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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과 기쁘게 공생하는 지혜 있다면 중생도 ‘부처’

장백산-1 2015. 4. 19.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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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중생-하
주변과 기쁘게 공생하는 지혜 있다면 중생도 ‘부처’
2015년 04월 14일 (화) 15:34:12이진경 solaris0@daum.net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모든 衆生은 共同體다. 各各의 衆生이 共同體라고 말할 때, 우리는 各各의 衆生들이 어떻게 生存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共同體란 構成要素들의 共生體다. 卽, 뜻하지 않은 ‘소화불량’으로 시작된 것이긴 하지만, 미생물의 공생은 이런 공동체들이 어떤 원리에 따라 구성되고 유지되는지를 보여준다. 잡아먹으려는 행위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그게 실패한 이후, 홍색세균은 자신을 잡아먹으려던 넘에게 에너지를 생산해주고 그로부터 영양소를 얻는다. 그러면서 미토콘드리아라는 소기관이 된다. 잡아먹은 넘은 반대로 영양소를 주면서 에너지를 얻는다. 어느 쪽이든 서로를 위해 무언가 이득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이타적이지만, 그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것이란 점에서 이기적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 그것은 심지어 서로 적대관계 속에서 만난 것들조차 하나의 공생체로 만들어주며, 서로 기대어사는 공동체로 묶어주는 것이다. 어떤 인연에 의해 만났든, 그것의 존재를 나를 위한 것으로 만들고, 나의 존재 또한 그를 위한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공동체인 중생이 살아가는 원리다.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공동체는 서로 공생관계
탐심·진심을 앞세우기에  중생이 부처와 다른 것


우리는 인간들이 모여 만드는 공동체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가족이나 마을 같은 공동체.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이 섞여 만들어진 공동체들도 많다. 農業共同體조차 사실은 인간뿐 아니라 소 같은 동물, 풀이나 채소, 벼는 물론 흙과 물, 흙속의 수많은 미생물들까지 참여하여 만들어지는 공동체다. 人間이 있든 없든 生態界는 어느 것이든 모두 共同體들이다. 그래서 生態學에서는 共同體(communty)라는 말을 基本單位로 사용한다. 이 모두가 衆生이다.

地球는 그런 式의 共同體 가운데 가장 큰 共同體일 것이다. 地球가 하나의 生命體라는 주장을 했던 것은 러브록이라는 大氣化學者였지만, 이를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던 것은 最小크기의 微生物 共同體를 발견했던 마굴리스였다. 地球의 大氣比率은 二酸化炭素가 대부분인 화성이나 금성과 달리 酸素가 21%, 質素가 78%, 그리고 이런저런 氣體가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다. 반응성이 강해 어느새 다른 것과 달라붙어 산화시키는 산소가 매우 긴 시간 이 비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더구나 동물들이 호흡하며 매 순간 산소를 소모하고 있음에도 이 비율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누군가 소모하는 것만큼 생산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植物들과 微生物들이 햇빛을 利用해 二酸化炭素를 소모하고 酸素를 배설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식물과 미생물에게 동물과 인간이 산소를 얻고, 반대로 인간과 동물은 그것들에게 이산화탄소를 주는 循環的인 關係가 지금과 같은 지구의 대기비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산소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저런 생명체들이 없다면, 기체는 금성이나 화성처럼 이산화탄소 같이 活性 없는 대기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이는 엔트로피가 增加하여 도달하게 되는 ‘열역학적 평형상태’이다. 더 이상 變化가 일어날 可能性이 없기에 ‘열역학적 죽음’이라고 불리는 게 이런 平衡狀態다. 生命體는 이런 熱力學的 平衡과 다른 恒常性을 갖는다. 냄비는 100도 넘는 온도로 데워놓아도 조금 있으면 식어서 주위 온도와 같은 상태가 된다. 그러나 우리의 體溫은 추워도 36.5도로 恒常性을 갖는다. 그걸 유지하기 위해 신체 내부에서 細胞들이 活動하여 熱을 生産하고 있는 것이다. 地球도 비슷하게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그 덕분에 겨울이 와도 零下 20도 以下의 낮은 온도로는 잘 내려가지 않고 여름이 와도 40도를 잘 넘지 않는다. 地球는 自身의 體溫을 갖고 있는 것이다. 一定하게 유지되는 大氣比率처럼, 지구의 온도 역시 그런 恒常性의 하나다. 이런 이유에서 地球는 그 自體로 하나의 巨大한 共同體일 뿐 아니라, 강한 의미에서 하나의 生命體다. 인간과 동물, 식물, 미생물뿐 아니라 대지의 흙과 바닷물 등이 서로 물고 물리는 巨大한 循環係를 이루어 存在하는 巨大한 共同體다. 하나의 衆生인 것이다.

