를 生成 變化하는 存在의 根源이라 生覺한 것이다. 

 

그러나 세존은 모든 存在의 根源을 不滅의 實體라 하지않고

우리의 知覺構造, 卽 十二入處라고 이야기한다.

 

다음은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말이다.

" 내 개인적 입장에서 보자면 나 자신이 나 라고 부르는 것에 가장 가깝께 갈 때,

나는 항상 즐거움, 차가움, 빛, 어두움, 사랑, 미움, 고통, 기쁨, 이러한 知覺을 더듬어 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이러한 知覺없이 自身을 捕捉한 적이 없고, 이러한 知覺 외에는 아무것도

觀察한 것이 없다."고 한다. 비단 自我뿐만 아니라 우리가 存在의 根源을 찾아갈 때 우리가

發見하는 것은, 보이고, 들리고, 생각되는 知覺일뿐 어떤 固定된 實體도 發見 되지 않는다.

 

세존이 一切는 十二入處라고 하면서 다른 것은 一切라 하지 않는 것은

外道들이 주장하는 存在의 根源은 觀察에 依해 드러난 事實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疑心하고 追究할 때 어떤 解答도 주지 않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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