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더미에 깔려 힘을 소모한다
쉬는 날 오후 창가에 便安하게 앉아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다보면 마음이 너무나도 平和로울 때가
있습니다. 바람 한 자락에서 내가 있는 자리가 깊은 산속같이 느껴져 뭔가 모를 幸福感을 느끼기도
하고, 마음이 完全히 이완이 되어서 平穩해집니다. 그러다가도 고개가 돌아가 옆에 놓인 스마트 폰이
보이면 自然스럽게 휴대폰을 켭니다. 그 속에는 온갖 世上이 다 들어 있습니다. 온갖 소식과 日程標가
있고 그 일정표를 보면 슬슬 근심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다음 주에 있을 일, 그 다음 주에 있을 일….’ 그렇게 일정표를 펴는 瞬間부터 마음의 平和는 깨져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生覺이 일정표에 에너지를 부여합니다. 일정표 하나하나마다에 生覺이 生覺을 介入
시킵니다. 生覺은 쉬지않고 계속 속삭입니다. ‘다음에 있을 그 일 준비했어? 아직 준비도 안 해 놓고
이렇게 편하게 쉬고 있는 거야? 너 精神이 있는 놈이야, 없는 놈이야!’ 라고 속삭여댑니다.
‘빨리 일해야 돼, 그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할 거야?’
일이 잘 되든지 잘못 되든지 그 때 가서 고민하고 턱~저지르면 되는데, 우리 生覺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래의 일을 미리 당겨 와서 고민하는 것을 즐겨합니다. 生覺이란 녀석이 계속해서 生覺에 生覺을
부여함으로써 다음 주에 있을, 그 다음 주에 있을, 한 달 뒤, 두 달 뒤, 일 년 뒤, 심지어 먼 나중의
일까지 미리 걱정합니다.
‘노후가 되면 뭘 해 먹고 살아야 되지? 그때 가면 내 집이라도 하나 있을까? 남들 다 있는 아파트 하나도
없이 나는 이게 뭐 하는 거지. 전세 값도 올랐다는데 어떡하면 좋지?’ 그러다가 ‘남들은 저렇게 잘 사는데
나는 참으로 처량하고 불쌍한 놈이로구나’ 라는 生覺이 들면서 갑자기 人生이 우울해지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生覺이 많아지게 되면 우리는 쓸데없는 온갖 生覺의 더미에 깔려, 그 生覺들을 處理하는데
에너지를 허비하며 힘을 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表面에 일어나는 生覺이 나의 意識 마음을
支配하기 始作하는 瞬間부터 내 根源의 에너지인, 내 內面의 眞正한 힘과 智慧인, 모든 것을 이끌고
갈 수 있는 無限한 可能性의 世界가 닫히기 시작합니다. 그 無限한 可能性의 世界가 닫힌 채로
온갖 生覺이 나의 意識 세계를 支配하기 始作하면 내 根源의 에너지인 內面의 힘과 智慧가 사라집니다.
宇宙的인 無限한 可能性의 存在 내가 고작 작은 부스러기인 生覺 의 스토리 속에 갇힌 옹졸한 存在로
굳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生覺 分別 妄想에 갇히지 않은 채로 無限한 可能性의 世界를 向해서 나를 활짝 열어 놓게 되면
그 텅 빈~가운데에서 홀연히 번뜩이는 靈感이나 直觀이 생겨나곤 합니다. 번쩍하고 오는 그런 靈感은
많은 生覺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고요할 때, 自然과 同化되어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있을 때, 아니면 어디 낯선 여행지에 있을 때, 바로 그런 텅~빈 고요한 瞬間에 번뜩 일어납니다.
生覺이 힘을 잃었을 때 生覺 너머에서 번뜩이는 閃光 같은 靈感이 떠오르는 것이지요.
이렇게 마음이 텅~빈 가운데서 홀연히 일어난 直觀과 靈感으로 始作한 일이 생각지도 못한
큰 成功을 이루거나 奇蹟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 每 瞬間의 現在에서 쓸데없이 미리 生覺을 부풀려 고민할 것이 아니라 그 生覺들을
잠시 내려놓고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맑은 공기의 편안함 속으로
들어가서 그 瞬間의 現在에 存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瞬間을 누리고 만끽하면서 그 瞬間
마음을 텅~비우고 삶을 통째로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根源의 힘과 智慧가 우리
삶의 表面으로 强力하게 登場하게 될 것입니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평일 07:50~08:00)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