이 모두가 衆生들이다. 인간이나 동물 뿐 아니라, 작게는 세포에서부터 심장이나 허파 같은 기관들, 크게는 인간들의 집단이나 생태계, 그리고 지구까지 모두 衆生이다. 自利利타의 방식으로 서로가 기대어 살며, 서로에게 무언가를 주고 받으며 共生하는 共同體들이다. 生命의 秘密, 그것은 바로 이처럼 서로가 循環係를 이루며 기대어 사는 것이다. 因緣으로 다가오는 것을 오는 대로 肯定하고 그것과 기쁘게 共生하는 法을 아는 것을 ‘智慧’라 하고, 그런 智慧를 가진 이를 ‘부처’라 한다면, 共同體로서의 衆生은 消化不良으로 始作된 작은 微生物들의 結合體부터 모두 그런 智慧를 갖고, 그 智慧에 따라 살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부처(佛)라고 할 것이다. 利他的인 것이 自身을 위한 것이 됨을 아는 것. ‘衆생이 곧 부처’라는 말을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면 어떨까?

그러나 불행히도 이것이 사태의 전부는 아니다. 생태계가 그렇듯이, 서로 기대어 산다 함이 단지 好意的인 關係 속에 사는 것만은 아니다. 그 循環係는 ‘먹이사슬’이라 불리는 먹고 먹히는 관계의 연쇄이기도 한 것이다. 草食動物은 풀이나 열매를 먹고, 肉食動物은 초식동물을 먹고, 그 육식동물을 다시 人間 같은 다른 動物이 먹고, 그것들은 죽어 微生物에게 먹히며, 微生物은 다시 植物을 키우는 營養素가 되는 方式의 循環. 利他的인 것조차 實은 利己的인 것이다. 두 박테리아의 共生도 사실 그런 利己的 紀元을 갖는, 먹고 먹히는 敵對關係에서 始作된 것 아닌가. 농사를 짓는 이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작물을 좀더 많이 얻기 위해 ‘雜草’라 불리는 인근의 식물들을 반복하여 제거한다. 소를 키우는 목장을 만들기 위해 미국인들은 수많은 들소들을 학살했다.

내부적으로 긴밀한 상생적 연관을 갖는 有機體 또한 그렇다. 나를 危脅하는 것은 나를 먹으려 덤벼드는 포식자들만은 아니다. 우리의 身體는 밖에서 오는 것 없이는 生存할 수 없다. 卽 먹고 마시고 숨 쉬어야 한다. 그러나 잘못 먹으면 몸을 상하고 잘못 마시면 죽기도 한다. 내가 먹고 마시는 것들에 포함된 微生物들로 인해 病들기도 한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共同體의 境界를 뚜렷하게 하고 드나드는 것을 管理하는 免役係들이 만들어진다. 면역반응의 요체는 내 몸 안에 있는 것과 바깥에 속하는 것을 區別하는 것이고, 밖에서 들어온 것을 처분하는 것이다. ‘나’의 안팎을 구획하는 ‘自我’란 이런 이유로 만들어진 것일 게다. 細胞조차 이미 밖에서 들어온 것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사회도 그렇다. 이주민들처럼 밖에서 온 외부자들에 대해 경계하고 배타적인 태도를 갖는 경우가 아주 흔하다.

그러나 어느 사회든 이주자는 자신이 필요해서 불러들인 것이다. 몸 또한 그렇다. 어떤 생물도 먹어야 하기에, 밖에서 오는 것을 모두 除去하거나 ‘處分’해선 生存할 수 없다. 알레르기 反應은 내가 먹어야 할 것에 대해 免役係가 과잉반응할 때 발생한다. ‘自己’를 保護하려는 이런 반응이 과해지면, 자기 신체의 일부조차 밖에서 온 것으로 看做하여 공격하는 免役性 疾患이 발생한다. 류머티즘이 대표적인 것이지만, 거의 모든 藏器에서 이런 과잉면역으로 인한 질환이 존재하며, 루푸스병처럼 분자적인 수준에서 자기 신체 전반을 밖에서 온 침입자로 공격하는 극한적 질환도 존재한다. ‘자아’가 강하면 자기를 잡아먹는 것이다!

그렇기에 因緣으로 다가오는 것을 그대로 肯定한다는 것을 결코 쉽지 않다. 달려들고 所有하려 하며, 도망치거나 밀쳐내려 한다. 必要한 것을 가지려는 마음(탐심(貪心))과 싫어하는 것을 밀쳐내려는 마음(진심(嗔心))은 外部에 기대면서도 內部를 保護하려는 이런 사태에 기인하는 것이다. 生命體이기에, 살기 위해서 過하게 가지려 하고 過하게 밀쳐내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自身을 유지하려는 意志 自體에 依해 衆生들은 오지 않은 것을 얻기 위해 치달리고, 갖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 執着하며, 가버린 것을 붙잡으려 애쓰고, 바로 옆에 있는 것을 避하려 하며, 避할 수 없이 다가온 것을 밀쳐내려 바둥거린다. 이런 의미에서 衆生은 부처와 달리 智慧 대신 無明 속에서 산다. 하여, 중생은 부처와 다르게 사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입이 좋아하는 대로 사는 사람은 몸이 괴롭다. 입에 좋은 것을 과하게 먹고 마시는 걸로 인해 몸의 다른 細胞들이 苦痛을 겪는다. 더욱더 난감한 건 팔기 위해서든 즐기기 위해서든 입에 맞도록 맛을 더하여 입마저 속이며 먹고 마신다는 것이다. 그리곤 그 맛에 執着한다. 입이 하는 分別이 共同體인 肉身,몸 全切를 망가뜨려 病들게 한다. 生態係도 地球도 그렇다. 自身들이 必要한 것을 지나치게 퍼다 쓰고 自身들의 便宜만을 지나치게 追究하는 人間들로 인해 地球라는 共同體는 亡가지고 破壞되어 ‘持續可能性’을 疑心해야 하는 地境에 이르렀다. ‘自利利他’가 提供하는 智慧로운 삶의 潛在性은, 좋아하는 것을 얻고자 치달리고 싫어하는 것을 내치고자 애쓰는 마음에 가려 無力化되고, 逆으로 本性의 어찌할 수 없는 利己性을 인정하는 것만이 사실과 부합하는 ‘지혜’인 양 되어 버렸다. 덕분에 공동의 삶을 말하고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은 이념 때문에 현실을 오도하는 것이 되거나 사라진 과거에 대한 안타깝지만 헛된 노스탤지어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逆으로 衆生은 原來 共同體的 存在고, 항상-이미 공동체적 존재이건만, 공동의 삶을 만들어가는 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病들어가는 몸, 亡가져가는 地球를 살리려면 입이나 人間의 好惡 分別을 내려놓고, 몸이나 지구의 고통에 눈 돌리고 그것이 원하는 것을 洞察하는 게 필요한 건 이 때문이다. 좋은 삶을 위해선 智慧가 필요하지만, 善惡好惡의 分別을 떠날 때에만 智慧가 可能해지는 것 또한 이 때문일 게다. 衆생이 바로 부처이건만, 부처가 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혹은 부처가 못되면 부처와 비슷하게라도 살려는 意志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